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20]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게 되길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연휴 잘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일찌감치 본가에 내려와 느긋하게 쉬고 있습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릴 예정이라 했는데 제가 있는 지역엔 전혀 쌓이지 않았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였는데 흰 기운 전혀 없어서 살짝 실망하기도 했고요.

눈치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이기]의 원고에는 나름의 규칙성이 있습니다. 14일에 발송되는 글은 그 달의 시를 쓰기 위해 '읽은 것'에 대해 쓰고, 28일에 발송되는 글은 그 달의 시를 '쓰는 일'에 대해 쓰는 식입니다. (상당히 느긋한 규칙이기는 하지만요)

즉 그 달의 시를 완성 못한 상태라면 덩달아 원고도 쓰지 못하는 셈이에요. 그리고 오늘 재신이 그 슬픈 무한고리에 갇혀 있어요…😇 남 일 같지 않아 마음이 괴롭군요. 그러나 어찌어찌 이번 호 글부터 써내는 데 완성했습니다. 열심히 탄생하는 중인 그의 시를 응원해 주세요.

차재신

한 세계를 확실하게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시집 한 권의 역할은 다 한 것이라고 본다. 희미한 세계든, 강렬한 세계든 간에. 세계가 확실하면 독자의 취향을 떠나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역시나 이어지는 질문. 나는 어떤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는가? 요즘 내 화두다. 어렵다. 최근에 명 박사님을 만난 후로 다음 시집의 방향성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

나는 구조적인 사람이 아니다.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들은 구조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어떤 것에 대한) 구조적 사고는, 그것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 같다. 언어를 처음 익힐 때처럼. 처음에 단어 하나하나를 배워 나가다 나중에는 문장을 통해 맥락을 이해하듯이.

구조는 체계를 내포한다. 체계는 효율을 의미한다. 나는 시집을 빨리 읽는다. 문장의 맥락을 빨리 파악한다. 언뜻 보면 효율적인 독서다. 그러나 이는 사실 편독과 오독이 심해졌다는 뜻이다. 점점 더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점점 더 시를 딱딱하게 대한다. 몹시 안 좋은 태도다.

독자는 한 편의 시로도 시의 세계에 빠질 수 있지만, 쓰는 사람은 ‘빠질 수 있는 세계’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시를 쓰는 독자’로만 산 셈이다. 이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한다. 요즘 시 쓰기가 어려워진 이유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말,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시를, 나의 얕은 지식만큼만 본다. 그래서 시가 어렵다.

탈구조주의니 해체를 하니 마니 어쩌고는 중요하지 않다. 구조를 벗어나거나 해체하려면 결국 더 큰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시를 파악하고 있는가? 그동안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둘러싼 신비를 걷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신비조차 걷어 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걷어 냈다고 생각한 자리에 신비는 그대로 있다.

원래 시를 쓰는 과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근데 프로라면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결과물을 쓰자.

연정모

다들 시집을 어떻게 내는 걸까?

일 년 가까이 내가 매진하고 있는 목표는 ‘시 마흔 편 모으기’다. 시집 한 권을 묶을 수 있는 최소치라고 통용되는 편수다. 사실 어느 시점부터는 완성작 폴더에 모인 파일 개수가 계속 똑같았는데, 하나를 써내면 이전에 썼던 하나가 형편없이 느껴져 폐기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 결국 마흔 편이 다 모였다. 무척 기뻤고, 얼른 이걸 투고하든 뭘 하든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밤 늦은 시간까지 머릴 싸매며 순서를 정하고 네 개의 파트로 나누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 원고 모음은 다시 수정 모드로 들어가게 되었다. 편수도 다시 서른네 편으로 줄었다. 순서와 묶음에 대한 의견이 궁금해서 재신에게 원고를 보여 주었는데, 꽤 오랜 시간 고심해서 읽던 그가 “생각이 많아지네…”라고 말한 것이 이유였다.

첫 시집인 만큼, 하나의 시집이 동일한 목소리로 묶일 수 있으면 한다는 거였다. 1부와 3부에서는 이 시집에서 어떤 정서를 다룰지 잘 보여준 것 같은데, 2부의 시들은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다, 4부의 시들은 편편으로는 좋지만 왜 함께 묶인 건지 잘 모르겠다… 등등.

이렇게 말하니 그가 너무 비정해 보이지만, 너무나 감사하고 충분한 조언이었다. 스스로도 알면서 어물쩍 넘기려 했던 걸 잘 안다. 물론 여기 쏟은 시간과 애정이 있으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사실 두 마디 정도 덧붙였다)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잠시 시무룩했다가(카톡 프사에 우는 오리 사진을 잠시 올렸다) ‘아유 그래도 해야지’ 표정 한 번 짓고서 다시 원고 정리 중이다. 

얼마전, 철학 책을 집필 중인 지인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정리하고 있는 책의 목차와 논리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크게 매혹을 느끼진 않는데, 그런 취향과는 별개로 그날의 대화가 참 많이 기억에 남는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가 ‘근데 정모는 철학이 왜 재밌는지 모르겠대요’라고 일러바쳤는데 마침 나는 철학 얘기를 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신나 보인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누구에게 무엇은 정말 의미 있는 것일 수 있겠구나. 내가 그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지만, 전하고 싶어 하는 바가 얼마나 선명한지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인이기] 16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사일런트 스카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인 헨리에타 레빗이 수년간 연구해 온 ‘세페이드 변광성’의 박동 패턴을 파악해내는 장면이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

1막의 마지막 대사를 들으며 나는 대단한 감동을 느꼈다. 집을 떠나와 모르는 도시에서,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관측과 연구 변두리에서, 묵묵히 별들을 분석하고 수만 번 계산하고 절망하고… 그 지루하고 고된 일을 감내할 수 있던 이유가 오로지 이 심플한 하나의 목표 때문이라는 것.

신비에 쌓여 있는 세계 속,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고자 한다는 것. 

서양철학사를 당신의 새로운 기준으로 다시 설명하고 싶다고 말하는 열렬함을 보며 나는 비슷한 감동을 또다시 느꼈다. 방식과 도구는 다르지만 소망의 모양은 다르지 않았다. 진리 탐구라는 거대한 말을 빌려오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저 원한다.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게 되길.

이것은 곧 나에게 묻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너는 무엇을 알고자 하니? (무엇을 알고자 한 적은 없었다)

굳이굳이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이니? (즐거우니까)

이 세상에 너의 시집이 한 권 더 추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니? (이것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려웠네)

물론 내가 시를 가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우주 원리에 대해선 조금도 알아낼 순 없겠지만, 세계를 규명하고 싶다는 바람도 진실을 포착하고 싶다는 소명도 없지만, 언젠가 시집으로써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지적 사고 활동의 목적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기'일 거라 가정해 본다면 외려 간단해지는 것 같다. 어떤 기준으로 시집을 모으면 좋을지, 어떤 것은 혼자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어떤 것은 오래 남겨도 좋을지 알게 될 것 같다. 

거창하게 써 버리긴 했는데 사실 '열심히 시 모아야지' 하는 글이다. 내가 주로 몰두하는 몇 개의 정서와 감각에 집중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작업해 보려 한다. 오늘 21호 메일로 함께 보내는 시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은 지난 달 18호로 보낸 것과 제목이 같다. 의도를 가지고 연작을 쓰겠다 마음먹은 건 아니었지만 하나의 시를 끝내고도 다른 할 말이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네. 그것이 즐겁다.

🚶생활기

차재신: 시인이 되는 것보다 시인임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연정모: 일주일 전쯤이었나, 시가 엄청나게 잘 써지는 날이 있었어요. 쓰던 시가 후루룩 쉽게 마무리되기에 몇 달 전 묵혀 놓았던 시들도 꺼내와 고쳤는데 너무나 만족스럽게 완성된 것 아니겠어요? 몇 달에 한 번 찾아올까말까 한 대단한 컨디션… 곧 돌아와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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