번역이야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서 뇌과학까지

Sense와 Sensibility의 비밀

2025.02.05 | 조회 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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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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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처음부터 당신을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전부 번역하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그 순간, 그때 이미 머릿속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한 번역가가 한 작가의 모든 문장을 덜컹거리며 통과하는 여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문장을 한 줄 한 줄 곱씹어 읽고, 이해하려 애쓰며 사유하고, 우리말로 옮겨 오고, 다시 돌아가 고쳐 쓰는, 작가와 작품에 부단히 다가가는 길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소실되는 것과 창생(創生)하는 것들을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번역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번역할 수 없는 것까지 당신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와 풍습과 책과 사람들, 낯선 시간과 장소들을 당신에게 가까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오스틴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나기를, 좀 더 생생하게 감각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행간을 당신도 보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당신도 제인 오스틴을 알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면서요. 어쩌면 그 사랑으로 우리가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사랑. 사랑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요.

문학을 연구하고 우리말로 옮기는 사람으로 살면서, 인공지능의 시대에 번역가라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질문을 받곤 했어요. 지금 저는 제 나름대로 그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질문을 다시 받게 된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사람만이 번역이라는 행위를 통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요. 사람 번역가라서 자신이 번역하는 작품과 작가를 사랑할 수 있고, 작가와 작품의 세계를 알고자 고군분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얻은 앎을 사람인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사람이라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사람이기에 여러 가능한 길을 두드려볼 수 있고, 수많은 갈림목 앞에서 이리저리 따져볼 수 있고, 결국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하면서도 길 없는 땅과 물 위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요. 주저하고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좌절하며 다다른, 책임 있는 선택의 열매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요. 많은 번역을 인공지능 작업으로 대체하는 흐름 속에서도 문학 번역만은 사람의 손을 타야 한다고들 믿는 건 이런 이유가 아닐지요.

 

*

사실, 요즘 오스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쉬이 옮길 수 없는 행간을 종종 마주치고 있어요. 그래서 축자적 해법만으로는 옮겨올 수 없는 오스틴 텍스트의 중요한 층위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제가 머뭇거리고 궁리하다 (아쉬운 대로) 길을 찾은 사례들을 이렇게 한 번씩 들려드리려 합니다.

먼저 오늘은 오스틴의 첫 장편소설 『이성과 감성』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번역에 대한 고민은 ‘Sense and Sensibility’라는 제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성과 감성』은 귀에 착 붙는 리듬으로 원어의 의미를 무난하게 풀어낸 훌륭한 번역이고, 우리 판본 역시 이 제목으로 선보일 예정이에요. 주인공 엘리너와 메리앤의 성격과 행동도 어느 정도는 '이성'과 '감성'의 비교, 대조, 대립을 통해 그려지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오스틴이 이런 대조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어째서 ‘reason’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sense’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이성reason’은 당시 인간의 품격을 내보이는 가장 중요한 자질로 여겨졌는데 말이에요. 만일 그 단어를 썼다면 이 작품의 제목은 ‘Reason and Feelings’ ‘Reason and the Passions’ ‘Reason and Emotion’ 등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오스틴이 그 대신 ‘Sense and Sensibility’라는 제목을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존재합니다.

일단, 당대 유럽 사람들은 이성(reason)이라는 추론 능력이 남자에게만 있고 여자에게는 감정(feelings)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 지독한 남성 중심주의적 사회에서 여성은 판단력이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취약하고 지극히 예민한 존재였으니까요. ‘reason’과 ‘feelings’는 그 개념 자체에 남자와 여자라는 젠더 정체성이 내재되어 있고 위계와 서열도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죠. 바로 이 시기에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사회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 인권에 대한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를 발표합니다. 여성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여성이 지적으로 열등한 것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국가는 여성을 “장식품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책인데요, 이 주장이 당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그때가 1792년, 제인 오스틴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1796년보다 불과 몇 년 앞선 때였죠. 오스틴은 소설을 쓰면서 ‘reason’과 ‘feelings’를 사용하면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치 않는 논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요. (호사가들은 제목만 보고 여자에게 ‘reason’이 있느니 없느니 왈가왈부했을 테니까요.) 이런 추측에는 근거가 있어요. 잘 알려지진 않은 사실이지만 초기의 제인 오스틴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다분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제인 오스틴의 초기 소설은 울스턴크래프트를 우회한 채 논할 수가 없답니다.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은 흡사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서사적 화답 같은 작품이거든요. 울스턴크래프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여자에게도 이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다는 결기에서 쓴 소설처럼 보일 정도지요. 이 두 작품에는 곳곳에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유와 어휘가 메아리처럼 흩뿌려져 있는데요, 이 이야기는 언젠가 또 다른 편지에서 들려드릴게요.

아무튼 이 때문에 오스틴이 ‘이성’과 ‘감성’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상정한 건, 궁극적으로 해체하고 허물기 위해서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reason/feelings'와 달리 ‘sense’와 ‘sensibility’는 위계도 서열도 없을 뿐 아니라 서로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단어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사례로 들어 뇌과학 및 사회심리학 논의를 전개한 『뇌에 관한 제인의 생각: 사회지능의 과학을 탐구하다Jane on Brain: Exploring the Science of Social Intelligence』에서 저자 웬디 존스(Wendy Jones)는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 메리앤과 엘리너가 우화의 주인공처럼 납작한 대립적 인물들이 아니며, 제목으로 쓰인 ‘sense’와 ‘sensibility’ 자체가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두 단어 모두 단순한 의미에서의 인지능력, 그러니까 자신이 감각한 것을 바탕으로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통합해 판단하는 능력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sense’는 이성적 판단을 뜻할 수도 있지만 감정적 인식을 뜻하기도 해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그들의 감정을 판단하고 자기 행동의 향방을 정하는 능력이고요. 한편 메리앤은 ‘sensibility’를 격정이나 순수한 내면의 진정한 지표로 착각하고 어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는데, 이 착각은 ‘sensibility’라는 자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낭만주의로 이행하면서 비합리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찬양하던 당대의 문학과 예술에 메리앤이 무비판적으로 젖어 있었던 탓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한 ‘sense’와 ‘sensibility’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흐리는, 결정적인 언어적 이유도 있지요. 두 단어는 형용사 ‘sensible’을 공유하는 사이랍니다. 이 ‘sensible’이라는 형용사는 『이성과 감성』 속에서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마법의 단어입니다. 맥락이 달라질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지지요. 어떤 때는 ‘sense’ 쪽으로 기울어 누군가 사리 판단이 바르다든가 눈치가 빠르다든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임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쓰이지만, 어떤 때는 ‘sensibility’ 쪽으로 기울어 인물의 예민한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에서 쓰이죠. 감각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물질적 성질을 뜻할 때도 있고요. 심지어 한 문장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답니다. 엘리너가 루시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 ‘sensible’은 뼈저린 감정과 합리적 인식을 아우르는 뜻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야기 속에서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 민감성은 의미심장한 도덕적 감정으로 합쳐지게 되지요.

그러니 하나의 도착어만으로는 ‘sensible’이라는 단어에 담긴 이 모든 의미를 드러낼 길이 없습니다. 뜻이 달라지는 맥락을 먼저 따라가야 하니까요. 역어로는 그때 그때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의미를 좇아가면서 융통성 있게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거죠. 어떤 때는 “분별있다”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섬세하게 감정을 읽는다”가 되었다가... 그래서 저는 ‘Sense’와 ‘Sensibility’와 ‘sensible’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꼭 시각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핵심적인 세 단어가 소설 곳곳에 포진해 만들어내는 의미의 움직임을 놓쳐버리면 텍스트의 풍부한 양감이 푹 꺼질 수도 있으니까요. 한 단어가 얼마나 변화무쌍하게 쓰일 수 있는지, 그 다양한 화용이 합쳐져 소설의 주제와 얼마나 근사한 방식으로 통하게 되는지, 그때 그때 달라지는 역어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궁리한 끝에 이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하는 길목에서는 원어를 병기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이에요.” 양쪽의 침묵이 몇 분 이어지다 루시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이 어머님이 언젠가는 생계를 마련해주시겠지요. 하지만 불쌍한 에드워드는 지금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바턴에 왔을 때 그이가 지독하게 울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롱스테이플에서 우리와 헤어지고 당신에게 가면서 얼마나 우울해하던지, 다들 어디가 크게 아프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어요.”
“그럼 삼촌 댁에 있다가 우리 집에 온 건가요?”
“아! 맞아요. 우리와 2주쯤 같이 지냈어요. 도시에서 곧장 왔다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아니요.” 엘리너는 이렇게 대꾸하면서, 새로 밝혀지는 정황이 전부 루시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동시에 이해했어요(sensible). “2주 동안 플리머스 근교에서 친구들과 지냈다고 했었어요.” 그가 친구들에 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심지어 그 이름들마저 철저히 함구해서, 내심 놀랐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지요.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22장, 김선형 옮김.

 

이성과 감성을 오가던 sensible이라는 단어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 극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다”와 “감성으로 느끼다”를 모두 품게 됩니다. 이리저리 갈라지던 이 단어의 의미들이 하나로 합쳐져 이성과 감성의 대립구도를 무화하는, 이 순간의 온전한 충격을 나중에 꼭 전체 소설 속에서 확인해 보세요.

 

*

문득 번역도 ‘sense’와 ‘sensibility’ 사이의 ‘sensible’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텍스트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느끼고(sensible), 출발어와 도착어의 환경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sensible), 언어의 강을 건너온 작품이 독자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짐작하는(sensible) 일. 그런 경험을 기꺼이 하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 제인 오스틴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었죠.

 

 

2025년 2월 5일에

김선형 드림

 

1811년 발간된 <이성과 감성>의 초판 
1811년 발간된 <이성과 감성>의 초판 
1792년 발간된 <여성의 권리 옹호>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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