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05] 나만이 할 수 있는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가을로 가는 쪽으로요. 저는 주변 모두가 아는 여름 좋아 인간인데도 이번 계절 가는 것은 그렇게 아쉽지 않네요. 너무도 뜨거웠지요. 종종 괴로웠어요.

지난 일요일, 친구와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여름이 가기 전 바다 수영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요. 물안경까지 챙겨가서 제대로 수영을 했습니다. 물놀이를 마친 후엔 사우나에 가서 뽀독뽀독 씻고 뜨거운 탕 안에 몸을 담그기도 했어요. 

두어 밤쯤 지난 지금, 저의 피부는 무서울 정도로 붉은색입니다. 파라솔을 빌리고서도 굳이 해가 쨍쨍한 곳에 앉아 있던 탓입니다. 옷에 스치는 모든 부분이 쓰라립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어요.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삶에 상흔을 남깁니다. 새벽에 피부가 아파서 깨어, 차가운 젤 로션을 바르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든 칭얼거리고 싶어졌는데.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라 믿고 다시 잤습니다.

구독자님, 상처가 깨끗이 아무는 가을 되시기를요.

* 아, 이번 메일 이야기를 안 했네요. 재신은 다음 시집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시집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해나가고 있어요. 시를 오십 편 모아야 한다고 할 때는 막막했는데, 시집이라는 하나의 구성물을 완성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더라고요. [시인이기]는 한동안 '시집 완성'이라는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을까 해요. 일종의 시집 다마고치…˙ᴗ˙

이번에 재신은 게임 이야기를 하고, 게임 시를 썼어요. 저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울곤 하는 얘기를 썼습니다. 어쩌면, 하고 싶은 얘기를 나만 할 수 있는 얘기로 만들기 위해 시를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재신

옛날에 친구들과 함께 게임(리그 오브 레전드)을 할 때, 그들이 “나 곧 있으면 ~ 아이템이 나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참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ex: “나 곧 있으면 ‘여신의 눈물’ 나와!”, “나 곧 ‘무한의 대검’ 나와!”..) 본인이 직접 상점에 가서 아이템을 ‘사는’ 행위를, 아이템이 '나온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본인에게 강림할 것이라고 계시하는 것처럼 들린다. 선지자의 발화처럼. 어느 순간부터 나도 시 쓸 때 그런 표현을 쓰게 된다.

'나 곧 있으면 시 한 편 나와!'

요즘 바쁜 일상을 보내며 들었던 생각은 시집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시도 잘 나오기 어렵다는 것. 고전적인 표현대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쓴다면 어찌어찌 시 한 편 나올 수 있겠지만 연속성이 없어 그 흐름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렇게 파편처럼 나온 시를 보고 '나에겐 이런 모습도 있어!' 하며 땡깡 부리듯 나(시)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놓고 기다리는 건 아마추어 같다. 이제 내가 먼저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시집에 대한 구상을 좀 해 봤다.

다음 시집의 테마는 게임이다. 아직 어떻게 구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하나의 서사를 지닌 게임북의 형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 삶은 게임과 함께였다. 초등학생 땐 유선 전화 결제로 20만 원 질러서 크게 혼나고, 중학생 땐 대회 준비한답시고 모의고사 망치고, 고등학생 땐 게임하느라 과외 숙제를 하도 안 해서 선생님이 수업을 그만둘 뻔했다. 대학 때는 롤 때문에 학사 경고 받았다. 그래서 휴학하고 군대 다녀왔더니 오버워치가 나왔다.

결국 서른이 넘어서야 게임으로 먹고살기 위해 게임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게임으로 써야 한다. 시는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시와 게임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내가 그렸던 '시인'의 이미지에 게임 따위가 끼어들 구석은 없었다. 나에게 게임은, '한심한 찐따들이나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맞다. 자기혐오다. 근데 '한심한 찐따들이나 하는 것'은 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찐따들이 하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다. 이제는 나 같은 찐따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연정모

지난 휴일, 가족들과 당일치기로 바다에 다녀왔다. 언덕을 넘어 미술관에 가고, 잠시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도 쳤다. 파도가 꽤 거셌던 탓에 아빠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동생과 엄마는 물에 몸을 담그지 않고 아빠와 내가 허우적대는 모습을 구경했다.

실컷 놀고 피로해진 몸으로 차의 뒷자리에 실려왔다. 창밖에는 크고 굉장한 구름들이 (말 그대로) 발광하고 있었고, 하늘은 주황색이었다가 보라색과 남색을 오래 거친 후 한순간 어두워졌다. 이어폰을 끼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캄캄한 도로를 운전하는 아빠 뒷모습을 본다.

작년에도 딱 이 시기에 가족 여행을 갔었다. 부산이었고, 2박3일짜리 본격 휴가였다. 수영장에서 맘껏 헤엄치고 커피와 맥주를 많이 마셨다. 가족들은 고향 도시로, 그러나 나는 서울 자취방으로 곧바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날, 다들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들어갈 때 나만 기차 시간 때문에 먼저 이동했다. 기차에 안전히 탑승하긴 했는데 출발 시점부터 뚝뚝 울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온 장면. 대학 시절 방학을 마치고 고속버스에 타서 흔들리는 커튼을 볼 때, 입학식 전날 하숙집에 짐을 내려주고 떠나는 엄마아빠동생에게 인사할 때, 멋 없는 동기부여 영상을 틀어주던 고등학교 기숙사 입소식 때.

그들에게 뚝 떨어져 혼자가 될 때면 언제나 참지도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고 그 울음은 지금까지 반복된다. 떠올리면 꼼짝없이 또 울게 된다. (심지어 이거 쓰면서 또 찔찔 울었는데 내 앞에 있는 재신이 “미쳤나 봐” 해서 울다 웃고 있다)

올해 초에 쓴 시가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게시글에서 시작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기장을 발견했다는 글로, 일기장에는 손녀 딸이 걸음마를 떼던 날, 생일 파티하던 날,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뽀뽀해준 날 등등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사랑스러운 언어로 포착되어 있다. 그중 내가 쓰고 싶었던 장면은 여기서 시작한다. “What will we do next?” 

우리 다음엔 뭘 할까? 아기에게 건네는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그걸 보면서도 또 울었던 것 같다. (쓰다 보니 정말 울보…) 

작년,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엉엉 울어제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날 아침엔 잠이 덜 깬 채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마셨다. 우유 거품이 퐁실퐁실 올라간 카푸치노. 테이블은 낮고 커피는 넘칠듯해서 몸을 굽힌 채 커피를 불어 마시고 있었는데, 고개를 드니 아빠가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 모습. 애기나 강아지나 그런 귀여운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슬픔이 침투할 틈이 조금도 없는, 밝디 밝은 스케치인데 왜 두 시간 반 내내 흑흑흑 울었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 몸의 부피를 훌쩍 넘는, 날 압도하는 다정과 사랑 앞에서 반사적으로 울게 되는지도. 사랑에 대해 쓰기란 정말 어렵다. 이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이성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상상에서 시작하는 시는 쓸 수가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엄마아빠가 죽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덜컥 울고 맙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려고 누우면 그 공포가 생생한 형태로 살아났어요. 

그 공포를 가져오고야 마는 거대한 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태어나 보니 주변의 모두가 나를 못 견디게 사랑하고 있을 때에. 잘 아는 존재에게 그러는 것처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을 때에.

그래서 썼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로만 구성된 세계에 어느 날 문득 태어난 아기 이야기. 내가 꽤 아끼는 시인데, 다음 달 지면을 통해 소개할 기회가 생겼다. 9월 메일에서는 아마 일부를 소개할 수 있을 거다. (기다려 주실 거죠)

시를 읽은 엄마의 반응으로 이 글을 마무리. 역시 사랑 이야기는 어려워. 완결성 있게 결론 내는 법 도통 모르겠다. 

🚶생활기

차재신: 두 달 전부터 7시에 기상해서 헬스장 다녀오고 수업을 들은 뒤 과제(실습)하는 루틴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보고 성실하다, 부지런하다고 말해 주곤 하는데, 이상하게 저는 그런 평가를 받는 게 약간 고깝더라고요. 저도 문제가 있긴 하나 봅니다. 왜 그런 걸까요?(진짜 모름)

연정모: 8월은 적게 읽고 적게 쓴 달이었어요. 새 책들이 침대 옆과 책상 위에 쌓여 있습니다. 저는 많이 보고 느끼고 걷고, 아무튼 좋은 것에 많이 노출되어야 쓸 수 있게 되는데요. 날씨가 문제인지 체력이 문제인지 이번 달은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복숭아를 많이 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