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31] 표류하는 방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이번 달의 주제는 '방'입니다. 영화 《썬더볼츠*》를 보고 나와서 제시한 주제예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레드룸'이라는 단어가 귀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레드룸은 MCU에 등장하는 가상의 비밀 기관인데요, 여성 암살자를 양성하는… 아주 극악무도한 곳입니다. 우리의 영웅 블랙 위도우가 레드룸 출신이지요.

방에 대해 쓰고 싶다 생각한 건, 레드룸이라는 공간에 부여된 스토리 때문은 아니고요. 주인공이 그것을 부를 때의 불길한 발음 때문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 목소리를 들으면 '이 사람은 거길 탈출했나 본데?'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방은 방일 뿐입니다.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을 필요가 없어요. 바닥과 천장, 네 면의 벽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물리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나 방은 세계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보호하기도, 반대로 외부로부터 인간을 단절시키기도 하지요. 세상의 모든 사물과 개념이 그렇듯 깊이 생각하고 있으면 무척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방의 한쪽 벽면은 오 도 정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빌라의 꼭대기 층이라 그렇습니다. 공간 활용에 있어서는 감점 요인이지만 저는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조금 이상한 나의 집. 침대에 누워 혼자 천장을 보고 있으면 이 방이 무너져 내릴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런 불길한 상상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 세계가 좀 도라방스이기 때문일까요?

덧.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5월호에 시 한 편을 실었습니다. [시인이기] 21호로 소개했던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CLICK🔗)입니다. 공개된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거든요. 이렇게 만날 수 있어 기뻐요!

차재신

최근에 내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좋은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다시 보였다. 첫 시집을 꽤 자유롭게 쓴 만큼 유연하고 과감한 문장과 전개가 있었고, 그만큼 치밀하지 못한 논리나 성긴 비약도 눈에 띄었다. 참고해야지.

최근 들어 시집을 읽으면 개별 시편보다는 시인이 보여 주고자 했던 세계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구조와 구성을 면밀하게 살피진 않더라도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어림잡는 것. 시를 읽는 감각과 시집을 읽는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요즘 많이 체감한다.

여전히 시집을 살 때 기준은 ‘슥 봤을 때 눈길을 붙잡는 시’의 유무이긴 하지만.

어릴 때는 새로운 경험을 할수록 나의 세계도 넓어졌다. 새로운 만남, 장소, 환경.. 자라고 나니 경험하면 할수록 세계도 함께 작아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장소를 가도 내게 맞는 사람과 환경을 금세 구분하고 스스로 격리하게 된다. 넓어졌던 방이 다시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세계, 시집, 마음, 사람 간 관계. 방으로 비유할 것들은 많다. 내 방은 초라하다. 방에 들어온 사람도, 책도 몇 없다. 이제 무엇을 채워 넣을까. 아니면 더 비워야 하나? 삶이 끼어들수록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든다. 마음은 공허한데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그대로다.

연정모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나는 꽤 나이 먹은 후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연애가 가장 중요한 줄만 알았다. 모두가 일기에 사랑 얘기만 쓰는 줄 알았다. 누구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줄로 알았다.

꽤나 조숙한 아이였던 열한두 살즈음부터 내 모든 일기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로 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사소하고도 결정적인 사랑의 장면들(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거나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거나 다같이 방방을 타러 가서 돌아올 땐 둘만 걸었다거나)을 정직한 솜씨로 일기장에 옮겨 적었던 것이 기억난다. 아직까지도 그 어린 남자애들의 웃는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사실이 좀 우습고 즐겁다. 

성인이 된 후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사랑했던 모두를 진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전부 다른 형태였지만 전부 대단히 진심이었다. 후회가 남은 사랑은 하나도 없다. 연애 파업 시기가 진하게 지나가기도 했지만(연애 절대 안 해 대체 사랑이 뭔데요) 친구들을 붙잡고 “너희가 생각하기에 사랑의 실체는 뭐야?” 물어보고 다닌 걸 보면 그때도 사랑 생각만 하고 있던 게 맞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코끼리 얘기를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부끄러운 이야기. 사랑이 시작될 때 나는 남부끄러운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다름 아닌 고립에 대한 것. 열차 안에, 숲속에, 방 안에 갇히고 싶다. 폭설 때문일 수도, 사고 때문일 수도, 어떤 종말의 징후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상관 없다.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오로지 둘만이고 싶다. 거대한 힘에 의해 속절없이 휩쓸려가고 싶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애초부터 우리 둘뿐이었던 것처럼. 폭설 속에서, 사고 속에서, 종말의 징후 속에서 나는 아마 뻔뻔하게도 당혹스러운 척할 것이다. 들뜬 기분은 결코 들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바라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방 안의 연인 이야기다. 뻔뻔한 연애 얘기라 생각하며 썼지만 완성하고 보니 곳곳에 절망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연애담일 것이다. 사랑 얘기만 하고 싶다.

크림

집이 자꾸만 오그라든다

몸속에서 몸을 마는 모양으로

도시에 더위라는 단어가 남아 있던 날

우리는 마침내 그 집을 찾아냈다

창을 열면 공중의 입자가 흩어져 들어왔다

햇빛에서는 길거리 오븐 냄새가 났고

너는 곧장 그 집의 이름을 정했다

침대 옆에 나무를 기르기로 했다

뿌리의 중력에 대해선 아는 바 없이

생명은 곧바로 선 것을 잡아당기는 데 능하다

칠월에서 일월까지의 속도로

벽면이 기울어지고 창이 뒤틀리기 시작했을 때도

우리는 벌거벗은 햇빛 아래에 몸을 굽기에 바빴다

집이 조금 더 말랑해진 것 같아

식으면 바삭해질 거야

크크

창을 열면 여전히 따뜻한 과자 냄새가 났다

천장이 완전히 둥글어진 이후로

종종 아기 낳는 꿈을 꾼다

손가락 달린 새알이나 작은 소설책

팥 대신 백앙금이 든 호두과자 같은

안아 보면 따뜻하지 않은 것이 없다

너에겐 비밀로 했다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빛을 내며 쏟아진다

나무뿌리에 얽힌 방울들이 몸을 가르고 들어온다

뱃속이 우글거린다 마침내 안으로부터 달콤해진다

내가 삼킨 것들이 나의 이름을 결정짓는 미래가 있었다

🚶생활기

차재신: 요즘 술을 자주 먹어서 기분도 자주 좋습니다.

연정모: 피로 이슈로 고함량 비타민을 사 봤습니다. 음… 근데도 오늘 수업을 째고 말았어요. 쉬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