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4] 문장을 미리 쓰는 취미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지난 주 본가에 다녀왔어요. 저는 꽤 아침형 인간이고, 아빠는 진짜 이른 시간에 출근합니다. 아빠에게 간소한 식사를 차려드리는 것이 집에 도착한 저의 작은 기쁨이에요. 그 아침에도 잼과 빵을 꺼내고 있었는데요, 아빠가 식탁 의자에 앉아 저의 애착인형(통통한 다람쥐 봉제 인형이고 이름은 빵밍)을 가만히 보더니 "얘는 도토리니?" 하더라구요.

"아니 다람쥐야" 하고 넘어갔는데, 그날 종일 아빠의 앉은 자세와 표정과 말투가 계속 생각났어요. 어두운 아침, 식탁 위 작은 조명 아래서 도토리 인형과 눈을 맞추고 있는 아빠. 참 귀여워서요.

그런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구나 나는.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제일 가깝고 제일 사랑하는 몇 명의 표정과 말투 그들의 습관,  무한정 복기하고 싶어하는구나.

그 생각을 할 때 저는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으며, 버스 앞 유리를 통해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앞선 차량의 불빛이 작게 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작은 고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어딘가에 적게 되리란 걸 알았어요.

그런 기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화요일, 바람이 세게 불고요 내일은 눈 예보가 있습니다. 첫눈이라니 몹시 기대 중인데요. 과연 눈이 왔을지, 왔다면 어떤 모양일지 이 메일을 읽는 구독자님은 알고 계시겠죠. 

그것을 알려주세요. 어떤 눈이 왔는지. 눈 오는 날이 어떤 일기로 남았는지.

구독자님의 문장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매우 기쁠 거예요.

차재신

전에는 남을 울리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좋은 시를 읽으면 소름이 돋는 것처럼, 남이 내 시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길 바랐다. 시간이 흐르고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독자 한 명이 시를 읽으며 울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말 뿌듯하고 감사했다.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보람 같은 것을 느낀 순간이다.

이제는 내가 울 수 있는 문장을 쓰고 싶다. 나는 내 시가 만족스럽지 않다. 한 편을 다 쓰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쓴 시는 나 혼자만 알아먹는 개소리가 되고, 각 잡고 통제해서 쓴 시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시 쓰기'를 외줄 타기에 비유한다.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끝나고 마는, 그러면서 계속 도약하는 글쓰기.

"근데 왜 쓰세요?"

초등학생 땐 일기 쓰기 싫어서 일기 대신 썼다. 중학생 땐 짧게 끝낼 수 있는 숙제라서 썼다. 고등학생 땐 대학 가려고 썼다. 대학생 땐 전공이라서 썼다. 졸업 후엔? 일하긴 싫고, 뭐라도 하는 척하려고 썼다. 나는 한평생 핑계로만 시를 써먹은 셈이다. 어쩌다 보니 결국 시집도 나오고 일도 하게 됐지만.

*

소설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직접 쓰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향한 시선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장르 같다. 세계를 '관계의 집합'이라고 정의했을 때, 소설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만 시는 '내가 곧 세계'라서 그런 걸까. 시는 남한테 관심이 없어도 된다. 타인을 경유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이번 시는 '문장'이라는 주제에 어울릴 듯해 데려와 봤다. 나는 '못' 하면, 벽이나 바닥 같은 데 잘못 튀어나온 못이 떠오른다. 잘못하면 누군가 밟거나 부딪혀 다칠 수도 있는, 그런 아슬아슬한 이미지. 이미지를 가지고 문장을 쓰면 그게 시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될 것이다.

연정모

1. 문장과 기억

난 무진장 기억력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을 쉽게 놀래킬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은밀한 자랑, 교활한 무기. 

수 년 전의 식사 자리 우리가 어떤 길을 헤매다 가게에 도착했는지, 누가 어떤 옷을 입었으며  누가 어떤 핑계로 지각했는지 그대로 읊을 수 있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 누구는 즐거워하고 누구는 멈칫한다. 

그러나 고백한다. 기억을 담당하는 내 뇌의 어느 부분이 남들에 비해 대단히 발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기억이 아닐지도 모른다. 순간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담은 문장을 기억하는 것뿐일지도.

사실 내 기억력의 비밀은… 길고 불필요한 문장으로 채워진 일기를 쓰는 것이다. 혹은 그 일기를 반복하여 읽기 때문일까요. 그러니까 실제 발생한 상황을 기억한다기보단 내가 일기에 적은 어느 한 문장, 사진에 남은 사물과 사람의 모양 그런 걸 버리지 않는 것에 가깝다. 

사진을 본격적인 취미로 가진 이가 내 애인이었던 적 있다. 난 그가 카메라를 든 순간을 좋아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준 적 있다. 구체적인 지명과 도로명이 가득 등장하는 소설의 한 페이지를 찍어 올렸을 때였다. 정모는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쓴댔지! 내가 사진을 찍는 것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가 나와 닮아 있다 생각하게 되는 사랑의 생리에 대해서 당신과 또 긴 얘기를 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진과 글이 질적으로 다른 점 있다면 글에는 쓰는 사람의 호의와 악의가 얼마든지 담길 수 있다는 거겠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쓰는 사람의 호의와 악의를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것. 

오래도록 굳게 믿은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난, 우리 엄마는 무뚝뚝한 편이라 어릴 때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사랑한다 말해주거나 ‘아기가 귀여워서 못 살겠다는 표정'을 지은 적 없다고 믿어왔다. 그것에 대해 많은 문장을 써왔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엄마가 음식을 냠냠 먹는 나를 ‘귀여워서 못 살겠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을 때, 난 어떤 결핍과 욕망을 재구성해 먹어치우고 있었는지 생경해지는 것이다.

2. 문장과 예언

나에게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장을 미리 쓰는 취미가 있었다. 오늘 밤이나 십이월 첫날, 혹은 여행의 마지막 날 일기를 지금 쓰는 것. 상상도 바람도 아니다. 그 기분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는 이상한 확신. 내지는 그 기분에 도달하고 말겠다 하는 결심.

이런 식이다. 한 남자를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파주에 갔으나 그대로 돌아왔다’는 일기를 쓰는 것. 휴가가 시작되는 날 ‘휴가 동안 시는 한 편도 못 썼다’고 적겠다 작정하는 것.

그것이 내게 어떤 희열을 줬나? 

전혀 아니지.

단지 어떤 상태에 진입하기 전까지 충분히 준비하고 싶을 뿐이다. 

얼마 전, 정서 검사 결과지를 받아보았다. 방어 척도, 그중 ‘과장적 자기제시’가 유독 높게 나왔다. 욕구나 부정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미리 쓰곤 했던 문장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어쩌면 정서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활성화된 방어막일지? 대비란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면서도.

문장을 쓰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나는 그저 기록할 뿐이다. 한 마디 안에서 나는 그 일의 화자이자 작가이자 독자가 된다. 글쓰기가 나약한 개인에게 유효한 이유는 그 행위로써 (드러나지 않기에) 은근하고 (내가 주인이기에) 강렬한 통제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근데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정말 내가 쓴 문장들처럼 되어버리는 일이 대부분이라니까요. 

3. 문장과 선언

11월 16일 토요일 오전에 쓴 일기의 일부다. 

주기적으로 비슷한 문장을 쓴다. 연필이나 노트를 새로 샀다거나, 긴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거나 과일을 먹었다거나 하는. 

글쓰기가 나약한 개인에게 유효한 이유는 그 행위로써 (드러나지 않기에) 은근하고 (내가 주인이기에) 강렬한 통제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춰서서 소리지르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지고 있다. 괜찮아졌다. 시제를 바꾸어가며 쓰다 보면 내가 정말로 이곳을 벗어나 흐르는 것만 같다. 때로는 정말 흐른다. 괜찮아진다. 괜찮아진 척이라도 한다.

그리고 난 오늘 일기에 이런 말을 쓸 작정이다. 다다음 토요일엔 동해에 갈 것이다. 일박에 삼만 원 하는 소박한 숙소에서 가볍게 자고 일어나 말끔한 정신으로 아침의 해변을 걸을 것이다. 겹겹이 챙겨 입은 외투 아래로 몸이 데워지면 느슨히 웃기도 할 것이다. 쓸쓸한 기분을 필요로 했다는 걸 또다시 깨달으며 찻집의 창가에서 오래 가만히 고요할 것이다. 챙겨온 책은 읽지 않고 대신 거기서 몇 권의 책을 더 발견해 데려올 것이다. 

실제 그렇게 될지 아닐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그 문장을 썼다는 자체다.

11월 21일 현재 새 책상이 집에 도착해 있고, 난 그 책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게 된다.

∴

일기는 내게 기능한다.

일기를 써야 시간이 똑바른 속도로 흐르고 가둬진다. 

비록… 위의 글을 전부 읽은 당신이… 일기란 어디에도 선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냈을지라도…

🚶생활기

차재신: 이등병처럼 삽니다.

연정모: 새 일기장을 골랐고, 선물로 받았습니다. 일기가 이곳저곳에 흩어지는 게 싫어서 2년 전부터는 블로그에만 적고 있었는데요. 왜인지 내년부터는 손 일기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 거기에 어떤 것을 쓰게 될지 기대돼요. 연말은 이래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