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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에게 인사 한 번 하기 위해서

계약서 단어 하나가 만든 수천억짜리 경계선

2026.09.08 | 조회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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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영화계 안쪽에서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스파이더맨은 소니의 것이 되었다. 1999년 마블이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제작권과 영화 배급권을 소니에 넘겼다. 마블이 디즈니에 인수되고, 디즈니가 마블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동안에도 스파이더맨만은 소니 것이었다. 〈아이언맨〉이 나오고, 〈어벤저스〉가 나오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전 세계를 휩쓰는 동안 스파이더맨은 그 세계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들어왔다. 어떻게?


재정난이 캐릭터를 팔았다

1996년 12월, 마블은 챕터 11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코믹스 붐이 꺼지면서 핵심 사업이 무너진 결과였다.

사실 스파이더맨 영화화 권리는 이미 1985년 캐넌 필름에 처음 팔린 이후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소송과 분쟁에 시달려왔다. 그 복잡한 판권 싸움이 마블의 파산과 맞물려 더 꼬였고, 1998년 마블이 파산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실타래가 풀렸다. 그리고 1999년, 소니가 이 권리를 최종적으로 확보했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 촬영장 에서 캐릭터 복장을 한 니콜라스 해먼드 (1977)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 촬영장 에서 캐릭터 복장을 한 니콜라스 해먼드 (1977)  

그 과정에서 역대급 실기가 하나 있다.

마블은 소니에 스파이더맨만이 아니라 아이언맨, 토르, 블랙팬서, 앤트맨 등 거의 전체 캐릭터를 2,500만 달러에 사라고 제안했다. 소니의 답변은 이랬다. "스파이더맨 빼고는 아무도 관심 없다. 스파이더맨만 따로 협상하자." 소니는 결국 스파이더맨 영화화 권리만 700만 달러에 샀다. (지금 MCU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220억 달러를 넘는다. 2,500만 달러짜리 제안을 거절한 결과다.)

어쨌든 1999년, 스파이더맨 영화화 권리는 소니 것이 됐다. 그래서 지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 있는 캐릭터 중 스파이더맨만 원래 마블 소유가 아니다.

소니는 이 권리로 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자체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중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흥행에서 부진했고, 소니 입장에서도 이 캐릭터를 어떻게 굴려야 할지 다시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첨부 이미지

그런데 협상 테이블을 열어준 건 엉뚱하게도 해킹 사건이었다.


해킹 스캔들이 협상 테이블을 열었다

2014년 11월, 소니 픽처스가 대규모 해킹을 당했다. 임직원 이메일, 미공개 영화, 내부 문서가 통째로 유출됐다. 그 이메일의 주인 중 한 명이 소니 공동회장 에이미 파스칼이었다. 유출된 메일 속 발언들이 논란이 되면서 파스칼은 소니에서 해고됐다.

  에이미 파스칼 전 소니 픽처스 공동회장은 2015년 2월 소니 해킹 사건으로 유출된 이메일 논란 여파로 사임했다.  
  에이미 파스칼 전 소니 픽처스 공동회장은 2015년 2월 소니 해킹 사건으로 유출된 이메일 논란 여파로 사임했다.  

역설적으로, 이 퇴장이 물꼬를 텄다. 소니를 떠나 독립 프로듀서로 이동한 파스칼과 마블 스튜디오 대표 케빈 파이기가 직접 마주 앉았다. 2015년 2월, 두 사람은 스파이더맨을 MCU 안으로 데려오는 딜을 발표했다.

저작권 전문 변호사 피터 헤네인은 이 발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스파이더맨이 캡틴 아메리카한테 인사 한 번 건네는 장면을 만드는 데도, 그 이전에 얼마나 많은 게 합의돼야 했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마블이 5%짜리 계약을 받아들인 이유

원래 1999년 계약부터 마블은 소니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발생하는 총수입(Gross Proceeds)의 약 5%를 첫 수입부터 받는 구조였다. (제작비와 마케팅비를 모두 회수하고 남은 순이익에서 배분받는 구조가 아니라, 영화가 돈을 버는 첫 단계부터 일정 비율을 가져오는 방식이다. 다만 박스오피스 headline 숫자 전체가 아니라 환불·할인·수수료 등을 제외한 계약상 정의된 금액을 기준으로 했다.)

이 조건을 마블이 감수한 이유는 스파이더맨의 압도적인 인기 때문이었다. 마블 코믹스의 빅4는 어벤저스, 엑스맨, 판타스틱4, 스파이더맨인데, 스파이더맨 한 캐릭터의 인기가 어벤저스 팀 전체와 맞먹는 수준으로 평가된다.

Google 검색량을 기준으로 여러 국가를 비교한 GAME 조사에서는 Spider-Man이 57개국에서 1위였고, Wonder Woman이 15개국, Batman이 11개국으로 뒤를 이었다.
Google 검색량을 기준으로 여러 국가를 비교한 GAME 조사에서는 Spider-Man이 57개국에서 1위였고, Wonder Woman이 15개국, Batman이 11개국으로 뒤를 이었다.

IGN 슈퍼히어로 순위에서도 스파이더맨은 슈퍼맨, 배트맨에 이어 3위다. 두 캐릭터가 1930년대에 탄생한 '고전' 히어로라는 걸 감안하면, 1960년대에 나온 '신생' 히어로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이례적이다. 2013년  라이선스 상품 소매 매출만 봐도 스파이더맨은 13억 달러, 어벤저스는 3억 2,500만 달러로 격차가 컸다.

2013년 라이선스 상품 소매매출 기준으로 Disney 계열은 약 409억 달러, Warner Bros.는 약 60억 달러였고, Spider-Man의 상품 판매액은 Batman·Superman·Avengers보다 훨씬 컸다.
2013년 라이선스 상품 소매매출 기준으로 Disney 계열은 약 409억 달러, Warner Bros.는 약 60억 달러였고, Spider-Man의 상품 판매액은 Batman·Superman·Avengers보다 훨씬 컸다.

스파이더맨이 어벤저스 세계관 안에 있느냐 없느냐는, 마블 유니버스 전체의 완성도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수익을 양보해도 세계관의 빈칸을 채워야 했다.


'main'이라는 단어 하나가 만든 카메오

스파이더맨이 어벤저스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건 계약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기서 계약서의 단어 하나가 등장한다.

소니가 마블로부터 산 건 스파이더맨이 영화에 'main'으로 출연하는 권리였다.

핵심 단어는 "main"이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소니 것이다. 그러면 조연으로 나오는 건?  그런데 이 조항을 뒤집어 읽으면 주연이 아닌 조연·카메오로는 출연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마블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스파이더맨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싸움에 끼어드는 조연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계약서 단어 하나의 해석 차이가 캐릭터의 세계관 출연 여부를 갈랐다.

'캡틴 아메리카:시빌워'에 출연한 스파이더맨의 출연 분량은 약 30분 정도로 조연급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워'에 출연한 스파이더맨의 출연 분량은 약 30분 정도로 조연급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계약서가 캐릭터의 인종과 성적 지향까지 정했다

마블은 라이선스를 부여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2014년 해킹으로 유출된 문서 중에는 2011년 9월 발효된 마블-소니 간 스파이더맨 라이선스 계약 개정본(Second Amended and Restated License Agreement)의 내부 요약 문서가 있었다. 

그 라이선스 안에는 조건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소니는 영화를 만들 실무적 통제권을 가지지만, 마블이 정한 캐릭터 정체성 조건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조항은 세밀했다. 캐릭터는 반드시 백인 남성이어야 하고, 고문 장면은 금지되며, 자기방어를 포함해 누구도 죽여선 안 된다. 욕설은 PG-13 등급 수준을 넘을 수 없고, 흡연·마약 관련 행위도 금지다. 16세 미만과 관련한 행위는 전면 금지, 16세 미만 본인의 행위도 금지다.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조항은 문서 안에서 세 차례 반복된다. 뉴욕 퀸즈 고등학교 졸업, 뉴욕 소재 대학 졸업이라는 학력까지 계약서에 박혀 있었다.

“Spider-Man Must Be White, Straight Says Sony Emails” 

Variety, 2015년 6월 19일
“Spider-Man Must Be White, Straight Says Sony Emails”  Variety, 2015년 6월 19일

캐릭터 하나를 이 정도로 세밀하게 문서화해 통제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동시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IP를 쪼갤수록 각자의 몫이 생긴다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스파이더맨이 어벤저스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IP의 작동 방식 때문이다.

소니는 '주연 스파이더맨' 권리를 가졌다. 마블은 영화  Gross Proceeds의 5%를 확보했다. 소니는 캐릭터 설정에 대한 통제권을 계약서 문장 단위로 박아뒀다. 쪼개진 권리 하나하나에 값이 매겨져 있는 구조다.

권리를 쪼개면 쪼갤수록 각각의 조각이 별도의 자산이 된다. 영화화 권리, 드라마화 권리, 게임화 권리, 굿즈 권리, 테마파크 권리, 각 국가별 배급 권리, 그리고 이제는 스트리밍 권리까지. 하나의 IP가 수십 개의 수익원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그 쪼개진 권리마다 별도의 계약이 있고, 별도의 수익이 흐른다.

영화, 게임, 굿즈부터 스트리밍까지—계약서 조각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수익으로 이어지는 헐리우드 IP의 작동 방식
영화, 게임, 굿즈부터 스트리밍까지—계약서 조각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수익으로 이어지는 헐리우드 IP의 작동 방식

헐리우드가 IP를 대하는 방식이 이거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1조 원의 가치를 만들어낼 때, 그 수익은 넷플릭스로 갔다. 영화화 권리, 게임화 권리, 굿즈 권리, 속편 제작권. 이 모든 게 계약서 안에 이미 박혀 있었다. 제작사가 가져간 건 제작비와 마진뿐이었다.


한국 IP가 대박 나도 작가가 가난한 이유

반대편을 보면 한국 콘텐츠 산업의 구조가 보인다.

헐리우드에는 리지듀얼(Residual)이 있다. 잔여 수익 분배 시스템이다. 드라마가 재방영될 때, OTT에 팔릴 때, 해외에 라이선스될 때마다 작가와 배우에게 일정 비율의 수익이 돌아간다. 2023년 미국 작가 조합이 파업에 나선 이유도 이 리지듀얼이 스트리밍 시대에 제대로 정산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국은 이 구조가 없다. 웹툰 작가가 원작을 드라마화하면 판권료를 한 번 받는다. 그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 1억 명에게 팔려도 추가 수익이 없다. 계약 시점에 모든 게 끝난다.

스파이더맨은 'main character'라는 단어 하나가 수천억짜리 경계선을 만들었다. 한국 콘텐츠 계약서에는 그런 경계선이 없다. 판권료를 받는 순간 모든 수익권이 넘어간다.

IP를 쪼갤수록 자산이 된다. 그런데 쪼개려면 먼저 권리가 누구 것인지를 계약서가 정밀하게 정의해야 한다. 그 정의가 없으면 쪼갤 수조차 없다.

지금 한국 콘텐츠 IP가 글로벌에서 돈을 버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그 돈이 IP를 만든 사람에게 돌아오는 구조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약서가 자산의 운명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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