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기록, 평범도 범이다입니다🐯
어제저녁 버스에 앉아 차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니 생각나는 말이 있더라고요.
80년 전 우리가 빛을 되찾은 그날, 아침엔 안개가 껴 흐렸다가 점차 날이 개었다는 말이요.
올해 광복절 오전엔 비가 왔잖아요. 비구름이 몰려 한두 방울 비를 떨어뜨리다가 점차 구름이 희어지고 흩어지며 푸른 하늘을 내비치는 걸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지금 느끼는 안녕이 어디서 온 것일지 생각했어요.
두 손을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니 맑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 범레터는 우리가 지금을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몸과 마음 모두 다하신 분들을 이야기하려 해요.
떠오르는 이름, 간신히 건져 올린 이름, 완전히 잊어버린 이름.
한 분 한 분 호명할 순 없다는 게 애석하지만
빚진 마음보다는, 그들 모두를 아울러 빛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으니
한 세기 전 그때를 함께 들여다봐 주세요! ✨
오늘의 범레터가 건네는 이야기
🌌 칼럼|이름 없는 별들, 대한민국 독립을 밝히다
🔔 오늘의 꿀떡|그들은 우리와 같은 나이였고, 독립을 위해 싸웠다
칼럼|이름 없는 별들, 대한민국 독립을 밝히다
우리는 대체로 이름 있는 몇몇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이해해 왔습니다. 3·1운동 하면 손병희, 유관순이 떠오르고, 임시 정부 하면 김구, 만주의 무장 투쟁 하면 홍범도와 김좌진, 의열 투쟁 하면 안중근과 윤봉길이 먼저 생각나곤 합니다.
이름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분들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독립군의 요람’으로 불린 신흥 무관 학교를 거쳐 간 독립운동가는 3500명에 달했지만 그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이는 10% 남짓에 불과합니다.
우리 헌법 전문 첫 문장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헌법 재판소는 이를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기반 위에서 출범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는데요. 곧 독립운동은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이며, 그 정신을 기리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알려 줍니다.
정부가 지금까지 포상한 독립유공자는 외국인 69명을 포함해 총 1만 4829명입니다. 얼핏 보면 많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거의 반세기 동안 이어진 독립운동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의병 전쟁,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 투쟁에서 희생된 독립군만 해도 최소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선 민주 혁명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국내외 각지에서 이어진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는 주권 재민의 근대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향한 민중의 외침이었습니다. 한 달 뒤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라고 선언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죠.
당시 만세 시위 참여자는 일제 경찰 통계로도 연인원 200만 명을 넘었고 일부 추산은 1000만 명에 달합니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4만 6948명이 체포·투옥됐고, 2만 명이 수감됐습니다. 박은식의 추정으로 부상자는 1만 5900여 명, 사망자는 7500여 명이었습니다.
뜨거운 독립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확인된 참여자는 극소수입니다. 현재 전체 독립 유공자 가운데 3·1운동 관련자는 5000명 남짓입니다.
대한민국 전체 서훈 건수는 72만여 건입니다. 이 가운데 독립 유공자 서훈은 건국 포장·대통령 표창을 제외하면 1만 건 남짓, 비중으로는 2%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를 더 이상 잊힌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내 기리고 예우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책무입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에 해야 할 일을 미루면서, 짧게는 73년, 길게는 100년 이상 기억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끝내 찾아내지 못할 이들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을 있음을 기억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현재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국가 차원의 시설물은 서울 현충원 대한 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이 사실상 유일합니다. 이마저도 국가가 아닌 광복회가 세웠으니 부끄러운 일이죠.
올해는 3·1운동 106주년이자,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삼일절의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올해, 그동안 많이 언급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세 분의 삶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파리에서 독립을 외친 서영해]
1902년 부산 초량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17세 때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수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임정(임시 정부)의 막내’로 불린 그는 1년 6개월간 상하이에 머물다, 1920년 임시 정부의 외교 지시를 받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생활비 지원이 끊긴 뒤에도, 12년 과정을 6년 만에 마칠 만큼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이후에는 고려 통신사를 설립해 일제의 침략상을 유럽에 알리고 왜곡된 한국 이미지를 바로잡는 데 힘썼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집필한 프랑스어 장편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은 출간 1년 만에 5쇄를 찍을 만큼 주목받았습니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북한으로 넘어갔으나 그곳에서 숙청당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이후 정부가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조선의 잔다르크, 김명시]
경남 마산 출신 김명시는 조선 의용군 유일의 여성 ‘장군’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유학 후 상하이에서 항일 운동에 뛰어든 그는 19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에 참여했는데요. 1932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7년간 옥고를 치른 뒤, 중국 팔로군에 합류해 전투와 첩보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1942년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일본군 점령지에서 조직을 만들고 선전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뒤 유치장에서 사망한 그는 시신의 행방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22년, 시민 단체의 노력으로 국가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독립을 노래한 한형석]
부산 동래 출신 한형석은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29년 상하이 신화 예술 대학에 진학한 그는 ‘조국을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의 가명, 한유한(韓悠韓)으로 활동했는데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서 ‘신혁명 군가’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 행진곡’ 등 항일 가요를 작곡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도 했습니다.
1940년 중국 시안에서 초연한 항일 가극 ‘아리랑’은 한·중 연대의 상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글귀 ‘그냥 갈 수 없잖아’에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106년 전 3·1운동에서 수백만 명의 함성은 오늘도 묻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기억하는가?”
광복은 몇몇 영웅만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모두 부를 수 없더라도,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만큼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꿀떡|그들은 우리와 같은 나이였고, 독립을 위해 싸웠다
: 시대에 맞선 청년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말만 들었을 때는 먼 역사의 순간이 상상되곤 합니다. 그러나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곁에 독립운동가들이 서 있다면 어떻게 느껴질까요?
그들이 대표적인 업적을 이룬 나이를 2025년 기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1994년생부터 2008년생입니다.
지금의 평범한 청년들이 일제강점기에 살고 있다면요?
독립운동가와 나이가 같거나 조금 적거나 혹은 조금 많을 뿐이겠죠.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결단을 옛날이야기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100년 전 그들에게는 ‘오늘’이었고, 그날의 다짐과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을 선사해 준 독립운동가분들이 이룬 대표 업적이, 만약 2025년의 일이었다면?’
이 같은 가정과 함께 그들을 다시금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안중근 의사(1879)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저격
만약 2025년에 의거하였다면, 1995년생(30세)
윤동주 열사(1917)
1942년, ‘서시’ 집필
만약 2025년에 집필하였다면, 2000년생(25세)
유관순 열사(1902)
1919년, 3.1 만세 운동 주도
만약 2025년에 주도하였다면, 2008년생(17세)
윤봉길 의사(1908) / 이봉창 의사(1901)
1932년, 홍커우공원 / 도쿄 일왕 암살 투탄 의거
만약 2025년에 의거하였다면, 2001년생(24세) / 1994년생(31세)
박열 의사(1902) / 가네코 후미코 지사(1903)
1923년, 항일 단체 ‘불령사’ 결성
만약 2025년에 결성하였다면, 2004년생(21세) / 2005년생(20세)
권기옥 의사(1901)
1925년,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복무 시작
만약 2025년에 복무 시작하였다면, 2001년생(24세)
박차정 의사(1910)
1935년, 여성 독립운동 단체 ‘남경 조선 부녀회’ 결성
만약 2025년에 결성하였다면, 2000년생(25세)
2025년을 사는 우리는 무얼 위해 운동할까요.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일? 차별에 맞서는 일?
모양은 달라도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운동은 독립과 동시에 끝난 일이 아니라, 이름을 바꿔 계속되고 있습니다.
100년 뒤, 누군가는 오늘의 우리를 그렇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잠깐, 꿀떡까지 모두 눈과 마음에 잘 챙기셨나요? 🤓
많은 분들이 힘을 합쳐 어렵사리 지켜 낸 만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 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기며 오늘을 만끽하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새기고 되새기며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만나요! 🐯
📧 9월 2일, 다음 범레터가 찾아옵니다.
: 청년, 일어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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