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픽사의 〈도리를 찾아서〉가 극장에 걸렸다.전 세계 박스오피스 약 10억 2,900만 달러. 대박이었다.
관객이 본 것은 도리의 바닷속 모험이었지만, 디즈니가 축적한 것은 흥행 성적만이 아니었다.
영화 속 바다와 물고기, 빛과 물결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제작기술이 실제로 검증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디즈니를 콘텐츠 회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디즈니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즈니에는 연구소가 있다.
DisneyResearch|Studios. 스위스 취리히에 기반을 둔 이 조직은 렌더링, 머신러닝, 모션, 영상처리, 후반작업 기술을 연구한다. 이들이 만드는 것은 영화의 소재만이 아니다. 콘텐츠를 더 빠르고, 싸고, 정교하게 만드는 제작 인프라다.

그리고 이 기술들은 논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서 얘기한 〈도리를 찾아서〉는 Pixar 장편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RenderMan의 Denoise를 사용한 작품이었다. 이 기술은 경로추적 렌더링에서 생기는 노이즈를 줄여, 더 적은 계산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영화는 콘텐츠이면서 동시에 디즈니의 연구개발 기술을 검증하는 거대한 테스트베드였던 셈이다.
디노이징 기술은 촬영된 영상의 잡티를 단순히 지우는 필터가 아니다. 3D 장면을 렌더링할 때 빛의 경로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노이즈를 머신러닝으로 제거하는 기술이다. 기존에는 깨끗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광선과 계산을 투입해야 했지만, 디노이저를 사용하면 적은 계산량으로도 최종 이미지에 가까운 결과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

디즈니는 영화 한 편을 팔고 끝나는 회사가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기술을 다음 영화, 다음 스튜디오, 다음 플랫폼에 다시 적용한다.
여기까지는 자체 기술로 제작 효율을 높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다음이다.
경쟁사가 흥행해도 디즈니가 돈을 버는 구조
디즈니는 워터마크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워터마크는 영상 위에 로고를 띄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콘텐츠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식별정보를 심고, 나중에 그 정보를 추출해 어떤 경로로 영화가 유출됐는지 추적하는 기술이다.
Disney Enterprises 명의의 미국 특허 'System and Method for Creating a Temporal-Based Dynamic Watermark'는 배포 환경이 바뀔 때마다 워터마크 정보도 바뀌는 방식을 다룬다. 어떤 기기에서, 어떤 경로로, 누가, 언제 유출했는지를 추적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 기술의 잠재 고객이 디즈니 본인 뿐만은 아니다. OTT, 방송사, 스포츠 중계사, 공연 스트리밍 사업자, 게임사. 이 기술을 라이선스해서 쓰는 회사가 많을수록 디즈니는 그 회사의 콘텐츠가 흥행하든 안 하든 기술 사용료를 받는다.
이게 핵심이다. 콘텐츠는 그 작품이 흥행해야 수익이 난다. 기술은 그 기술을 쓰는 회사가 많을수록 수익이 난다.
디즈니는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 촬영하는 인프라, 3D 파일의 표준, 유통망의 보안 기술까지 생태계의 모든 레이어를 소유하고 있다. 경쟁사가 흥행하든 망하든, 판 안에서 움직이는 한 디즈니의 기술 통행세를 피할 수 없다.
디즈니는 콘텐츠만 파는 회사가 아니다. 콘텐츠를 만들고 보호하고 유통하는 기술 시스템을 소유한 회사다.
디즈니는 아예 산업의 '표준'을 만든다
픽사(디즈니 2006년 인수)는 영화를 만들면서 3D 장면을 교환하고 구성하고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데이터 구조를 직접 개발했다. USD(Universal Scene Description)(2013년 SIGGRAPH에서 최초 발표)다. 픽사는 이걸 2016년에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그 결과가 흥미롭다. 지금 엔비디아는 USD를 Omniverse의 핵심 기술로 사용한다. 애플은 visionOS에서 USD를 3D 콘텐츠의 기본 언어로 채택했다. 어도비, 오토데스크, 에픽게임즈,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바이트댄스까지 표준화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2025년 12월에는 OpenUSD Core Specification 1.0이 공식 발표됐다.
픽사가 3D 세계를 구성하는 공통 언어를 먼저 만들어서 깔아놓은 것이다. 이제 3D 산업의 작업 방식은 픽사가 만든 구조 위에서 돌아간다. USD 자체는 오픈소스라 사용료를 직접 받는 구조는 아니지만, 생태계의 데이터 계층을 선점했다는 의미가 있다.

루카스필름(디즈니 2012년 인수) 산하 ILM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만달로리안〉에서 유명해진 StageCraft다. 대형 LED 월, 실시간 렌더링, 카메라 트래킹을 결합한 가상제작 기술인데, 배우가 녹색 벽 앞에서 연기하는 대신 촬영 순간 실제 LED 화면에 디지털 배경이 표시된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배경도 카메라 관점에 맞춰 실시간으로 변한다. ILM은 이 기술을 넷플릭스 〈The Midnight Sky〉 같은 외부 작품에도 맞춤형 서비스로 제공했다. 경쟁사가 드라마를 찍을 때 디즈니의 기술과 인력을 사서 쓰는 구조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 얘기인가
블랙핑크 얘기를 해보자.
2022년 〈Pink Venom〉은 공개 첫날 9,04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2025년 〈JUMP〉는 첫날 2,600만 회였다. 1억 조회수 도달에 〈Pink Venom〉은 30시간이 걸렸고, 〈JUMP〉는 14일 14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JUMP〉가 실패한 건 아니다. 공개 후 약 1년 만에 4억 조회수를 넘었고, Spotify에서는 발매 17일 만에 1억 스트리밍을 기록했다. 수요가 사라진 게 아니다. 패턴이 바뀐 것이다.
| MV | 공개 시점 | 최초 24시간 조회수 | 1억 조회수 도달 | 장기 누적(8월 말 현재) |
|---|---|---|---|---|
| 〈DDU-DU DDU-DU〉 | 2018 | 3,620만 회 | 10일 | 약 24억 회 |
| 〈Kill This Love〉 | 2019 | 5,670만 회 | 2일 14시간 | 약 22억 회 |
| 〈How You Like That〉 | 2020 | 8,630만 회 | 단기간 | 약 13.8억 회 |
| 〈Pink Venom〉 | 2022 | 9,040만 회 | 약 29시간 35분 | 약 10.95억 회 |
| 〈JUMP〉 | 2025 | 2,600만 회 이상 | 14일 14시간 | 약 4.23억 회 |
| 〈GO〉 | 2026 | 약 2,130만 회로 보도·팬 집계 | 현재 시점 미달성(발매 6개월차) | 약 9,200만 회 |
초반에 팬덤이 폭발적으로 조회수를 끌어올리던 구조에서, 장기간 글로벌 청취자가 꾸준히 소비하는 롱테일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유튜브 MV 하나에 집중되던 팬덤의 에너지가 Shorts, 직캠, TikTok, Spotify로 쪼개지고 있다.
이 변화가 지금 당장 위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10년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K팝 화력이 꺾일 때, 무엇이 남는가
지금 K팝 기획사들 중 일부는 자체 팬덤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 하이브의 위버스, SM의 버블. 그런데 이건 팬과 아티스트를 연결하는 채널이지, 산업이 쓸 수밖에 없는 기술 인프라가 아니다.
디즈니처럼 음원·영상 제작 인프라를 소유하고, 3D 버추얼 IP 제작 표준을 선점하고, 저작권 추적과 팬 데이터 솔루션을 B2B로 파는 기획사가 있는가.
K팝 기획사들은 콘텐츠는 만들지만 그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은 외주를 준다. MV는 제작사가 만들고, 음원 유통은 플랫폼이 하고, 팬 플랫폼은 별도 서비스를 쓴다.
이 구조에서 K팝 화력이 꺾이면 어떻게 되는가. 앨범 판매, 공연, MD 매출이 동시에 줄어든다. 반면 디즈니는 자사 영화가 부진한 해에도 기술 서비스, 테마파크, 스트리밍 구독이 작동한다.
기획사가 당장 기술 회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기술에 투자하는 기획사와 그렇지 않은 기획사의 차이는 지금 드러나지 않는다. K팝 화력이 꺾이는 시점에 드러난다.
디즈니는 콘텐츠가 잘 팔릴 때 기술을 만들었다.
지금 K팝이 잘 팔리고 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 다룬 IP 자산화에 대해 더 깊이 다룬 리포트를 bizkit.ai.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