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44] 이미지가 부르는 대로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주말이 끝나갑니다. 이번 주말은 꽉 채워 보냈어요. 

어제는 성수동에 위치한 캔들라이트웍스에서 작은 클래스를 진행했습니다. '일상의 창작자를 위한 내 안의 모티브 찾기'라는 주제로요. 나의 작업에서 반복 사용되는 단어와 이미지를 찾으며, 앞으로 내 창작의 토대가 될 '모티브 문장'을 지어 보는 자리였습니다. 책과 관련되지 않은 모임을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도 됐는데, 무척 단란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른 창작자들의 단서를 들여다 보는 일은 상당히 고무적인 경험이더군요. 다들 고유한 멋짐을 가지고 계셔서 감탄했어요.

흩어져 있는 단상과 이미지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모으는 것이 클래스의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저는 고민을 정리하기보다 그것을 더 여러 방향으로 흩뿌리고 들여다 보고 온 것 같네요. 아마 지금의 제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나 봐요. 

이것이 제가 마지막 장에 적은 내용입니다. 물렁물렁 시를 타고 세계를 건너는 저예요. (ㅋㅋ)

그리고 일요일인 오늘은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몇 년 동안 연락을 나누지 못했던 친구들도 많이 만났는데요. 말투며 표정이며 어쩜 이렇게 똑같죠? 사실 우리 동기들은 똘똘 뭉쳐다니거나 수업을 맞춰 듣거나 하는 공동체 타입은 아니었는데도,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한껏 충만해진 상태였습니다. 완전한 반말로 지내던 친구들 만나는 것 얼마나 귀중한지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그런 다음 너무나 익숙했던 친구들을 만나고. 관계의 서로 다른 양상 속에 있는 것이 즐거웠던 주말이었습니다. 피로보다 앞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차재신

불효자

백은선 시인의 책(책 제목은 ⟪뾰⟫다)을 읽다가 문득 ‘인공 파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마 책 속에 바다가 많이 등장하고 돌고래가 나오는 멋진 시(시 제목도 ⟨뾰⟩다)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인공 파도’는 시 제목으로 아주 멋있는 것 같아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마음에 안 들어서 결국 다 지웠다(아주 자주 있는 일이다). 지우고 나서 다시 쓴 첫 문장은 ‘바다가 죽었다.’

‘바다가 죽었다’고 쓰고 나니 그 뒤로 폐허나 버려진 유적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원래 내가 쓰려던 ⟨인공 파도⟩는 이게 아닌데. 아주 힙하고 간지 나는 시인데. 인간 내면의 텅 빈 구석을 황폐하고도 아름다운 은유로 밝히는, 미래-기술-시대의 아이러니를 첨예한 문장으로 비판하는 시였는데. 시는 내가 원하던 방향과는 자꾸 다르게 흘러갔다. (실없이 써제낀 것을 보고 나니 원래의 인공 파도는 지우는 게 맞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미지가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시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시를 쓰다 보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경우는 잘 없다. 시는 억지로 통제하려 하면 말을 잘 안 듣는다. 꼭 청개구리처럼. 그 이유는 아무래도 언어가 언어 자체로만 있다기보다 어떤 물성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 언어를 두르는 이미지, 언어에 결부된 감정 같은 것들이 움직이려 해서.

예전에 어떤 선생님은 시를 쓸 때 이미지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의미나 뜻 같은 것은 어차피 평론가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시를 쓰는 것’에만 집중하라고(ㅎㅎ,,죄송합니다). 그때야 적당한 농담으로 웃어넘겼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니 그 말이 내게 인상 깊었나 보다. 실제로 시가 잘 풀리는 경우는 이미지가 잘 떠오를 때기도 하고. 반대로 이미지가 안 떠오르면 시도 잘 안 풀리게 된다.

그렇게 이번 시에서 인공 파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그러나 단어가 아까워서 계속 품고 있으려고 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지. 청개구리도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제대로 들은 것처럼, 시도 내 말을 한 번쯤은 들어주는 날이 오겠지.

연정모

거기에 두고 온 것

“월급의 절반은 저축하시오.” 그렇군. 그렇게 하면 일억을 모으고 일억을 모으고 나면 돈 모으는 속도가 빨라지므로 이억을 만드는 건 순식간인 거군. 아주 정직하고 효과 좋은 재테크 조언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나의 <자산가 되기>를 막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가령 여행이라거나.

스스로를 창작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면 좋은 점이 둘 있는데, 하나는 괴이하거나 불쾌한 경험을 하더라도 ‘음 나중에 어딘가에 써 먹을 수 있겠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행을 자주 떠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덜 하다는 것이다. (좋은 점이 맞을까?)

언젠가부터 여행을 안 가면 답답함에 몸을 벅벅 긁는 여자가 되었다. 서울에서 탁 트인 풍경을 보지 못하고 있군, 깨닫고 나서 그렇게 되었다. 높은 곳에 오르거나 강가에 가는 등 최대의 노력을 해 봐도 건물의 스카이라인이 보일 뿐이다. 들판이나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것을 종종 봐 주어야 눈과 정신의 피로도를 낮출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호화스럽진 않아도 짧게 짧게 어딘가에 다녀오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여행 다녀온 후에는 바짝 꽤나 잘 써진다. 여행 마치고 일상 복귀하는 시기, 어딘가 팽팽한 각성 상태가 되어 짧은 시간 동안 몇 편의 시를 써 내는 패턴이 생겼다. 그러니 어쩌나, 시가 안 써질 땐 여행을 간다는, 좋은 핑계도 생겨 버린 것이다. 여행이 실제로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것일지, 아니면 여행 다녀 왔으니 글이라도 써야지… 하는 이상한 죄책감이 작동하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행은 시에 도움이 된다. 이번 달 보내 드리는 시 ⟨밤의 파르페⟩ 역시 여행에서 다녀온 직후 썼다. 

지난 달 다녀온 삿포로는 너무나 좋았다. 삿포로 역에 처음 내린 순간부터, 아 마지막 날 내가 이곳을 떠나기 싫어할 것임을 단번에 알았다. 실제로 집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는데, 편도 가격이 내가 왕복으로 구매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비쌌기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여행 내내 말했다. 너무 슬퍼,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너무 슬퍼, 믿기지 않아. 

3박 4일은 짧기만 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미리 찾아보고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섬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이 계속 생겨났는데 주어진 일정은 3박 4일뿐이었다. (삿포로 시내에선 딱히 할 게 없으니 짧게 가도 괜찮다던 블로거를 원망해 본다…) 

파르페 먹기는 그중 하나. 파르페라니, 살면서 파르페라는 단어를 발음해 본 적이나 있을까? 먹어 본 일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크고 과한, 단것. 단정하기보단 화려한 모양. 그다지 욕심나지 않는 디저트.

그러나 근교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반쯤 졸고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 중 이 한 부분만 선명하게 들려 왔다. “삿포로에서는 술자리가 파할 때쯤, 마지막으로 파르페를 먹는 문화가 있어요. 그래서 번화가에 파르페 가게가 많은데, 대부분 저녁 때만 영업합니다.”

왠지 흥미가 동해 구글 맵에서 파르페를 검색해 봤다. 정말 번화가 주변으로 여러 가게가 표시되었다. 어떤 가게는 라운지바처럼 근사했고 어떤 가게는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 보였다. 전부 마음에 들었다. 디저트 하나에 이천 엔 가까이 쓰는 건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사치를 기꺼이 즐겨 보고 싶었다. 구글 맵에 달린 후기와 사진을 확인하며 전 세계 사람들의 감탄사가 어색한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꼼꼼하게 읽었다. 어디에 가야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하며.

그러나 결국 우리는 파르페 가게에 가지 못했다. 홋카이도 박물관과 마루야마 공원을 가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별 사연은 없고, 그저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여행지에서 보고 오지 못한 것에 대해 쓰기, 를 매번 컨셉으로 가져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고 온 것들은 너무나 크고 뚜렷한 인상으로 남기에, 나의 경우엔 그걸 넘어서는 무엇을 바로 써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여행기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까. 새로운 마음과 감각이 그 위로 씌워지기까지 조금의 시간을 두는 편이 낫다.

반면 보고 오지 못한 것들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하는 행위는 시 쓰기에 도움이 된다. 게다가 무척 즐겁다. 내가 바라던 모습대로, 원하는 장면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얼마나 지겹도록 달았을까? 결국엔 다 먹지 못하고 남겼겠지. 나는 보통 조악한 십자수 같은 장면을 좋아하기에 적당한 실패를 상상에 더하기도 한다. 

 아쉽기에 완전한 것이 여행의 속성과 닮았다.

✳︎

그런데 대체 그 도시의 뭐가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돌아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혹시 삿포로 가 보셨어요? 진짜 좋던데”를 남발했다. 뭐가 좋았어요? 물어보면… 대답은 잘 못했다. 깨끗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뿐이었다. 

🚶생활기

차재신: 스팀덱을 샀습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물질에 감사한 요즘입니다.

연정모: 작은 마감들이 연달아 있는 몇주를 보내고 있어요. 10월에는 중요 마감도 하나 있고요. 얼른 연휴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토요일 오후의 작은 빛 모임 @_candlelight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