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9] 부끄러움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저는 지금 아주 충분하고 만족스런 상태입니다. 지난 편지를 통해 '새해에 읽고 싶은 시 하나씩 나누어요!' 라는 제안을 보냈는데요, 오늘 그 모임이 성사되었거든요.

실은 아무도 응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편하게(충동적으로) 적어 보낸 거였는데요. 그러길 참 잘했어요. 각자 골라온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그 시를 둘러싼 이야깃거리를 두고 맘껏 떠들었어요. 두 시간 반 넘게 수다 떨고 나서 참여자 분들을 배웅하고, 재신과 자박자박 걸으며 몇 번씩 그런 얘기를 했어요.

참 좋았다.

참 좋았어.

그치.

재단 혹은 반박당할 우려 없이 시 얘기를 할 수 있다니. 참 좋았습니다. 일 얘기 안부 묻기 의사 확인하기 외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어요. 모여 주신 모든 분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종종 이런 만남 꾸려 볼게요. :>

얼마 전 재신과 작업하다가, 갑자기 또르르 눈물 흘려서 그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어요. 울어버린 이유는… "왜 나한테는 청탁이 안 오는 거야"였습니다. 시를 쓰다 말고 갑자기 우는 저를 보고 재신이 푸하하 웃어 주어서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지나보내고 나니 [시인이기]를 시작한 이유가 다시금 정리되었어요. 청탁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요. 여기서 말하는 지루함에는 약간의 슬픔 농도 옅은 괴로움 그런 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작자로서 저는 자유로운가요? 누구에게 요청받지 않아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누구에게 요청받지 않으면 읽힐 수 없다는 점에서 부자유스럽습니다. 

읽힐 수 없다는 것이 쓰기를 가로막는 이유가 되지 않도록! [시인이기]를 시작한 지 반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차재신

종국에 언어는 감각이다. 단어에 대한 ‘정의’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기 때문에. 예를 들어 사전에 ‘성격’을 검색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나 품성’이라고 한다. ‘성질’을 검색하면 ‘사람이 지닌 마음의 본바탕’이라 한다. ‘마음’을 검색하면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이다. 그렇다. 뭐 어쩌라고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사전은 알려 주지 않는다. 지도 모르니까 자꾸 돌려 말한다. 1을 물어보면 2를, 2를 물어보면 3을, 3을 물어보면 다시 1이라고 답한다.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연결되어 있다.’ 덧붙여, ‘저 혼자 지닌 고유의 의미는 없다.’

이 같은 예시는 얼마든지 있다. 빛을 물으면 빛깔이라 답하고, 빛깔을 물으면 빛이라고 답한다. 결국 빛의 의미는 영영 알 수 없다. 그저 목덜미에 닿는 따뜻함이나, 눈을 감아도 환한 눈부심으로 빛을 느낄 뿐이다. 처음에 ‘언어는 감각’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를 쓰는 사람이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내게 ‘시 쓰기’란,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살면서 많은 단어를 써 왔지만 정확하게 아는 단어는 한 개도 없다. 시는 의미가 사라진 통로다. 첫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사라진 의미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나는 시에 매료되었다. 착각을 벗어나면 새로운 착각이 생긴다.

몰라야 신비롭다. 알면 신비롭지 않다. 흔히들 ‘예술은 재능’이라고 운운하는 것도 감각에 대한 신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예술 취급받는 것도 결국 언어가 감각의 영역에 닿아 있기 때문일까. 나는 시를 좀 아는데 모른다. 느낄 줄 아는데 못 느낀다. 수업 때 김혜순 선생님은, 시 합평을 맡은 패널들에게 “이 문장이 와닿았어요”나 “이런 부분이 느껴졌어요”와 같은 표현은 일절 쓰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감각을 박탈당하고 나니, 나는 말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의 의도는 시를 모호한 신비(감각)의 영역으로 남기지 않고, 정확히 직시하는 눈을 기르게 함이었던 것 같다. 그 혹독한 시절 덕분에 지금의 나는 무엇을 봐도 입을 털 수 있게 되었다. 자랑은 아니다. 나는 감각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보고, 최선을 다해 느끼려 할 뿐이다. 시는 감각적이면서 감각적이지 않다. 신비로우면서 신비롭지 않다. 새로운 단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착각이 갱신된다. 

연정모

연말이면 어릴 때 좋아하던 책을 다시 읽곤 한다. 매년 꼭 맞추어 하는 일은 아니어서 리추얼이라는 번듯한 이름으로 부를 순 없지만, 연말의 며칠 가족의 거처에서 따끈히 쉬다 보면 자연히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올해 고른 책은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었다. 열한두살 때쯤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보다 판형이 커지고 표지의 톤이 난색 위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근사한 띠지를 두르고 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추천’. *

* 2017년 한강 작가는 노르웨이 문학의 집 행사에서 ⟪소년이 온다⟫와 ⟪사자왕 형제의 모험⟫ 사이의 연결 지점을 언급한 바 있다. 강연 내용은 창비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장소는 제주 서쪽의 작은 해변 마을이었다. 갑작스레 제주행이 결정되고, 짐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책은 딱 한 권만 골랐다. 그것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되짚어가며 생각해 보자면, 분명한 용기와 사랑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용기와 사랑 비스무리한 무엇 말고, 결코 훼손되지 않을 분명한 용기와 사랑.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과부하를 느낀 시기였기에, 그런 데다 밝은 소식이라곤 들려오지 않는 연말이었기에 힘찬 마음을 빌려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온이 영상 14도까지 올라가는 제주의 정오 무렵, 동네를 슬슬 걷다가 아주 오랫동안 이 위치에 서 있었을 것 같은 나무를 발견했다. 그 아래에 앉아 보았다. 지붕 낮은 집 두어 채와 거기에 딸린 밭,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보였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오리의 무리를 관찰하기에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책을 읽기에 적당할 것 같았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후 읽어 보니, 아주 사소한 문장들이 기억난다는 것에 첫째로 놀랐고 (이를 테면 요나탄과 칼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사실 우리는 무척 기뻤고 그 즐거움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뭔가 웃을 핑계가 필요했습니다’라는 표현이 거기 있음을 아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환상 세계의 존재 자체가 너무도 슬프게 받아들여진다는 데 두 번째로 놀랐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정을 간략하게 설명해본다.

늠름하고 아름다운 형 요나탄과 비실비실한 동생 칼(형이 부르는 애칭으로는 스코르판)이 등장한다. 칼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아이였던 모양으로, ‘나를 빼고는 누구나 내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고 담담히 말할 정도다. 형은 그런 동생에게 아름다운 사후세계인 ‘낭기열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곳에서 너는 다리를 절지도 기침에 고통받지도 않을 거야, 말을 타고 꽃이 만발한 언덕을 달릴 거야, 죽음을 두려워 마, 먼저 그곳에 가 있으면 늦지 않게 찾아갈게, 우린 다시 만날 거야.

그러나 건강했던 형 요나탄은 화재 사고로 인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슬픔에 젖어 있던 칼에게 (형이 낭기열라의 전령이라 알려준 바 있던) 흰 비둘기가 찾아오고, 칼 역시 낭기열라로 가게 된다. 그 이후… 골짜기의 독재자에 대항하는 형제의 모험이 시작된다. 

콘크리트로 대강 보강해 올린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따라가던 나는 어느 지점에서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독재자의 이름이 막 언급되는 초반부를 지나고 있을 뿐인데도 그랬다. 이 이야기의 배경인 낭기열라가, 가련한 칼이 상상으로 이룩한 세계라고밖에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침대의자에 누워 있는 병약한 어린이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는 형이 들려준 묘사를 반복적으로 상상하며 그 속에서 죽은 형을 만나는 중이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형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영영 갇혀버렸다. 

그렇게 생각한 이상 나는 그 아이들이 시작할 싸움을 응원할 수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악과 싸우는 용기에, 위기의 순간에도 부러지지 않는 사랑에, 결국 행복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에 몰입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칼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기침을 한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한다. (혹시라도 오해 말길. 이것은 신나는 모험 이야기이며, 칼의 망상이면 어떡하지 하는 건 그저 내 어른식 독해일 뿐이다)

삶에는 촘촘하고도 잔잔한 고통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병들어 누워 있는 육신에게, 신비가 가져다줄 수 있는 효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상상력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나의 가설은 간단했다. 생존에 필요하니까! 연약한 신체를 가진 종족이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온갖 위기 상황에 미리 대응해야 하기에, 인류의 뇌는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상상하게끔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기쁨에 대한 상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비에의 동경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을 가져오는가? 자연 상태의 인간 개체에게 잠시의 위안 외에 무엇을 선물하나?

시를 쓰며 불쑥불쑥 나만 아는 얘기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이 시에 나온 레몬색 케이크는 도대체 뭐야?” 눈 밝은 동료가 짚어주면 그제야 깨닫는다. 또 나만 느끼는 소재를 갖다 썼군. "그냥 레몬색 케이크인데"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농담인 셈인데, 그렇기에 제대로 풀어낼 방법도 (아직은) 모른다. 그것은 도롱뇽일 때도 망고일 때도 호두과자일 때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내 부자유한 육신이 필요로 하는 신비이다. 생활 속의 은은한 부끄러움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나도 모르게 툭툭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내가 시를 쓰는 과정은 이와 비슷하다. 그냥 뭘 마구 씁니다. 레몬색 케이크는 그냥 툭 튀어나옵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써내고 싶습니다.

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경우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왜 레몬색 케이크여야 해? 라는 질문에 당혹하지 않으려면 이 세계관을 제대로 매만질 줄 알아야 한다. 수치심 없는 이 신비의 세계. 레몬색 케이크와 도롱뇽과 호두과자가 제 자리에 놓여 타인에게도 제대로 감상될 수 있게끔 하고 싶다. 계속 시도하고 싶다. 나의 신비가 내게 굳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다. 

책을 가방에 넣은 나는 마을을 좀 더 걸었다. 한 시간 넘게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상체에 냉기가 들어, 좀 더 세차게 걸어봤다. 다행히 햇빛이 온정적이었기에 몸은 금세 풀어졌고 아주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움이 없었다.

눈을 멀리 두면 수평선이 보였다. 슬픔이나 절망을 아주 멀리 두고 온 사람처럼 그것을 구경했다. ‘분명한 용기와 사랑’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런 다짐은 했다. 올해의 목표는 ‘부끄러움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 여기에 처음으로 적는다. 

🚶생활기

차재신: 몸이 안 좋아지면 기분도 안 좋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려면 몸도 좋아져야 해요.

연정모: ⤹ 이번 주 제가 오래 머물렀던 글과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𝙞𝙣𝙥𝙪𝙩 𝙗𝙤𝙭 ━━━━━━━━┓

🗒️ 𝑖𝑛𝑡𝑒𝑟𝑣𝑖𝑒𝑤 :: 진은영〈Buttons from the Gift Giver(단추를 선물하는 사람)〉

›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에 실린 인터뷰로, 안희연 시인이 묻고 진은영 시인이 답합니다. '구멍'에 대한 이야기가 좋아서 오래 읽었어요. 좋은 것을 많이 읽고 오래 생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 𝑝𝑙𝑎𝑡𝑙𝑖𝑠𝑡 ::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3821_official]

› 새해맞이 희망찬 플레이리스트라니 좀 뻔하지만, 전 뻔한 데서 오는 예상 가능한 감동을 사랑합니다. 사실 인트로 들으며 좀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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