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롤렉스는 시계를 팔지 않는다

원문: <The Brand Age>

2026.07.29 |
from.
비즈쿠키

Editor: Alex

 

브랜드의 시대입니다.

 

누구나 브랜드를 만들고, 또 소비합니다.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법을 일러주는 '브랜딩 전문가'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회사들에 투자해온 폴 그레이엄은 오히려 브랜드를 피하라고 말합니다. 브랜드에는 본질이 없다고요.

 

오늘 소개할 글은 브랜드의 정점이라 할 명품 시계의 역사를 통해, 브랜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위험을 품게 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에디터 픽!


  • 스위스가 그동안 승리하고자 치열하게 싸워온 경기 판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라는 한때 비쌌던 가치가 이제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범용 상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 브랜드란 제품 간의 실질적인 차이가 모두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남는 무엇이다.

 

  • 브랜딩은 단순히 좋은 디자인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하는' 관계다. 브랜딩은 정의상 독창적이고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이나 과학처럼 좋은 디자인은 '정답'을 추구하며, 정답은 결국 하나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 한 가지 명확한 교훈은 브랜드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브랜드를 '구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판매'하는 일 역시 피하는 것이 좋다.

 

  • 브랜드 같은 본질 없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동시에, 당신을 자동으로 황금기로 인도해 줄 단 하나의 원칙이 존재한다. "문제를 쫓아가라."

 

에세이

본 아티클은 <The Brand Age>의 내용을 번역 및 편집한 글임을 밝힙니다.


1970년대 초, 스위스 시계 산업에 대재앙이 닥쳤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를 '쿼츠 파동(Quartz Crisis)'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악재 세 가지가 한꺼번에 터진 복합적 대참사였다.

 

첫 번째 악재는 일본의 거센 추격이었다. 스위스는 1960년대 내내 일본을 주시해 왔고, 일본의 발전 속도는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1968년 제네바 천문대 콘테스트에서 일본이 기계식 시계 부문 상위권을 싹쓸이하자 스위스 업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스위스인들도 다가올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수년간 일본은 더 저렴한 시계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뛰어난 시계까지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스위스 시계의 가격이 대폭 뛰어오를 악재까지 겹쳤다. 1945년 이래 전 세계 주요 통화 환율을 고정해 온 브레턴우즈 체제는 스위스 프랑 환율을 1프랑당 0.228달러라는 인위적으로 낮은 수준에 묶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자 프랑화 가치는 폭등했다. 1978년 프랑화 가치는 0.625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는 미국인 입장에서 스위스 시계 구매 비용이 2.7배나 급등했음을 의미했다. 

 

해외 경쟁사의 거센 추격과 자국 통화를 보호해주던 환율 우위의 상실, 이 두 가지 악재만으로도 쿼츠 무브먼트가 없었더라도 스위스 시계 산업은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타를 날린 것은 결국 쿼츠 무브먼트였다. 이제 스위스가 그동안 승리하고자 치열하게 싸워온 경기 판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라는 한때 비쌌던 가치가 이제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범용 상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초 사이에 스위스 시계의 판매량은 3분의 2 가까이 급감했다. 대다수 스위스 시계 제조사는 부도 위기에 몰리거나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 타사에 매각되었다. 하지만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기업이 독립회사로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남은 비결은 스스로를 '정밀 기기 제조업체'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재정의하여 체질을 완전히 바꾼 덕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계식 시계라는 물건의 본질 역시 변했다. 가장 비싼 시계는 예나 지금이나 고가였지만, 그 시계가 왜 비싼지, 그리고 구매자가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1960년의 고가 시계가 비쌌던 이유는 순전히 제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구매자가 얻은 대가는 그 크기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계시 장치였다. 그러나 오늘날 시계가 비싼 이유는 브랜드들이 광고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공급을 제한하려 온갖 기교를 부리기 때문이며, 구매자가 얻는 대가는 그저 비싼 지위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대단히 수익성 높은 사업임이 입증되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은 과거처럼 뛰어난 엔지니어링 기술을 팔 때보다, 브랜드를 팔고 있는 지금 아마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매출액 기준 스위스 시계 판매 그래프를 보면, 판매 수량 그래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대신 매출 수치는 한동안 평탄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살아남은 시계 제조사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로켓처럼 솟구쳐 오른다.

 

시계 제조사들이 판의 새로운 규칙을 파악하는 데는 약 20년이 걸렸다.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완벽한 변신을 이뤄낸 이들의 사례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인 '브랜드'를 이해하는 최적의 케이스 스터디이기 때문이다.

 

브랜드란 제품 간의 실질적인 차이가 모두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남는 무엇이다. 그런데 제품 간의 실질적인 차이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기술이 본래 지향하는 방향이다. 따라서 스위스 시계 산업에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흥미로운 일회성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우리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이야기다.

 

예거 루쿨트르 웹사이트에는 현재 컬렉션 중 하나가 "시계 제조 황금기의 고전적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 문구를 통해 그들은 오늘날 모든 시계 제조사가 잘 알고 있지만 차마 노골적으로 외치지 못하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간에, 적어도 지금이 황금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예거 루쿨트르 웹사이트, 출처: 예거 루쿨트르>
<예거 루쿨트르 웹사이트, 출처: 예거 루쿨트르>

 

시계 제조의 황금기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였다. 전쟁의 혼란을 딛고 스위스가 정점에 올라선 시점부터,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 가지 대재앙이 덮치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황금기에 시계 제조사들이 무엇보다 열망했던 두 가지 가치는 바로 '얇음'과 '정확성'이었다.

 

실제로 이는 시계 제조에서 가장 본질적인 트레이드오프 관계였다. 시계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시계를 개선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휴대하기 더 편하게 만들거나, 시간을 알려주는 본연의 성능을 더 높이는 것이다.

 

당연히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황금기에는 얇음이 그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가치 있게 평가받았다. 회중시계 시절에도 최고급 시계 제조사들은 시계를 가능한 한 얇게 만들고자 몰두했다. 값싸고 두꺼운 회중시계는 '순무'라 불리며 조롱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남성용 시계가 손목으로 옮겨가자, 얇음에 대한 요구는 한층 더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얇음을 달성하는 것은 정확성을 확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황금기에 더 비싼 시계를 가르는 핵심 기준은 바로 이 '얇음'이었다.

 

시계 제조사들이 다른 시대에 추구했던 가치가 하나 더 있다. 보통의 방식 이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문페이즈(달의 변화)를 보여주거나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그렇다. 업계에서는 이를 '컴플리케이션'이라 부른다. 19세기에 유행했고 지금 다시 유행하고 있지만, 실용적인 컴플리케이션 하나(날짜 표시)를 제외하고 황금기에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모든 황금기가 그러하듯, 이 시기 최고급 시계 제조사들은 핵심적인 트레이드오프에 전념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를 경이롭게 해냈다. 황금기 최고 시계들이 지닌 정갈한 완벽함은 이후 그 어떤 시계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며, 앞으로 설명할 이유 때문에 아마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황금기 가장 명성 높은 3대 브랜드는 흔히 '하이엔드 3대장'이라 불리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였다.

<하이엔드 3대장, 출처: SwissWatchExpo>
<하이엔드 3대장, 출처: SwissWatchExpo>

 

이들의 명성은 거품이 아니었다. 정교한 기술과 뛰어난 만듦새로 그 지위를 스스로 쟁취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들은 명성과 성능이라는 두 축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이후 20년 동안 그들이 깨달은 것은, 한쪽 축에 모든 무게를 실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계 제조사들이 역사적으로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두 가지 목표 중 그 어느 것에서도 더 이상 승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쿼츠 무브먼트는 그 어떤 기계식 무브먼트보다 정확할 뿐만 아니라, 더 얇기까지 했다.

 

3대 브랜드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또 다른 축(명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다수 유명 스위스 시계 제조사들은 오직 성능만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업들 중 단 한 곳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

 

오메가는 해서는 안 될 대응이 무엇인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오메가는 스위스 시계 제조사 중 단연 '엔지니어 외길'을 걷던 기술 집단이었다. 그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한 시계를 만들었지만, 럭셔리 브랜드가 된다는 생각에는 아무리 잘 봐줘야 미온적이었다. 일본이 스위스만큼 정확한 무브먼트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오메가는 오메가다운 방식으로 맞섰다. 더 정확한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968년 진동수를 45% 높인 새로운 무브먼트를 선보였다. 이론상으로는 더 정확해져야 했으나, 이 신형 무브먼트는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내구성이라는 자신들의 명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심지어 더 뛰어난 쿼츠 무브먼트를 만들려고도 시도했으나, 그 길의 끝에는 출혈 경쟁 밖에 없었다. 1981년에 이르러 오메가는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고 채권자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파텍 필립은 반대 접근법을 취했다. 오메가가 무브먼트를 재설계하는 동안, 파텍은 케이스를 재설계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케이스를 비로소 직접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케이스 디자인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스위스 시계 산업이 얼마나 기이한 구조였는지 짚고 넘어가보자. 시계 산업은 규제로 단단히 묶여 있는 소규모 전문 기업들의 네트워크 형태였다. 우리가 편의상 시계 제조사라고 부르던 기업들은 이 네트워크에서 소비자에게 보이는 최전선에 불과했다. 하이엔드 3대장조차 케이스를 직접 디자인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브먼트조차 대부분 직접 만들지 않았다.

 

1968년, 파텍 필립은 케이스 디자인의 중심축을 이동시킨 새로운 시계를 출시했다. 이번에는 자신들이 직접 디자인을 그려 케이스 제조사에 가져가 "우리에게 이것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골든 엘립스'라는 강렬한 신모델이었다. 약간 혼란스럽게도 이 시계는 완전한 타원형이 아니었다. 새 케이스는 오늘날 UI 디자이너들이 '라운드 렉트'라고 부르는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에 가까웠다. 이 새로운 시계 라인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성공을 넘어, 이것은 미래의 판도를 바꾼 이정표가 되었다. 

<파텍 필립의 골든 엘립스, 출처: Collectability>
<파텍 필립의 골든 엘립스, 출처: Collectability>

 

단순히 독특한 케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이 어떻게 그토록 중요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시계 전체를 '브랜드의 표현 도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황금기 최고 시계들의 문제는 아무도 그 브랜드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몇 인치 이내로 바짝 다가가지 않는 한, 최고의 제조사들이 만든 시계는 모두 똑같아 보였다. 미니멀리즘이란 본래 그렇다. 정답이 딱 하나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황금기의 시계들은 지금 기준으로는 알이 매우 작았다. 시계 제조사들은 수세기에 걸쳐 크기를 줄이는 데 매진해 왔고, 1960년대에 이르러 그 기술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따라서 한 최고급 브랜드를 다른 브랜드와 구분해 주는 유일한 요소는 다이얼에 인쇄된 이름뿐이었는데, 다이얼 자체가 너무 작다 보니 브랜드 이름 역시 아주 미세했다. 황금기 3대 브랜드 시계에 적힌 제조사 이름의 높이는 0.5mm에서 0.75mm에 불과했다. 파텍은 케이스 전면에 손을 댐으로써 브랜드의 면적을 8제곱밀리미터에서 800제곱밀리미터로 무려 100배나 확장한 것이다.

 

한 세기 동안 속삭이기만 하던 브랜드 이름을 왜 갑자기 크게 외치기로 결정했을까? 성능으로는 더 이상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브랜드에 더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는 대가가 따르며, 케이스를 브랜드화한 이 초기 사례에서도 그 대가를 확인할 수 있다. 골든 엘립스는 외관이 나쁘지 않다. 디자이너들이 모든 것을 라운드 렉트로 바꾸던 1970년대에는 훨씬 더 멋져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골든 엘립스는 케이스 디자인의 진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든 시계가 라운드 렉트 모양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계 제조사들은 회전하며 원을 그리는 장치에 가장 최적화된 케이스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태엽을 감기 위해 시계 옆면에 달린 용두의 최적 형태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텍은 엘립스의 독특한 실루엣을 강조하기 위해 용두를 지나치게 작게 만들었고, 그 결과 태엽을 감기가 짜증 날 정도로 불편해졌다.

 

따라서 이 초기 사례에서도 우리는 브랜드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브랜딩은 단순히 좋은 디자인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하는' 관계다. 브랜딩은 정의상 독창적이고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이나 과학처럼 좋은 디자인은 '정답'을 추구하며, 정답은 결국 하나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브랜딩은 원심적이고, 디자인은 구심적이다.

 

물론 약간의 여지는 존재한다. 특히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은 수학처럼 정답이 칼처럼 명확하게 잘라 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시도가 반드시 나쁜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력을 피할 수 없듯, 브랜딩과 디자인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 역시 피할 수 없다.

 

실제로 브랜딩과 디자인의 충돌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우리가 보통 '디자인'이라 부르는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확장된다. 종교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관찰된다. 특정 종교의 신도들이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고유한 관습을 갖게 만들고 싶다면, 편리하거나 합리적인 행동을 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따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도들을 확실히 구분 짓고 싶다면,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디자인을 다른 것과 차별화하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좋은 선택을 내린다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 선택을 내릴 것이다.

 

브랜딩과 좋은 디자인을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딱 두 가지다. 첫째, 미술처럼 가능성의 공간이 엄청나게 넓은 경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었다. 만약 벨리니나 레오나르도만큼 뛰어난 화가가 100만 명이나 있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그런 인물은 열 명 남짓에 불과했기에 서로 영역이 침범당할 일이 거의 없었다.

 

브랜딩과 좋은 디자인이 결합할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은, 그 가능성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미개척 상태일 때다. 어떤 새로운 영토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라면, 정답을 찾아냄과 동시에 그것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고 선점할 수 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렇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정답을 찾았다면 타인의 디자인은 결국 당신의 것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신의 브랜드 우위는 점차 약화될 것이다.

 

시계 디자인이라는 공간은 미개척 분야도 아니며 그렇다고 엄청나게 넓지도 않다. 따라서 브랜딩은 좋은 디자인을 희생시켜야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파텍 필립이 브랜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계를 만드는 전략이 통할지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전략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매출 측면에서 볼 때, 그 전략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고객들이 중간에서 부응해 주어야만 했다. 파텍은 모든 고객이 시계의 성능, 즉 정확성과 얇음 때문에 시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일부 고객은 단지 비싸다는 이유로 시계를 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고객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디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텍은 과거 하이엔드 3대장이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행보를 보였다. 바로 브랜드 광고였다. 그리고 그 광고에서 그들이 강조한 것은 자신들의 시계가 얼마나 '비싼가' 하는 점이었다. 1968년 파텍의 한 광고는 "왜 당신이 아마도 한 달 수입의 절반에 달하는 금액을 지출하여 투자해야 하는가"를 설명했다.

 

광고는 이렇게 이어졌다. "다른 모든 파텍 필립 시계와 마찬가지로, 이 얇은 모델 역시 전 과정이 수공업으로 완성됩니다. 파텍 필립은 제조 비용이 가장 비싼 시계이기에 생산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의 저명한 보석상에 전달되는 수량은 하루 단 43장에 불과합니다."

 

이 광고가 초기 광고라는 점은 여전히 '얇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정확성'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파텍은 그 싸움에서는 이미 패배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1970년 오데마 피게는 저명한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에게 브랜드의 상징이 될 새로운 시계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과감하게도 소재를 '스틸'로 선택했다. 1972년에 출시된 그 결과물이 바로 '로열 오크'였다.

 

오데마 피게의 광고 역시 고가의 가격을 한층 더 파격적으로 강조했다. "골드 가격으로 선보이는 스틸"이라는 문구로 광고는 시작되었다. "보고 계신 제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인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입니다. 이 시계를 금보다 더 귀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 사라져 가는 명장 시계제조사들의 손길로 투입된 시간입니다." 광고 하단에서 그들은 전통적인 공식을 뒤엎고, 자신들의 시계를 "35,000달러 이상부터"라고 표현했다.

<오데마 피게의 1972년 로열 오크 광고, 출처: AP Chronicles>
<오데마 피게의 1972년 로열 오크 광고, 출처: AP Chronicles>

 

로열 오크는 브랜드에 할애된 표면적 면적에서도 진일보를 이루었다. 골든 엘립스가 시계 다이얼을 브랜드의 표현으로 바꾸었지만 가죽 스트랩이나 일반 팔찌를 사용했던 반면, 로열 오크는 시계 다이얼과 금속 브레이슬릿을 하나로 통합하여 손목 전체를 둘러싸며 디자인을 완성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를 보고 계십니다"라는 메시지를 표면의 단 1제곱밀리미터도 빠짐없이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객들은 이 새로운 접근법을 받아들였을까? 초기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하이엔드 3대장의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0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새로운 메시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존재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메시지를 계속 유지한다면 그 수는 늘어날지 몰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로열 오크의 성공에 자극받은 파텍 필립은 1974년 제랄드 젠타에게 비슷한 시계의 디자인을 의뢰했다. 로열 오크의 디자인이 선박의 현창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이 신형 시계의 디자인 역시 선박의 현창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름은 '노틸러스'였으며, 1976년 바젤 시계 보석 박람회에서 공개되었다.

 

노틸러스에 이르러 우리는 브랜딩과 디자인이 지닌 양립 불가능성을 명확하게 목도하게 된다. 이 시계는 거대했다. 황금기 정점 시절 가장 비싼 남성용 시계의 지름은 보통 32mm에서 33mm였다. 그러나 노틸러스는 42mm에 달했다. 거대했을 뿐만 아니라, 다이얼 양옆에는 귀 모양처럼 불필요한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방 건너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오늘날 파텍이 만드는 모든 시계 중 노틸러스는 가장 열광적인 수요를 자랑한다. 현재의 구매자들이 원하는 바, 즉 가장 크고 노골적인 브랜드의 표현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6년 당시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디자인이었다. 1976년 기준으로는 여전히 과한 면이 있었다.

 

마침내 파텍의 운명을 반전시킨 시계는 또 다른 상징적 디자인인 '홉네일 칼라트라바'였다. 홉네일 칼라트라바는 작은 피라미드 모양의 스파이크 장식이 둘러져 있어 붙은 이름이었다. 그 장식만으로도 시계를 독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홉네일 장식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황금기의 드레스 워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홉네일 칼라트라바는 파텍 필립의 광고 대행사 대표였던 르네 비텔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 아니었다. 수년간 많은 시계 제조사가 케이스를 홉네일 패턴으로 장식해 왔으며, 파텍 역시 1968년부터 홉네일 모델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4년 비텔은 파텍의 필립 스턴 회장에게 제안했다. 이 디자인을 표준 디자인으로 확립한다면, 대중의 머릿속에 이 형태를 파텍 브랜드와 각인시키는 광고 캠페인을 만들겠노라고.

 

이 전략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탄생한 시계인 '3919'는 80년대와 90년대 뉴욕 투자은행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뱅커스 워치'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시점까지 파텍은 쿼츠 시계를 함께 만들고, 광고를 통해 "화려한 케이스에 담긴 쿼츠 시계도 기계식 시계만큼 제작에 많은 공이 들어간다"며 방어적인 주장을 펼치는 등 위험을 분산하고 있었다.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 3919 모델, 출처: Watches of Knightsbridge>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 3919 모델, 출처: Watches of Knightsbridge>

 

그러나 투자은행가들은 완벽한 기계식 스토리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심지어 자동 태엽 기능조차 필요 없었다. 3919는 수동으로 태엽을 감는 방식이었다. 상관없었다. 파텍은 쿼츠 무브먼트에 대한 언급을 중단했다. 그리고 70년대 초 이후 제자리걸음을 하던 그들의 매출은 1987년에 이르러 명확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요인이 비텔의 탁월한 광고 기술이었는지, 아니면 수용적인 고객층이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투자은행가들을 알고 지냈던 사람으로서, 나는 고객층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이들은 바로 '야피(Yuppy)'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주역들이었다. 사치스러운 소비는 그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부를 과시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었을 것이다. 만약 비텔이 10년만 일찍 똑같은 메시지를 던졌다면,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원인이 무엇이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수치가 마침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였기 때문이다. 약 1985년까지만 해도 기계식 시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했다. 그러나 1990년에 이르자 명확해졌다. 비싸고, 브랜드가 명확히 드러나며, 기계식임이 선명하게 노출되는 시계를 지위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관습이 1990년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한 것이다. 

 

구시대의 기술이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채택되는 일은 흔치 않다. 왜 하필 기계식 시계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손목시계야말로 과시를 위한 가장 완벽한 매개체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손목 위보다 더 좋은 위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과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목걸이를 착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투자은행가들에게 그런 장신구는 사회적으로 다소 부적절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거친 야망가들이었을지언정 마피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금시계만큼 완벽하게 정당성을 부여받은 물건은 없었다. 회사의 회장조차 쿼츠 시계가 존재하기도 전인 20년 전 아내가 선물한 금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었다. 부를 과시하고자 하는 압박이 어디에선가 터져 나와야 했다면, 바로 이 장소가 적격이었다. 

 

적어도 남성들에게는 그러했다. 여성들은 기계식 시계를 차는 아이디어에 선뜻 호응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유한 여성들은 쿼츠 무브먼트가 탑재된 까르띠에 탱크를 차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증기기관 구매자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과 일부 같은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이제 비싼 기계식 시계가 남성들에게는 '사실상의 보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이미 진짜 보석을 착용할 수 있으므로 굳이 대리 보석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기계식 시계가 '충분히 정확해야 한다'는 점은 필수적이었다. 신형 3919의 오차는 하루 5초 이내였다. 이는 쿼츠의 정확성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가장 값싼 대량생산 쿼츠 시계조차 하루 0.5초 이내의 오차를 자랑했고, 최고급 쿼츠는 1년에 3초 수준이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그 정도의 극단적인 정확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기계식 시계의 오차가 하루 1분에 달했다면,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에서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늘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를 차는 것은 명백히 '럭셔리'하지 않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하루 5초의 오차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는 브랜드와 품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제품을 사는 이유가 '브랜드'로 전환된다고 해서 품질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품질이 작동하는 방식이 변할 뿐이다. 품질은 일종의 '최소 기준선'이 된다. 더 이상 제품을 팔리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일 필요는 없다. 제품을 파는 것은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다만 브랜드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훌륭해야 한다. 브랜드가 자신의 캐릭터를 깨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계 제조사들에게 야피의 등장은 그들을 구원해 준 행운이었다. 어쩌면 꼭 행운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야피가 대변했던 시장의 진화는 이후 더욱 거세게 지속되었고, 시계 제조사들은 싫든 좋든 그 흐름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홍콩과 두바이의 구매자들을 위해 거대하고 화려한 시계를 만들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시장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조사들은 현재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브랜드와 디자인 사이의 비교적 미묘한 갈등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이제는 디자인을 향한 '전면전'으로 치달은 셈이다.

 

기계식 시계 제조의 현재 시대는 아직 전용 명칭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명확하다. 바로 '브랜드 시대(Brand Age)'다. 황금기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졌고, 1970년부터 1985년까지의 쿼츠 파동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1985년 이래로 우리는 줄곧 브랜드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브랜드 시대는 비단 시계 업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최초도 아니다. 순수 미술 분야는 이미 1930년대 '바 캐논(Barr canon, 알프레드 바의 현대미술 체계)'이 확립된 이래 그들만의 브랜드 시대를 지나왔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현상을 목도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기에, 브랜드 시대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시간을 내어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지금의 상황은 황금기와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다를까? 그 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임머신을 타고 황금기에서 온 누군가가 오늘날 이곳에 내려왔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화려한 쇼핑가를 거닐 때 그가 가장 먼저 눈채어챌 사실은, 황금기의 이름난 모든 시계 제조사가 그 어느 때보다 번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옛날처럼 시계를 팔기 위해 보석상에 의존하는 대신,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건재할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독립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착시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어두운 시절을 독립 회사로 버텨낸 시계 제조사는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단 세 곳뿐이다. 나머지 모든 브랜드는 기계식 시계가 남성용 럭셔리 액세서리로 제2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이 명확해지자, 이들을 부활시킨 6개의 지주회사 소유로 넘어갔다.

 

지금의 시계 회사들은 개별 기업이라기보다는 미국 3대 자동차 제조사에 통폐합된 브랜드들과 비슷하다. 부모 기업이 시장의 서로 다른 세그먼트를 공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론진은 더 이상 오메가와 경쟁하지 않는다. 두 브랜드를 모두 소유한 지주회사가 론진에 더 낮은 등급의 시장을 할당했기 때문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가 IWC나 예거 루쿨트르 부티크, 나아가 몽블랑이나 까르띠에 부티크와 그토록 닮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들 모두가 동일한 기업(리슈몽 그룹) 소유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의류 브랜드도 이와 비슷하다. 어느 도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쇼핑가를 지날 때 수많은 서로 다른 브랜드의 매장처럼 보이는 곳들은, 실제로는 손에 꼽을 정도의 소수 대기업 소유다.

 

이러한 쇼핑가가 그토록 건조하고 생기 없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 한 명의 개발자가 조성한 단조로운 외곽 신도시처럼, 인위적일 정도로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 여행자가 이 매장들의 진열창을 들여다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계들의 거대한 크기일 것이다. 이는 그에게 큰 충격을 줄 텐데, 황금기에는 물론 그 이전 수세기 동안 '크다'는 것은 곧 '값싸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황금기 고급 남성용 시계는 지름 33mm에 두께 8mm 정도였다. 반면 오늘날의 고급 시계는 지름 42mm에 두께 10mm에 육박하며, 전체 부피는 두 배 이상이다. 명백히 최고급 매장으로 보이는 진열창 안에서 값싸 보이는 시계들을 목도하는 것은 우리 방문객에게 심한 경악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다.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도구'에서 '브랜드를 알리는 도구'로 전환되면서, 자신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크기를 키운 것이다. 그리고 비단 크기뿐만 아니라 형태 역시 변했다. 시간 여행자가 알아차릴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브랜딩의 원심력이 작용하면서 탄생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기이한 케이스 형태와 어색하게 튀어나온 돌기들이다.

 

그는 대체 파네라이 시계의 용두에 달린 그 거대한 보호 장치가 무슨 용도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대체 시계로 무슨 짓을 하기에 용두를 그토록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용두 보호 장치 위에 등록 상표임을 알리는 문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던 황금기에서 온 사람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상상해 보라.

 

이 기이하고 육중한 시계들의 배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는, 이내 또 다른 패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시계들 중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가, 자신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던 특정 브랜드의 육중한 시계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롤렉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롤렉스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황금기 시절부터 브랜드 시대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회사 설립 초기에는 시계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공을 들였지만, 그들은 "1950년대 말 제네바와 뇌샤텔 천문대 경연 참가를 중단"했고, 1960년 무렵부터는 "기계식 시계 제조 연구를 사실상 중단"했다.

 

그 이유가 게을러져서가 아니라, 시계를 '지위의 상징'으로 마케팅하는 것이 매출을 더 빠르게 올리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 내내 이것이 그들의 주안점이 되었고, 10년 뒤 쿼츠 파동이 덮쳤을 때 롤렉스의 고객들은 이미 '그것이 롤렉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만 있다면 내부가 어떻게 생겼든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들'로 선별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분야에서 다른 시계 제조사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파텍 필립과 오데마 피게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얻고자 몸부림치던 것, 즉 '제조사의 브랜드를 즉각적으로 선언하는 케이스 디자인'을 롤렉스는 이미 1940년대에 확보하고 있었다. 롤렉스 특유의 외관은 유기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단 완성되자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파했다. 실제로 그들은 이 외관을 시계의 핵심 기능 중 하나로 내세웠다. 1960년대 롤렉스의 한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통금 덩어리를 깎아 만든 롤렉스만의 클래식한 형태는 회의 탁자 저편 끝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롤렉스는 두 가지 차원 모두에서 시대를 앞서갔다. 그들의 케이스는 눈에 잘 띌 뿐만 아니라, 적어도 황금기 기준으로는 '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영리한 마케팅의 결과가 아니라, 방수 시계를 만들겠다는 창업자 한스 빌스도르프의 집착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방수성은 롤렉스 오이스터의 존재 이유였다. 오이스터 같은 시계는 지프 차량처럼 튼튼하게 설계되었다. 황금기 시계 디자인에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했다. 한쪽 끝에는 두껍고 튼튼하며 주로 스틸로 만들어진 '툴 워치'가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얇고 우아하며 주로 금으로 만들어진 '드레스 워치'가 있었다. 그러나 롤렉스는 그 경계를 허물었다. 두껍고 튼튼한 시계를 만들면서 스틸뿐만 아니라 '금'으로도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일종의 '럭셔리 지프'가 탄생했다. 이 단어가 머릿속에서 어떠한 울림을 주지 않는다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라.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 즉 SUV이기 때문이다. 시계에 일어난 일은 자동차에 일어난 일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우리의 시간 여행자가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포르쉐 카이엔을 보고, 그것이 포르쉐 911을 연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가짜 오프로드 차량'임을 알아차린다면, 그가 방금 본 시계들을 보고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시간 여행자가 파텍 필립 부티크에 걸어 들어가 실제로 노틸러스를 구매하려고 시도한다면,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계를 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텍에서 그는 브랜드 시대의 가장 극단적인 현상인 '인위적 희소성'과 직면하게 된다. 노틸러스는 돈이 있다고 그냥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위 등급의 다른 모델들을 먼저 구매하며 수년에 걸쳐 충성심을 증명해야 하고, 그러고 나서도 대기자 명단에서 수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파텍 필립 부티크, 출처: Noblesse>
<파텍 필립 부티크, 출처: Noblesse>

 

명백히 이 전략은 더 많은 시계를 팔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시계가 리셀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매장 소매가를 지지해 주는 역할도 한다. 희소성을 이용해 매출을 올리는 회사는 희귀 모델이 리셀 시장에 지나치게 많이 유출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희소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상태는 시계판 '탄소 포집'과 같다. 시계를 산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 시계를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장 상황을 이 이상적인 상태로 몰아가기 위해 파텍은 판매의 양방향을 모두 쥐어짠다. 그들은 희귀 모델로 가는 길을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너무나 혹독하고, 비합리적이며,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되팔이들을 솎아낸다. 진짜 팬만이 이 과정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위 등급 시계들은 파텍이 공급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리셀 시장에서 매장가보다 낮게 거래된다. 따라서 되팔이 목적의 구매자는 시계를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수년간 손해를 보는 구매를 지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시스템을 뚫어내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파텍의 대응책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자신들의 시계를 팔고 있는지 리셀 시장을 철저히 감시한다. 경매 매물에는 보통 시리얼 번호가 포함되어 있어 추적이 쉽지만, 필요한 경우 리셀 시장에서 직접 자사 시계를 되사들여 시리얼 번호를 확인하고 유출 경로를 추적한다. 그들이 일년에 사들이는 자사 시계만 수백 차례에 달한다. 그리고 원치 않는 리셀을 한 고객이 적발되면, 단순히 그 고객과의 거래만 끊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특정 판매점(리테일러)의 고객들에게서 이러한 유출이 너무 자주 발생하면, 해당 판매점과의 계약 전체를 파기해 버린다. 이러니 판매점들 역시 파텍을 도와 구매자들을 감시하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리셀 시장으로의 유출을 완벽히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고객이라도 일정 비율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사실 파텍 입장에서도 리셀 시장이 계속 존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리셀 시장이야말로 그들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최상위 모델의 공급을 얼마나 빠르게 늘려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귀중한 정보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상위 모델의 희소성은 다른 모든 모델의 구매를 견인하므로, 리셀 시장에 흘러들어간 최상위 시계들은 언제나 매장 소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어야만 한다.

 

파텍은 공급을 늘릴 때 분명 커다란 안전율을 둘 것이다. 만약 이 시계들의 리셀 가격이 소매가에 가까워지면 가격 폭락 직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며, 사람들이 이 시계를 투자 자산으로 구매하는 지금 상황에서 이는 자산 거품 붕괴와 같은 치명적인 연쇄 파급 효과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산 거품 붕괴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자산 거품의 붕괴'가 되는 것이다. 엘리트 시계 제조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비즈니스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지속되는 자산 거품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것.'

 

이는 내가 이른바 '빗어넘긴 머리 효과(comb-over effect)'라 부르는 현상의 전형적인 예다. 하나하나 볼 때는 사소한 일련의 변화들이 쌓여, 약간 어색했던 상태를 어느덧 기괴하게 잘못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현상이다. 파텍이 이 전체 구조를 한 번에 기획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이 기이한 지점을 보라. 황금기 시절 파텍 필립을 사는 방법은 보석상에 가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파텍은 자산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고객들을 감시하고 경찰처럼 단속하고 있다.

 

브랜드 시대에 대해 내가 느낀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 '순수한 기괴함'이다. 독립된 것처럼 보이고 전용 매장까지 갖추고 있지만 알고 보면 몇몇 지주회사의 소유에 불과한 콤비 시계 브랜드들. 시계를 더 작게 만들고자 했던 500년의 기술적 진보를 역행하는 거대하고 어색한 형태의 시계들. 변절한 고객을 잡기 위해 리셀 시장에서 자사 시계를 되사들여야만 하는 비즈니스 모델. 그리고 '변절한 고객'이라는 개념 그 자체.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기괴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기괴한 단 하나의 이유는, 형태가 따라가야 할 '기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금기가 끝날 때까지 기계식 시계는 필수품이었다. 시간을 알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제약 조건은 시계와 시계 산업 모두에 의미 있는 형태를 부여했다. 황금기에도 독특하게 생긴 시계들이 분명 존재했다. 모든 시계가 아름답고 미니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금기 시계 제조사들이 기이한 외형의 시계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인 연습으로서 그런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브랜드 시대의 시계들이 기괴해 보이는 이유는 그런 의도 때문이 아니다. 브랜드 시대의 시계들이 기괴해 보이는 이유는 아무런 실용적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능은 오직 '브랜드를 표현하는 것'뿐이며, 그것이 일종의 제약 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깨끗하고 순수한 종류의 제약은 아니다.

 

브랜드가 강요하는 제약은 결국 인간 심리의 가장 안 좋은 단면들에 의존한다. 따라서 오직 브랜드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세상은 괴기스럽고 부조리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수 있는 어떠한 교훈이나 가르침이 있을까?

 

한 가지 명확한 교훈은 '브랜드'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브랜드를 '구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판매'하는 일 역시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비록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 확신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브랜드 자극 버튼을 누르는 것은 결코 매력적인 문제가 아니며, 좋은 문제 없이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어렵다.

 

더 미묘한 교훈은, 각 분야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모든 분야에는 황금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존재하며, 당신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확률은 상승 기류를 타고 있는 분야에 있을 때 훨씬 더 높아진다.

 

물론 황금기가 진행 중일 때 사람들은 그것을 황금기라 부르지 않는다. '황금기'는 언젠가 그 시대가 끝난 후 후대의 사람들이 붙이는 명칭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기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환경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운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보통은 실수일지 몰라도, 이 경우만큼은 예외다.

 

당시 현장에서 느껴지는 황금기의 실체란, 단지 똑똑한 사람들이 흥미로운 문제에 몰두하여 하드워크를 하고 성과를 내고 있는 상태, 딱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최적화하는 것은 도리어 과적합에 불과하다.

 

사실 브랜드 같은 본질 없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동시에, 당신을 자동으로 황금기로 인도해 줄 단 하나의 원칙이 존재한다.

 

"문제를 쫓아가라(Follow the problems)."

 

황금기를 찾는 방법은 황금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다. 황금기를 발견하는 방법, 즉 역대 거의 모든 황금기의 주인공들이 그것을 발견했던 방법은 바로 '흥미로운 문제를 쫓아가는 것'이었다. 당신이 똑똑하고, 야망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정직하다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안목'보다 더 뛰어난 나침반은 없다.

 

흥미로운 문제가 있는 곳으로 가라. 그러면 아마 다른 똑똑하고 야망 있는 이들 역시 이미 그곳에 모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사람들은 당신들이 함께 이뤄낸 일들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황금기'라 부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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