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32]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이번 메일은 저와 재신 둘 다 아주 정직하게 썼습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신체에서 비롯되니, 생활이 묻어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요. 재신은 새로운 일터에 가 있는데, 건물을 지켜볼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표현하진 못한 것 같지만요…) 그래서 건물이 등장하는 시와 산문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겪는 신체와 기분 문제에 대해 썼습니다. 너무 넋두리한 것 같아 민망하지만 죄송해요 안 쓸 수가 없었습니다.

뜬금없지만 최근 읽은 소설의 한 대목을 첨부합니다.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에서 가져왔습니다. 무진장 많은 인물의 사연이 등장하는, 상당히 두꺼운 소설인데요. 전개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너무너무 맘에 들었어요. 시골에서 타이베이로 상경한 인물이 바나나 농장 안에서 잠시의 황홀경을 누리는 장면입니다. (열두 시간 걸린 시외버스에서 내리지마자 우다다 농장으로 들어가 소변을 본 후랍니다)

바로 오늘, 무척 사랑하는 친구 하나와 카톡을 하는데 그가 묻더군요.

🕶️ 친: 너는 왜 살아?

❓ 나: 목적이나 이유는 없고, 내 신체가 여기 있으니까. 너는?

🕶️ 친: 행복하려고 살지.

신기했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삶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바나나 잎에 대한 사랑 같은 거거든요. 길고 덜컹덜컹한 삶에서 때때로 마주치는, 나만 아는 황홀경. 이것으로 떡을 쪄 먹든 그런 다음 달콤한 꿈을 꾸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황홀경. 그리고 겨우 그것만이 삶의 자랑인 초라함이 있습니다. 하하하!

p.s. 저 이야기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긋지긋 고통스러운 삶을 삽니다. 소개한 부분은 거의 유일한 해피 묘사예요. 전 이 소설에 너무 이입해서 밤에 잠이 안 왔어요. 귀신 생각을 오래하는 건 몸에 안 좋더군요. 추천하냐고요? 그럼요.

차재신

집, 미술관, 아파트 등 건물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나는 건물 하면 거대한 빌딩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종각이나 광화문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높이 솟아 있는 빌딩들. 그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직원들.

거대한 건물 앞에서 종종 망연해질 때가 있다. 갈수록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느낌, 세계로부터 내가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 건물에게 받는 인상은 거대하고, 건조하며 삭막하다.

내게 건물은 추상적이다. 나와 밀접하지 않다. 그러나 삶은 늘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밖에서 누군가와 만나거나 헤매거나 돌아다녀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건물이다. 돌아오는 것은 건물이다. 밀접하지 않으면서 늘 내 곁에 붙어 있는 건물.

이번 시는 그런 '건물'로부터 느끼는 간극을 표현하려 했다. 나는 건물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다. 건물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뚜렷한 형체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대명사처럼.

연정모

1.

오월은 언제나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던 것만 같은데, 올해는 흐리고 추운 날이 많았네요. 왜 따뜻해지지 않지?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끝장나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문 모를 스산함 속에서도 버드나무 아카시아 장미 늦지 않게 피어났고 삶은 끝장나지 않았습니다. 

2. 

얼마전 치아 교정이 끝났습니다. 너무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데요, 치아 표면의 보철물을 걷어낸 것만큼 반가운 게 있습니다. 더 이상 엑스레이를 찍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내 구강 구조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하기 위해, 석 달에 한 번씩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촬영하는 동안 머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간호사는 내 미간에 플라스틱으로 된 막대를 대어 고정시키곤 했어요. 그 막대가 눈 사이를 슬며시 누르는 느낌이 너무나 오싹해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기계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잠깐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아무것도 아닌, 아주 얇은 플라스틱 막대일 뿐인데 왜 그렇게 소름 돋았던 걸까요. 얼굴의 정중앙이었기 때문일까요. 

몇 번을 반복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오싹오싹. 언제나 직전의 촬영과 마찬가지로 공포스러웠어요. 나중이 되어선 그 막대에 닿지 않고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법을 익히기도 했는데요, 직접 닿지 않을 때에도 소름 돋기는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렇게 이상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아 이걸 시에 써봐야겠다 생각했어요. (그 생각하며 촬영이 끝나기를 버텼는지도요) 그러나 도무지 시가 되지 않더군요. 쓸 게 없더군요. 자 저는 이제 궁금합니다. 시로 넘어가는 그 지점은 대체 언제 찾아오는 걸까요?

왜 무엇은 쓰게 되고 무엇은 그럴 수 없는지.

3. 

이번 주에는 세 편의 시를 동시에 썼습니다. 이런 식으로 쓸 얘기가 생각나는 건 참 드문 일이기에 절대 놓쳐선 안 됩니다. 이 모드가 되는 건 두 경우인데요:

너무 즐거울 때, 마구 터지는 폭죽과 환호 조명 속에 있을 때,

혹은 완전히 매캐한 감정 속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이번엔 후자였어요. 어떻게 해도 나아지지 않는 부전 상태였습니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종일 눈가가 부어 있고, 호흡기의 염증은 낫지 않습니다. 기침이 계속되다 보면 두통이 옵니다. 두통이 오래되면 눈이 쏟아질 것 같고요. 감정이 아닌 몸 얘기 아닌가요? 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징그러울 만치 얽혀 있는 얘기니까요. 

4. 

몸이란 것이 왜 이렇게 나를 번거롭게 하는지.

5.

실은 가까운 사람(엄마입니다)과 싸웠습니다. 싸우고 나서 며칠간 몸이 좀 아팠어요. 몇 시간 안 되어 냉기류는 풀렸고, 다음 날엔 어른스럽게 사과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내상이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계속 은은하게 고통스러웠고, 혼자 앉아 있다 보면 어디서든 조금씩 울게 됐어요. 누구 한 명이 대단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상처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그냥 서로의 가장 취약한 표정을 보였을 뿐입니다. 써 놓으면 아무것도 아닐 말들을 히극히극 숨 가빠하며… 끝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방 안에 있었고.

뭐야, 그래서 앓았던 걸지도요.

6.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저를 혼내고 나면 안방에 가서 그대로 누워 잤습니다. 초저녁부터.

5.

이번 달에 보내드리는 시는, 밤새 모기향을 피우고 난 후의 방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엄마와 싸우기 직전의 새벽엔 잡아도 잡아도 모기가 어딘가에서 계속 들어와 잠을 제대로 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두덩이고 팔이고 전부 잔인하게 뜯겨 있었습니다. 얼굴은 퉁퉁 붓고 종일 피곤하고. 또 이렇게 당할 수 없다 싶어서 그날 저녁엔 모기향에 불을 붙였습니다. 

저녁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요. 잠들기 직전에 보니 방안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몸에 안 좋을 게 분명하지, 모기도 모기인데 내가 먼저 죽겠군.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기들이 힘없이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방바닥에, 협탁에. 심지어는 화장실 문의 틈새에 끼어(잠시 앉았다가 문 닫는 걸 못 피한 거겠지요). 모기의 날개를 손가락으로 조심히 들어올리면 그 신체를 전혀 분해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어요. 압사당하지 않은 모기라니, 오히려 낯설었습니다.

그날 방에서 건조 중이던 셔츠에서는 아직도 매캐한 냄새가 나요. 이대로 입기는 곤욕입니다. 다시 빨면 되지, 할 수도 있지만 아깝잖아요. 빨래한 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인데요. 바람 통하는 곳에 걸어두고 다시 뽀송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6.

그날은 죽은 모기들을 잔뜩 보며 시작한 탓인지 하루가 영 아름답지 못하게 흘러갔습니다. 머리가 계속 흐릿했던 건 살충 성분을 너무 많이 들이마신 때문이겠지요.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방사선실의 플라스틱 막대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더 큰 신체적 불편감을 주지 않도록, 막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꼿꼿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데요,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 (보이지 않는) 막대가 제 미간 사이에 있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저는 이 생각을 하며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에 대해 쓸 수 있을 것이다.

7. 

이 중구난방의 결론은, 33호의 시 ⟨유충⟩은 엄마랑 싸우고 쓴 시란 겁니다.

🚶생활기

차재신: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와 있는 중입니다. 술을 더 자주 먹으니 기분도 더 자주 좋습니다.

연정모: 지난 호를 복제하여 그 위에 새로운 내용을 덮어쓰는 방식으로 메일을 세팅합니다. 지난 메일의 꼬랑지 사진으로는 콘서트장 다녀와서 들른 와인바의 모습을 담았더라고요. 정말 벅차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써두었습니다. 그러나 2주가 지난 후 제가 느낀 것: 특별히 벅차고 특별히 슬프지 않도록 기분의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다루는 방식이다. 들떠서 잠 시간을 놓쳤던 새벽 이후로 마음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특별 트레이닝 모드 들어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