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6 번째 혼잘여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하루종일 비가 오는 곳과 하루종일 햇볕이 내리쬐는 곳을 오갔더니, 지난 2주가 굉장히 길고 고단하게 느껴지네요. 이른 새벽에는 조금씩 가을이 느껴집니다.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셨나요?
휴회 메일이라며 급하게 우편함에 꽂아넣은 6편 티저 메일은 어땠나요? 30분만에 휘갈긴 것치곤 멋졌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그걸 수습할 차례가 왔습니다. 미리 완성본을 써두질 못하는 성격이더라구요, 제가.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가부장제가 미는 연애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의 혼잘여 주제는 '가부장제식 연애'입니다. 아무래도 이걸 한 번쯤은 다뤄봐야 결혼출산으로 어물쩍 유도하려는 가부장제를 적발할 수 있겠더라고요.
흔히, 연애 한 번도 못해본 사람 보고 '모쏠'이라고 부르잖아요. 열네살 남중생이 자신을 '모쏠'이라고 부르며 자조하는 걸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연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관계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능력 부족'인 한국 사회. 어딘가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결혼과 출산의 전 단계, 연애 경험과 성관계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성별마다 갖춰야 할 능력도 나뉘어집니다. 남성은 재력, 여성은 외모. 그 외의 요소를 갖추면 결혼에 성공하지만, 연애의 기본 요건은 저렇더라고요. 너무나도 가부장제 그 자체입니다. 운좋은 성별이 운나쁜 성별을 끌어가는 형태요. 정형화된 로맨스 클리셰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다정함이 조금 추가된 박력 같은 거죠. 이성애가 아닌 장르에서도 가부장제 형태는 유지됩니다. 동성애 커뮤니티도 성역할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아, 요즘 00년생은 결혼 안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글쎄요...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가부장제에서 멀어지나요? 여성이 스스로 돈 벌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인생을 남성과 가부장제에게 맡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핵심으로 다가서면, 결국은 다르지 않아보이던데요. 우리, 비혼비출산하려는 이유를 잊지 말아요. 단순히 '결혼출산하지 않겠다'는 선언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침투력을 가진 어둠의 가부장제의 시시한 패턴을 익혀 방어막을 구축해봅시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가부장제가 대충 사랑이라며 얼버무린 종류의 무언가를, 우리도 그대로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 말아봅시다.
여섯 번째 혼잘여 뉴스레터 요약
가부장제가 제시하는 단 하나의 사랑 방식, 연애
똑똑하고 시사에 밝은 여성들은 왜 유독 '연애'분야만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할까요? 그러니까, '쟤는 이상하게 남자 보는 눈만 없더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 헌신적인 연인을 사귀는데, 뭔가 자꾸 힘들다잖아요. 그게 연인 잘못은 아니라고 쉴드치지만, 묘하게 갈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모두의 칭찬을 듣는 남자친구를 갖췄는데도요.
저는 이유가 궁금해, 지난 2주동안 쏟아져나오는 기사와 뉴스, 예능 영상을 '여성' 관점에서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여성' 관점에서 다뤄지는 '메이저 뉴스'가 없었습니다. '추석에 물가가 올라 식재료 가격이 오른다' 정도가 여성을 챙겨주는 뉴스였겠네요.
모두가 이야기하는 주제에는, 여성 관점의 정보가 철저하게 배제돼 있습니다. 예능에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분위기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몰고 가려는 남성들이 등장하고, 여성은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농담이나마 던지지만, 결국 남성이 원하는대로 이뤄지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뉴스에서는 수많은 산업 정보와 정책 중계가 쏟아지지만, 현장에는 모두 남성 뿐입니다. 머리카락이 많은 남성, 모두 밀어버린 남성, 정장 입은 남성, 작업복 입은 남성, 미팅 중인 남성, 웃고 있는 남성......지겹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면, 여성은 메이저에서 배제되고 누락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메이저일 수 없는 이유를 웃음과 눈치로 확정지어줍니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소수의 여성 빼고 다수가 신나게 웃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연애'가 이런 피곤함으로부터의 '출구'라고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끝엔 "남자친구랑 언제 결혼해?"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연애는 출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불쾌함과 불편함에서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또다시 가부장제가 원하는대로 속아주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겐 남성과의 연애결혼출산육아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평생동안 떠들고 윽박질러댔거든요.
가부장제식 연애는 제 목표가 아닙니다.
그 결과, 가부장제 속에서 안전하고 싶었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인셀만 피하면 된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속이 답답하네요. 연애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인셀. 이 단어 들어보셨나요? 이런 개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도 최근에서야 이 괴이한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를 접했습니다.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ily celibate), 줄여서 인셀(incel). 쉽게 말하면, 여성과 연애, 성관계, 결혼하고 싶지만 능력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남성은 가부장제의 운좋은 성별인데, 왜 운좋게 태어났음에도 스스로를 능력부족이라고 비하하는 남성이 생겨난 걸까요? 아무리 능력이 부족한 남성이어도 여성보다는 운이 좋을텐데요. 저는 인셀이라고 불리는 사회현상에 관심 갖기로 했습니다.
구독자님이라면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부장제에선 인셀 남성조차, 자기가 여성보다 상위에 있다고 여기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능력 있는 남성이라면 여성과 연애+성관계할 수 있다'는 문장은 얼핏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성은 여러 남성 중에 선택할 기회를 갖는다는 거죠.
이쯤에서 지난 혼잘여들을 떠올려봅시다. 여성은, '남성'을 '연애+성관계+출산+육아해줄' 대상으로 '선택할 이유'가 있던가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택하지 않아도 됩니다. 객관식 문제의 선택지에는 '연애를 선택하지 않음'이 숨김처리돼 있습니다.
주위의 수많은 연애 사례를 떠올려볼까요. 그들은 연애한다고 모두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한다고 모두 연애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제가 흔히 말하는 '사귀는 사이에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라는 문장은 의외로 뒤죽박죽 섞인 괴물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연애했던 대상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러나 사랑하려고 애썼던 시간은 열심히 가부장제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단 거죠.
연애하지 못한 기간이 길다고, 또는 연애하지 못했다고 루저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에게는 루저라는 평가기준을 남성만큼 엄격하게 적용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성에게 '더 잘난(=재력 있고 잘생기고 내게 다정하기까지 한) 남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라'는 메세지를 자주 던지는 편이죠.
'번식 욕구'는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부여한 기회
'인셀'로 돌아가서 이들이 어떤 가부장제 개념을 대표하는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셀도 '연애'를 목적지로 삼으면서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셀을 '남성'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이들은 분명히 가부장제의 운좋은 성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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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에서 '인셀'을 소개한 기사 인셀: '강남역 사건' 서구판…여혐범죄 키우는 '인셀'의 세계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BBC가 취재한 인셀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특징을 보입니다.
인셀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한 '성관계가 전무한 인셀'과 '채드'를 비교한 그림입니다. 인셀은 아이컨택을 피하고 너무 빨리 걷는데 비해, 채드는 허리가 곧고 모든 물리학의 법칙을 이겨내는 멋진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하네요.
*여성을 대상화하는 성적인 내용은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기사에서 한 인터뷰어는 자신이 '여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토론장에 모여서 어울리다보면, 작은 잘못은 이제 별 것 아닌 걸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기자는 '반페미니즘 (집단)은 집단유전학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인종차별적 편견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정치적 올바름'의 공격으로 부당하게 비방 받는 소수 집단이라고 인식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무려 2018년에 발행된 기사라고 하네요. 2022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로 보여 씁쓸합니다.
우리는 인셀만 피하면, 그리고 괜찮은(?) 연애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연애는 긴급 탈출구가 아닌, 늪의 입구
저는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편입니다. 이번주는 오랜만에 흥미로운 여성차별, 정확히는 배제와 비하 상황을 겪어서 공유해보려고요.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먼저 서 있던 남성 두 명이 저를 흘낏 쳐다봤습니다. 그러고선 아주 어색하게 "아, 룸살롱 언제 가지?" "그러게, 언제 가면 좋으려나"는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내 퇴근한 제 직장동료들이 몰려오길래 비웃으면서 인사했더니, 저를 한 번 더 쳐다보곤 눈알을 굴리고 입을 닫았습니다.
오랜만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당연히 드문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워낙 많이 겪어서 지겹고 하찮게 느껴지지만요. 여기서 제일 불쾌한 부분은, 보통 저를 '여자' 중에서 높이 평가하거나 얕은 호감이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연애는 여성의 긴급 출구가 아닙니다. 늪 입구에 가깝습니다. 입장 말곤 여성의 자유의지는 희박하게 존재합니다.
제가 결혼과 출산을 말리는 이유는 별 다른 게 아닙니다. 여성 인생에서 너무 자연스러워보이지만, 실제론 되돌이키기에 너무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22년의 상황이라면, 수습할 수 있다면 그나마 행운입니다. 게다가 이미 결혼을 선택한 수많은 여성들은 '선택하지 않은 여성'을 두고 '미혼'이라고 인식하기만 합니다. 덥썩 가부장제를 인생에 도입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비혼비출산 여성이 많아져 하루빨리 가부장제가 눈치 보면서 구석에 웅크리고 앉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주도 힘내봅시다. 제게도 구독자님에게도 평범한 일상이 안전하고 쾌적한 날이 되길 바랍니다.
댓글과 피드백은 제가 혼잘여를 써나가는데 큰 힘이 됩니다.
6편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게요.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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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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