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6] 잘 지내시나요?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업무상 보내는 메일에도, 앞뒤로 수심 어린 문장을 하나씩 덧붙이게 되는 요즘입니다. 저는 코감기에 걸렸어요. 아마 이 추위를 거스르고 거리로 나선 많은 분들이 저처럼 훌쩍이고 계실 것 같아요.

전 요즘 매일 일기를 씁니다. 지난 14호 메일을 다시 읽으며, 제가 너무나 감정적이고 자의적인 글만 쓴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발생한 일만 나열하는 일기장'을 하나 새로 만들었어요! 아침에 어떤 음료를 샀는지, 점심 땐 누구와 뭘 먹었는지, 오후에 회사에서는 누구와 무슨 일을 상의했는지 그런 사소한 행위들을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특성 상황이나 감정에 골몰하는 것은 미뤄두고요.

일단 재밌어요. 그리고 사람이 좀 심플해집니다. 오늘의 사건과 말들을 소화해서 넘기는 기분이에요. 내일까지 가지고 갈 것과 오늘에 남길 것들을 구분할 수 있고요. 이게 다 (역시 14호에서 언급했지만) 자취방에 제대로 된 책상을 들인 덕입니다. 밖이 소란해도 여기 앉아 일기 쓰며 음악 들으면 조금 온화해져요. 다행히도요.

이번 달의 주제는 연말에 어울리는 '시작과 끝'입니다. 다 쓰고 보니 미묘한 지점이 하나 있었어요. 재신은 주제를 '시작과 끝'으로, 저는 '끝과 시작'으로 생각하고 글을 쓴 건데요. 순서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 말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시작과 끝을 얘기하는 건 지나치게 인간적인 관점일 수 있겠어요. (저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은 사실 그런 식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고들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고약한 미물이고, 0세에 태어나 nn세에 사망하는 것이 - 그리고 그 사이의 사랑과 절망 따위에 갈팡질팡하는 것이 제 세계의 전부이므로… 이 안에서 미물답게 자라고 노화하겠습니다. 

차재신

‘나’는 뭘까? 세상 어디에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차재신’이라는 이름도 하나의 기호일 뿐 ‘나’의 전부를 대변하지 않는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것도, 게임과 농구에 열광하는 것도 나만의 고유한 취미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저 환상 속의 개념인 듯하다. 나는 내가 태어난 순간을 보지 못했다. 내가 언제 죽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시작도 끝도 모르는 채, 평생 나로 사는 셈이다. 

나의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한다. 어떤 이에게는 내 마음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귀로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사회화'라는 것은 '무수히 분열되는 나'들이 생기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기성 세계에 안착하려면 우리를 그 세계의 문법에 맞춰야 한다. '기존의 나'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나로부터 계속 탈각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생일'은 나를 위한 날처럼 보인다. 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며, 내가 축하받아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괴리가 생긴다. "너는 이날, 이곳에서 태어났어" 알려 주는 이가 없으면 나는 나의 탄생조차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나조차도 모르는 나를 기념하는 날인 셈이다. 

평소에 '나'로 있을 수 없기에 나는 '나'가 무엇인지, '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한 번씩 찾아오는 생일 때마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분열되는 나와의 간극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저 동물적으로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갈 뿐이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이 문장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미 끝나 버렸는데 '나보다 오래 지속'되는 삶이 있는 것 같아서. 많은 사람이 그런 형태로 사는 것 같아서. 아니면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헤매고 있거나. 

나는 언제쯤 내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나를 좋아하게 될까? 나도 내 삶도 아닌, 그저 의문만 지속될 뿐이다.

연정모

원래는 연말 정산 글을 쓰려 했었다. 그야 12월이고, 쓰기 재밌고 읽기도 편하니까. 올 한 해 내가 들여다봤던 단어 얘기를 써보려고 했다.

계엄이 있기 전날, 명동에서 연극을 한 편 봤다. 20세기 초반의 천문학자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뒤에 나올 모든 논의를 차치하고서 일단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연극에서만 전이되는 감동이 온전히 거기 있었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배우의 표정과 호흡, 실제의 것이 아니지만 모두의 합의에 따라 그곳에서 제 역할을 해주고 있는 무대 장치 그리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대사들이 어우러져 관객의 몸과 머리를 두들긴다. (매우 추천드립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읽던 책(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에서 불쑥 등장해 계속 나를 찜찜하게 하던 화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명조체 사이에서 혼자 고딕체로 쓰여 있던 <그때는 모두 얼간이들이었어>라는 문장. 부연하자면 이 문장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다룬 파트에서 아주 잠깐 등장한다. 대단한 음악적 유산과 함께 형편없는 반유대주의 에세이까지 남겨버린 바그너의 예시를 들며, ‘그 시대에는 그것이 잘못된 줄 몰랐을 거야’ 하는 옹호론을 인용한다. (바그너는 의도도 예상도 않았겠지만 이후 그의 음악은 나치 정권의 상징 및 자랑이 된다) 그러나 예상했겠지만 저 문장은 반박되기 위해 그 자리에 놓였다. 

연극은 헨리에타 레빗이라는 여성 천문학자를 조명한다. 그는 20세기 초, 하버드 천문대의 여성 계산수로 일했다. 놀랍지도 않지만 여성 계산수들은 망원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급여가 낮다는 이유로 고용되었고, ‘피커링*의 하렘’이라는 놀랍지도 않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 당시 하버드 천문대장이었던 에드워드 피커링. 

시대극을 보며 ‘저때는 저랬고 지금은 진보했다’는 안전감을 느끼는 건 참 바보 같은 일이다. 창작자의 의도에 영 반대되는 일이기도 하다. (각본가 및 연출가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러나 캐릭터의 소란과 소요와 역사를 내려다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손쉽게 그들을 가엾게 여기게 된다. 우리는 각본 바깥의 시간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은 권력이니까. “그때는 모두 얼간이들이었어”라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당 25센트라는 ‘여성치고 괜찮은’ 보수를 받고 반복 노동하는 계산수들,

가엾다. 

대단한 발견을 하고도 합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여성 천문학자들,

가엾다. 

참정권을 위해 거리로 나선 여성들,

대단히 용기 있고 또한 가엾다.

계산수들에게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고 기계적 노동을 명령하는 이들, 

그때라면 그럴 수 있다. 

자신의 발견을 해나가는 계산수들에게 하렘이라는 멸칭을 붙이는 이들,

그때라면 그럴 수 있다.

서프러제트 활동가를 학교 망신이라며 비난하는 이들,

그때라면 그럴 수 있다.  

무지했기에 그럴 수 있다.

다시 <그때는 모두 얼간이들이었어>라는 문장에 집중해 보자. 

그 시절에는 그것이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과거는 야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손쉽게 사면하고 넘어갈 수 있는가? 뭉툭하게 변호할 수 있는가?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과오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간단한 논리에 반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럴 수 있겠나요) 다만 우리가 역사의 상승곡선 속에 있다는 안전감이 얼마나 멍청하고 연약한 것인지, 문득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날 밤, 나는 같은 질문을 완전히 다른 방식과 무게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전보다 나은 역사 속에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정말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하는가? 사람들은 옳지 않은 것과 옳은 것을 더 잘 구분하는가?

우리는 혼란과 엉망으로부터 안전한가?

계엄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갑작스럽게 불려왔을 때, 결국 모든 국민이 그 선포를 목도했을 때, 내가 느낀 건 분명한 치욕이었다. 얼간이 취급 당했다는 치욕. 이런 취급 받으면서도 무력하게 뉴스 속보를 새로고침할 수밖에 없다는 치욕. 한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이고도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가? 분명한 ‘역사적 과오’에 해당하는 그 단어를 휘두르는가?

역사와 지성이 거대한 방주처럼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운반한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손쉽게 마음을 놓다가 한순간 허망해진다. 그것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참 야속하다. 국회 앞 어느 깃발에 적힌 문구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었는데. 

역사는 우리를 어느 곳으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래도/그렇기에 걷는다. 이것은 치욕을 이기기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다. 내 발로 걷고 인파에 휩쓸려 흐른다. 바라옵건대: 이 겨울의 풍경이 너무 오래 가지는 않기를 친구들과의 작은 해프닝으로 소모되기를. 

마무리는 연극 얘기로 하고 싶다. 나는 저 연극의 마지막 연출에서 속절없이 울고 말았는데, 조금의 슬픔도 절망도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고양의 눈물이었다.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우주의 반짝임 위로 짧지 않은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실제 그 시점의 인물들은 결코 알 수 없었을, 그들의 미래를 나열한다. 

그 미래는 희망찬가? 

그랬다. 

모든 실패와 부당함과 절망과 병마… 등등 사이에서도 한 줄의 변화와 희망이 있었다.

결국 살아남은 문장은 이런 것들이다.

…그로부터 수년 후

미국에서는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다.

허블이 헨리에타 레빗의 ‘주기-광도 관계’ 발견을 활용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알아낸다.   

우리는 지구의 궤도를 돌고, 달 위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마침내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경이로움이 언제나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기에.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치욕이 아닌 경이일 수 있기를.

추위 속에서도 전진하면서 소원하는 것이다.

* 연극을 볼 예정이신 분들의 관극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작품명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댓글 달아주세요. ☺︎

🚶생활기

차재신: 갓생 사는 중입니다.

연정모: 이번 달엔 벌써 연극을 두 편 보았습니다. 이번에 느낀 건데, 연극은 참 시 같아요. 약속하지 않아도 무대 위에 그 세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시공간을 불쑥, 대사 한 마디로 전환시켜도 아무도 놀라지 않지요. 바로 옆에 서 있는 인물들이 알고 보니 지구 반대편에서 서신을 전하는 상황이어도 누구 하나 투덜대지 않고요. 관객들은 연극의 세계를 이해하니까요. 그 세계에 합류했으니까요. 일상 바깥의 호흡과 리듬. 그저 어떤 느낌 속에 있다는 감각. 그게 제가 시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겠습니다. 

💬 지난 호 답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