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 번째 혼잘여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뜨거운 기온만큼 치열한 일주일이 지나갔습니다. 가만히 누워 숨쉬기만 해도 공기가 퍽퍽한 날들이었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난주 혼잘여 뉴스레터는 어떠셨나요? 구독자님의 단단함과 든든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오늘의 혼잘여 주제는 '주체적 여성성', 그러니까 2020년대 초 언어로는 '주체적 섹시'입니다. 소위 '마음대로 꾸밀 자유와 남성과의 섹스가 기꺼울 자유'라고도 합니다.
비혼비출산과 주체적 여성성은 상반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여성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기 위해 비혼비출산을 선택하는데, 주체적으로 여성스럽고자 애쓰는 노력도 그 목적에 맞지 않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거고요. 과연 여성성과 비혼비출산은 상충하는 개념일까요?
세 번째 혼잘여 뉴스레터 요약
- 주어진 선택지에서 빠르게 벗어나세요
- 여성에게 남성이 필요한 이유, 가부장제에 있습니다
- 가부장제 왈: "더 나은, 안전한 남성에게 선택받으려면, 더 철저하게 여성성을 가꾸세요. 이대론 부족합니다."
- 내 취향 - 가부장제 로맨스 = ?
"주어진 선택지에서 빠르게 벗어나세요"
K팝 아이돌 무대직캠 영어댓글은 종종 댓글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오늘 릴스에서 본 걸그룹 솔로 영상은 '저 친구의 팬은 대부분 남성인데, 왜 란제리(속옷)만 입고 있냐'와 '성인 여성인데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할) 자유도 없느냐'는 댓글로 뒤덮였습니다.
이상한 점을 못 느끼시겠다고요? 이틀 전에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보여줬던 영상에서는 동일 아이돌이 얼굴 빼고 머리를 모두 덮는 독특한 후드를 쓰고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왜 신생아가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감싸는 모자를 쓰고 있나, 성인 여성이 아기 같은 모습을 어필하려고 하지마라'였죠.
"이래라 저래라 말만 많고...그럼 어쩌라고?🤨"라는 말이 떠오르나요?
답은,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르려고 하지 마세요'입니다. 구독자님은 남성을 란제리로도, 어린 여성의 모습으로도 유혹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의 존재 의의는 남성을 유혹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운좋은 지배성별인 남성을 유혹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 일생을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여성에게 남성이 필요한 이유, 가부장제에 있습니다.
"난 남성을 유혹한 적 없고, 남성과의 섹스(성관계)가 좋을 뿐이야", "난 말 잘 듣는 조신한 남성이 좋아", "난 내 남자친구와의 연애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여성들은 남성을 필요로 할까요? 왜 여성들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렇게까지 남성을 끼워넣으려고 할까요?
그게...여자의...본능이니까...?라고 답하셨다면 절반 정도는 맞췄다고 해드리겠습니다. 사회에서 학습하신대로 잘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구독자님이 스스로 밥그릇 챙기고 살아가려고 하신다면, 배운대로만 행동하는덴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킹된 부분을 누르면 관련 링크로 연결됩니다.
어렴풋이 지난 뉴스레터가 제가 아는 정보 중 가장 답에 가까울 거라 추측해봅니다.
가부장제가 알아서 유지되려면 '남성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는 기본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부장제가 힘들이지 않고 이 기본조건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여성이 스스로 남성에게 다가오도록 유도할만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받을만한 여성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요? 여성성을 갖추면 네게는 남성을 고를만한 힘이 주어질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 아닐까요? 물론 말뿐이었지만요.
저도 이 질문들의 답을 찾는 중입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의 깊은 생각을 들여다보는 직업에 종사하고,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다는 전제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제가 놀랐던 건 이렇게 똑똑하고 학력 좋고 사리분별 잘하는 여성들조차 수많은 남성과 연애했으며, 현재는 연애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연애를 쉰지 오래'가 아닌 '잠정적 중단'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약 10년 전만 해도, 이 지점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는 다 똑같다' '거기서 거기다' '마침 결혼적령기에 연애하고 있던 남자와 결혼한다'며 결혼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요. (여기서 여성에게 결혼적령기란 만 23세부터 생이 마감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50대 여성에게도 '미혼'이라고 부르죠.)
가부장제 왈: "더 나은, 안전한 남성에게 선택받으려면, 더 철저하게 여성성을 가꾸세요. 이대론 부족합니다."
다시 주체적 여성성으로 돌아가봅시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부장제가 적극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게끔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피지배성별인 여성이 가부장제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안전한 남성에게 선택받기'입니다.
구독자님은 자라는 내내 '가부장제에게 선택받는 여성의 조건'을 질리도록 들으셨을 겁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1번) 어린 여성의 신체적 특성 따라하기 (마른 몸, 애교)
(2번) 우월한 난자 + 출산 중 사망률이 적은 신체적 특성 흉내내기 (립과 블러셔)
(3번) 노화와 상관없는 청년기 여성의 신체적 특성 나타내기 (프라이머, 시술)
(4번) 어디서든 완벽하게 아름답기 위한 신체 변형 (미용 성형수술)
(5번) 다양한 스타일 연출을 위해 필수라는 장식 요소 (여신머리, 걸크러쉬 숏컷)
(6번) 성관계를 기껍게 받아들이겠다는 안내 (신체를 드러내는 옷, 보정 속옷)
(7번) 수직 권력관계(가부장제)에서 반박하지 않음 강조 (조용한 성격, 수줍게 웃기)
제가 자라면서 듣고 본 흔하디 흔한 예시를 나열해봤습니다. 여성의 관점이 아닌 가부장제 관점에서 적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선택지는 무려 일곱개나 있는데도, 무엇을 선택하든 가부장제 입맛에 맞는 여성성 카탈로그에 등록될 뿐입니다.
여성들은 더 많은 선택지를 충족시키면 선택받을 확률이 높아질거란 불안에, 더 많은 공을 들이며 다른 여성에게 경쟁의식을 느낍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한 반의 여성들이 틴트를 돌려쓰는 처참한 현실로 이어졌죠. 남성에게 선택받고자 하는 선택지가 여성의 디폴트값으로 자리잡아 얕은 연대의식까지 생겨났습니다.
카탈로그를 뒤적이는 사람들은 "난 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 **이 너 좋아한대'라는 말로 변형돼 연애로 이어지고요. 이런 류의 연애에서 진정한 사랑이 몇 퍼센트나 함유됐는지는...정말 하나도 모르겠군요.
아직도 나만의 남성을 선택하고 싶은 욕구가 순수한 구독자님의 것으로 느껴지시나요? 아무래도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으로 지켜주는 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죠?
내 취향 - 가부장제 로맨스 = ?
위에서 언급한 아이돌 의상은 '**룩'으로 역대급 비주얼을 자랑했다는 제목으로 수많은 SNS 게시물이 생성됐습니다. 게시물을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어린 여성으로 꾸며내기 세트가 인기 있다'는 메세지를 던집니다.
*해당 아이돌을 질책,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혼잘여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아이돌이든 여성성을 상품화해 판매하고 있기에, 그게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을 넘어선 큰 틀을 봐주세요. 그들이 왜 여성성 상품화의 선두에 서게 됐는가에 주목해주세요.
비혼비출산을 선택한 구독자님께는 '취향'과 '가부장제 로맨스'를 분리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취향을 통째로 부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흠뻑 빠져든 이 취향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지식과 얼마나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는지 살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기나긴 혼잘여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 2회 발송으로 계획했는데, 주 1회(월 4회)로 변경해 발송하고 있습니다. 변경주기가 짧아 부담스러우시다면, 시간날 때 모아뒀다가 읽으셔도 좋습니다. 마음속 한구석에 쌓아뒀다가 꺼내읽기 좋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 하단에는 댓글란이 있습니다. 구독자님의 댓글은 제가 혼잘여를 써내려가는데 큰 힘이 됩니다. 동의하는 의견도, 반박하는 주장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댓글도 모두 좋습니다.
오늘도 신나고 기대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랄게요!
다음 레터에서 또 만나요!
댓글 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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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ijamachabrownie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가 얼마나 주변 여자와 나의 선택에 스며들었는지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글이었어요! 예전의 그래도 남자도 불쌍해... 하며 제 위치 파악 안되던 저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
혼자서도 잘 사는 여성들 (661)
저도 뉴스레터를 작성하기 위한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더더욱 그 경계선을 뚜렷하게 발견하게 됐습니다. 일상에 아주 짙게 스며들어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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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
오늘 글은 좀 아쉽네요. 이번 주제는 "주체적 여성성" 이었는데 내용면에서 부족해 보이고 결과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모르겠습니다. '나의 취향이다'라고 생각하던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되짚어보는 계기는 되겠지만, 내세운 주제와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군요.
혼자서도 잘 사는 여성들 (661)
어떤 부분에서 연결고리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짚어주신다면, 제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밑줄 그어둔 부분을 위주로 읽으시면 연결고리가 보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도 잘 사는 여성들 (661)
아, 갸님에게 맞게 설명할 연결고리가 생각났어요. '주체적 여성성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아닌 걸 당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껴안고 내재화하려다 보니, 더욱 더 힘들어지는 것이죠'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갸
네 :) 이 말이 있으면 더 좋았겠네요
혼자서도 잘 사는 여성들 (661)
주체적 여성성을 내 것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해당 뉴스레터의 주요 타겟층이 아니라 분리해둔 부분인데, 맞춤설명이 와닿으셨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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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많
"운이 좋지 않게" 가부장제의 지배당하는 쪽에 배치되었지만, 운이 좋게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네요. 머릿속에 뿌옇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졌지만 나보다 훨씬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적어준 말로 읽으니 저 자신의 가치관도 보다 더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부지런히 매번 읽지 못하고 몰아서 읽다가 또 언제 이렇게 구구절절 고백하러 올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잘 읽을게요. 텍스트 성애자에게 양질의 구독할 거리를 만들어 주어서 고마워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쇼! :D
혼자서도 잘 사는 여성들 (661)
우리가 함께하는 점에서 정말 우리는 운이 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겠지만, 최대한 정확하게 적도록 노력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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