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3] 나를 흔드는 문장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차재신입니다. 저희는 이번에 ‘문장’을 주제로 쓰기로 했는데요. 여러분은 문장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성경처럼 두꺼운 책에 쓰인 잠언 같은 것들이 떠오르네요. 근엄하고 진지할 것 같은 느낌…

대부분의 시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려면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는데요. 이 과정이 참 추상적이고 번거롭습니다. 그림이나 음악처럼, 보거나 듣는 즉시 직관적으로 감각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서요. 수용자가 의식하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언어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물에 언어를 씌우고 삽니다. 마치 반투명 유리를 씌운 것처럼요. 그러나 언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언어는 '반투명 유리 필터 같다'는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는 세상을 느낌(인상)으로만 살아가는 것 같네요. 여러분에게 언어는 무엇인가요? 댓글로 알려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ㅡ'

차재신

좋았던 시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기억에 남는 조건은 뭐가 있을까? 나에게는 ‘이미지’와 ‘진술’이다. 내가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는 문장을 처음 봤을 때, 고등학생 재신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시(김경주, <주저흔>)는 교과서에서 늘 봐 왔던 시들과는 달랐다. 님을 상심한 마음에 구구절절 슬퍼하지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큰 목소리로 외치지도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기술할 뿐이었다.

바람도 죽으려 한 적이 있다니, 정말 간지 그 자체다. 뜻도 모르는 한 문장 때문에 고등학생 재신이는 시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물론 쉽지 않은 길이 되었지만.

이후로 ‘붉다와 아름답다 중 무엇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지 몰랐다’나, ‘사랑은 왜 세 사람이 할 수 없을까’ 등 뇌리에 깊게 박힌 문장들은 모두 ‘진술’이었다. 진술은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한 문장만으로 시의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내 기준) 흑백요리사식으로 말하자면 시에서 ‘킥’인 셈이다.

반면 이미지는 어떨까? 이미지는 진술을 포함한 더 넓은 개념이기도 하지만,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미지는 진술처럼 직접 때려 박는다기보다,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는 느낌에 가깝다. 현상되는 사진처럼, 이미지는 시인이 보는 것을 독자에게 공유하는 매개체다. 다만 문장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100명이 본다면 100명이 각자 다른 사진을 보는 셈이다.

이미지와 진술을 통해 ‘정확히 쓰는 것’이 가능할까? 정확히 쓰려고 할수록 부정확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언어의 한계가 아닌 나의 한계다. 문장을 쓰면 비문이 먼저 나온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다시 고쳐야 한다. 비문으로 사고해서 그런 걸까? 만약 그렇다면, 모든 문장을 비문으로 쓰면 정확해질까? 고민해 볼 문제다. 

연정모

안녕하세요. 저는 무척 급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메일을 발송하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루고 미뤄서 지금 쓰는 건 아니고요, 써뒀던 글이 엉망이라 아예 새로 시작하기로 했어요.

사실 우리는 ‘비누’에 대해 쓰기로 했다가(비누와 관련된 전시를 보고 왔다는 이유로 쉽게 정했습니다) ‘이미지’에 대해 쓰기로 했다가(재신이 시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라 하더라고요) 결국 전부 엎어지고 ‘문장’에 대해 쓰게 되었어요.

이 모든 비틀거림의 이유는 저의 글태기입니다. 정말 글이 너무너무 안 써지는 요즘이라서요. 결국 눈물로 완성했던 이전 글은 ‘글이 정말 안 써집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절대 기피해야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방법이 없었지 뭐예요. 아무튼 결국 그 글은 폐기하고 이렇게 용기 있게 선언합니다. 그래도 내보낼 수 있는 글을 쓰겠다! 

아무튼 메일 발송 n시간 전에 저는 재신에게 글을 새로 쓰겠다고 선언합니다. 재신의 이번 글엔 그가 가장 좋아했던(좋아하는? 어떤 시제를 써야 할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그를 만나면 물어봐 주세요) 문장이 등장합니다. 그걸 읽으니, 아 나도 이 얘길 쓸 걸 싶더라고요. (ㅎㅎ) 

그래서 빠르게 소개하겠습니다. 연정모의 최애 문장!

사실 시를 어느때보다 많이, 오래 읽는 지금보다 암것도 모르던 유년기에 읽은 문장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어쩌면 당연하네요) 제 시 디깅의 시작은… 무려 조선일보에서 2008년에 연재했던 ⟨현대시 100선⟩ 시리즈였습니다.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인 100명에게 애송시 100편을 추천받고, 정끝별, 문태준 시인의 해설을 덧붙여 소개한 연재였는데요. 거기 실린 몇몇 시를 오려서 일기장에 붙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신문지 접힌 자국이 잘 펴지지 않아 속상했던 것, 일러스트가 조금씩 왜곡된 채 보관되었던 것이 스냅처럼 남아 있어요.

몇 달 전, 아침달에서 진행한 독서 모임에 참여했어요. 책 한 권을 읽고 모이는 통상의 독서 모임과는 달리, 주제에 맞춰 시를 한 편씩 골라오는 방식이었습니다. 돌아가면서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요. 제가 참여한 모임의 주제는 ‘낭만’이었는데요. 책장을 뒤적이거나 할 필요도 없이 제가 곧장 떠올린 시는 최승자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였어요.

이 역시 아침 신문에서 보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했던 시리즈의 후속격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시리즈로 소개됐었네요. 링크 첨부합니다) 이 시를 반복해서 읽던 기억이 뚜렷해요. 글자의 조합으로 이렇게 뜨거운 기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충격적일 지경이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실 이 문장이 실린 3연 전체를 너무너무 뜨겁게 사랑했어요. 머릿속에 활자의 모양이 그대로 그려질 정도로 읽었습니다. 열네 살이면 대단한 연애와 결별을 경험했을 나이는 아니긴 한데요. 그럼에도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더 열렬한 사랑 속에 있었습니다. 일기장을 채우고 물들이던 볼펜의 색들이 생생해요. 사랑에 있어선 치열한 탐험가이자 진지한 연구자였고 또 섬세한 세공가였던 것 같네요. 그리고 ‘사랑에 미친 아이’에게 시의 문장들은 얼마나 큰 눈물이고 위안이었는지요.

지금, 그러니까 미친 사랑 같은 건 전혀 하고 있지 않은 서른의 저에게도, 시와 사랑이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건 저 첫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스타팅 포켓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메일에서, 친구와 희곡 낭독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요. 친구가 그날의 감상을 블로그에 올렸더라고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하나의 공통된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고양감을 가져왔다고. 문장과 대사를 쏟아내면서 ‘예술의 치유 기능’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고. 

이미 존재하는 한 문장이 나를 흔들고 뒤엎고 재우고 달랠 수 있다는 게 희한합니다. 사람이란 참 연약하군요. 사람이 연약하다는 게 아주 징그럽게 느껴지다가도 또 (오늘처럼 날씨가 좋을 때면) 견딜 만하군요. 퍽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군요.

이제 글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정말로 곧 보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상대의 스타팅 문장을 알면 그 사람을 분명 귀여워하게 될 거라고요. 

편지를 줄이는 아쉬운 마음 담아, 요청드려 봅니다. 구독자님의 스타팅 문장을 들려주시겠어요? 

🚶생활기

차재신: 몸이 개박살나도록 굴러서 농구 대회 우승했습니다. 엉망인 현실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건 좋은 삶인 것 같아요.

연정모: 오늘은 생활기 대신 책 추천을. 김이듬 시인의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를 뒤늦게 읽었어요. 모든 페이지를 접고 싶을 정도로 좋았고요, 재신에게도 추천했어요. 읽더니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더라구요. 완전 '삶'적이고 완전 '나'적이라서, 라고요. 삶적이고 나적인 거 좋아한다면 읽어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