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저는 남는 시간에 틈틈이 오리 영상을 봅니다. 특히 아기 오리 영상요. 처음에는 실내를 파다다닥 뛰어다니는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았는데 요즘엔 취향이 바뀌었어요. 호수의 오리 가족 영상을 찾아 봅니다. 작고 보송보송한 아기 오리 여러 마리가 엄마를 따라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장면을, 아기들이 용감하게 호수로 뛰어드는 장면을, 엄마 오리의 날개 안쪽에 아기 오리가 안전히 실려 운반되는 장면을 봅니다.
완전히 평화로워지는 영상입니다. 보고 있으면 숨이 좀 트여요. 알고리즘이 오리로 도배된 지 일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오리 영상을 재생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는 약한 존재가 사랑받고 보호받는 것을 보고 싶어하나?
지난 주에는 친구의 아기를 만나러 다른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120일 된 아기 사람을 보았어요. 아기는 작고 매끈하고 따뜻하고 보드랍습니다. 좋은 냄새가 나고요. 아기를 둘러싼 모두가 아기를 보호합니다. 조심히 안아들고, 울면 달래줍니다. 그것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아아)
나 역시 목을 가누지 못하고 인간의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던 날이 있었을 거고,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 나를 보살폈단 의미겠지요. 당연히도요.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받고 싶어하는 나약한 상태구나, 하는 걸 깨달았답니다. 하하.
주제가 친구인데 친구 얘기는 안 했네요. 그치만 하고 싶은 얘기였으니 봐 주세요. 대신 김승일 시인이 쓴 멋진 칼럼을 공유드립니다. (링크) 서간체로 시를 쓰는 이야기와 함께, 제가 너무나 좋아하던 〈나의 자랑 이랑〉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공강 시간에 국제관에서 읽다 울었어요)
차재신
요즘 현장을 다닐 때 회사 차를 타고 출퇴근한다(운전은 우리 농구팀 감독인 오 감독이 한다. 나는 알바고 오 감독은 직원임). 보통 나는 조수석에 앉아 오 감독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창밖을 보곤 하는데, 늘 거대한 대교를 타고 한강을 지날 때마다 수많은 차량이 줄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다 보니 다리를 다 건널 때쯤 ‘슬슬 거의 다 왔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별로 특별한 감상은 아니지만, 하루이틀 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가는 길에 보니 강물 위로 빗줄기가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수히 퍼지는 동심원들, 거칠게 일렁이는 물결. 그 장면을 보고 ‘창밖으로 천사들이 내리고 있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사실 별 대단한 영감은 아니고, 도저히 ‘친구’라는 소재로 시를 쓰기가 어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정모가 먼저 시를 끝냈고, 그 시에 천사가 나와서 ‘나도 천사나 넣어 봐야겠다’ 싶어 커닝한 거다.
어쨌든 ‘창밖으로 천사들이 내리고 있었다’는 첫 문장으로 두기 근사했고, 그 뒤로 시를 쭉 이어 갔다. 그리고 곤경에 빠졌다.
내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할 수 있는 말도,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어쨌든 마감은 임박했고 시는 끝내야 하니 필살기를 꺼냈다. 바로 노트를 뒤적여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차출한 뒤 시에 끼워 넣는 것. 그렇게 겨우겨우 누더기 시를 완성한 나는 정모에게 시를 내밀어 보였다. 어때?
정확하게 ‘억지로 끼워 넣은 문장들’만 지적받았다. 그래서 다 지웠다. 역시 시는 예민한 장르다. 아마추어 같은 심보는 바로 들통나기 마련이다. 현재 시각 11시 16분. 마감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저번 인사말에 나는 반성만 하고 반영을 안 한다고 반성해 놓고선, 또 내 삶에 반영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매번 응급조치로만 시를 완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인 자격증> 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진작에 자격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연정모
화가 많아진다는 건 좀 서글프다. 나를 보호해 줄 것이 무엇도 남지 않았음을, 내가 여기에 알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현명한 친구 다솜이 이런 얘길 해준 적 있다.
누굴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본인 생각보다 강한 사람 아닐까. 약한 존재는 약한 존재조차 가여워하지 못하는 걸 너무 많이 봄.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어릴 땐 세상이 다 가여웠는데 스스로 약자에 가깝다고 느낀 이후로부터 화가 많아졌어.
까다롭게 굴지 않으려면 넉넉한 체력이 필요하다.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자고 깨끗한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많이 보아야 한다. 도시의 추한 모습을 좀 덜 보아야 한다. 지하철에서 다른 이를 밀치는 사람,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 걸으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행운이 따라야 한다.
고등학교 때는 교실에 앉은 모두가 정서적 고갈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화낼 준비 된 애들이 한데 모여 살았다.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그랬다. 교실에서 도망치면 기숙사였고, 기숙사 뒤는 호수와 도로였다.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몇 남지 않은 친구들과 만나 그런 얘길 하고 돌아오는 길엔 그때 우리가 정말 미치지 않았던 게 맞나? 의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내가 유일하게 아직까지 미워하는 한 명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울고불고 화내던 나다. 삶이 끝나기를 바란 적은 없지만 하루가 끝나면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온다는 것이 이상하고 괴로웠다. 이 감정의 동요가 수천 수만 번 반복되겠지 지겨워. 한 학교에서 세 명 이상 죽으면 폐교 한다고?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그런 말들을 믿으며 내가 먼저 죽으면 누가 그 다음 순교자가 될래, 농담인 척 떠들곤 했다.
한 번 미쳤던 사람은 계속 미치게 된다.
요 몇 달 동안은 계속 내가 열여덟 살의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생활의 누추함을 견딜 수 없어졌다. 자꾸 화가 난다, 지하철에서 누구를 밀치는 사람,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 걸으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볼 때 견딜 수 없이 화가 난다.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고, 거슬리는 표정과 말투가 흘러 넘친다 이 비좁고 가난한 땅 위로.
그러나 좋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선량한 것을 보고 부드러운 것에 대해 쓰고 싶다.
36호의 시는 제목을 먼저 정했다. 원래 ‘무척 착한 절임 복숭아’였는데… 다 쓰고 보니 (절임 복숭아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 제목을 붙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시가 되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학생들과 날개 잃은 천사가 등장한다. 자꾸 버림받은 기분이 들 때 비밀 친구는 꽤 큰 도움이 된다. 별 이유도 없이 나를 좋아해주고 졸졸 쫓아다니는 천사나 유령 기타 등등의 애들.
걜 충분히 가여워해주고 싶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자주 하게 되어 있다.
부드러운 것들을 나누어 먹고 싶다.
어제는 잠들기 위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는데 떠올리는 모든 사물과 얼굴이 끔찍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눈이 튀어나올 듯 부풀어 있고 혀를 길게 빼며 웃는 얼굴. 무엇을 생각해도 전부 같은 이미지로 바뀌어 버리기에 두렵고 괴로워 끙끙 앓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도 안 하면 되지 않아? 라는 말은 마시라. 끔찍한 이미지를 얼른 갈아치우기 위해 다른 무엇을 바로바로 떠올려야 했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슬라이드 프로젝터처럼…) 수많은 사물 중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것을 겨우 찾았다. 과일을 담은 요거트 보울.
그것만은 사악한 눈과 혀를 갖지 않고, 온전히 요거트 보울인 상태로만 존재했다. 덕분에 잠들 수 있었다.
아주 순진하고 아주 단정한 것을 삶에 가득 채우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덧붙임)
이번 시의 제목은 '보육원'이다. '무척 착한 절임 복숭아'에서 '보육원'이 되다니 상당한 변화다. 제목은 재신의 공인데, 감사하게도 복숭아 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내 줬다. 덕분에 내가 말하고 싶지만 굳이굳이 설명해야 했던 몇 개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담길 수 있었다. 감사.
덧붙임2)
오늘의 메일은 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썼다.
🚶생활기
차재신: 열심히 살겠습니다.
연정모: 36호의 시는 월초에 빠르게 완성했어요. 그리고 다른 시를 한 편 더 써 보려 부단히 애쓰는 유월 보냈습니다. 써서 전달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특정 주제를 떠올리며 시를 쓰는 건 많은 망설임을 수반하는 일인 듯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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