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디올이 테크 기업의 미래인 이유

원문: <The future technology company won't look like a startup. It will look like Dior>

2026.10.07 |
from.
비즈쿠키

Editor: Alex

 

예상은 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1년 전, '일회용 소프트웨어(Disposable Software)'라는 글을 번역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필요할 때 만들어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저자가 조금 과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몇 달씩 걸리던 소프트웨어를 이제는 누구나 프롬프트 몇 줄로 만듭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이 더 이상 해자가 되지 못한다면, 테크 기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오늘 소개할 글은 이 질문에 뜻밖의 답을 내놓습니다. 테크 기업이 디올 같은 패션 하우스의 사업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꽤 신선한 시각이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1년 전 소개한 글의 마지막 문장을 남깁니다.

 

"과거의 소프트웨어 개발이 ROI(투자 대비 수익)의 제약을 받았다면, 이제는 오직 상상력의 제약만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흥미로운 제약입니다."

 

에디터 픽!


  • 조너선 앤더슨은 날마다 이 긴장의 한복판에서 일한다. 컬렉션마다 한눈에 디올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워야 하며, 무엇보다 팔려야 한다. 그는 이 모순을 산업적 규모로, 그것도 한 해에 스무 번씩 거듭해서 풀어낸다.

 

  • 압도적인 속도와 진짜 제품 감각을 갖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중심에 서고, 앞서 말한 나머지 직무들이 그 주위를 받치는 LVMH형 조직이 그려진다. 쉬지 않고 내놓고, 지난 것은 미련 없이 허물어 버리는 조직이다.

 

  • 취향은 이미 기본값이 되어 가고 있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그 취향을 제대로 써먹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느냐다.

 

에세이

본 아티클은 <The future technology company won't look like a startup. It will look like Dior>의 내용을 번역 및 편집한 글임을 밝힙니다.


창업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다만 이제는 전례 없이, 숨이 찰 만큼 빠른 속도로.


소프트웨어의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창조적 파괴가 멈추지 않는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

 

테크의 미래가 왜 해커 하우스보다 패션 하우스를 닮아 가는지 지금부터 설명해보려 한다.

 

1.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빌더는 패션 디자이너다

그린룸에서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외국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맥 가운데 창의성과 실행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을 가려내려는 질문이다.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하는 기업을 세우는 바로 그런 부류다.

 

연락처는 없지만, 내가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은 조너선 앤더슨이다.

 

조너선 앤더슨은 북아일랜드의 인구 1만 명도 채 안 되는 시골 마을 매가펠트 출신이다. 어린 시절 한때 줄리아드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열여덟 살에 더블린의 브라운 토머스에서 패션계 첫발을 내디뎠다.

 

2008년, 스물넷의 나이에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 JW 앤더슨을 세웠다. 그로부터 불과 5년 뒤, LVMH는 그에게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맡겼다. 당시 로에베는 마흔 아래 세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페인 가죽 브랜드였다. 그는 10년 남짓한 기간에 이 사업을 일곱 배로 키웠고, 10억 달러 규모의 문화 아이콘으로 탈바꿈시켰다.

 

2025년, 디올은 그를 여성복·남성복·오트쿠튀르 전 부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앉히며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 공인했다. 세 부문을 한 사람이 모두 이끄는 것은 창업자 크리스챤 디올 이후 처음이다.

 

그런 그가 지금도 JW 앤더슨을 이끌고, 유니클로와의 협업도 이어 가고 있다. 한 해에 새로 내놓는 컬렉션만 20여 개에 달한다. 창조와 파괴가 끝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셈이다.

 

머지않아 우리가 보게 될 '세대를 대표하는 테크 창업자'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패션 하우스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디올 같은 패션 하우스의 구조는 이렇다. 정점에 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 명이 모든 영역의 비전을 정한다. 그 아래에는 아틀리에가 있다. 스케치 한 장을 며칠 만에 완성된 옷으로 만들어 내는 숙련된 장인 집단이다. 그 주변을 영업 조직, 공급망, 리테일 네트워크, 그리고 브랜드 스토리를 널리 퍼뜨리는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 모든 일을 손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은 없다. 컬렉션 하나가 곧 신제품 출시이고, 시즌 하나가 곧 새로운 베팅이다. 하우스는 인프라와 브랜드, 유통망, 그리고 조직에 쌓인 노하우를 대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관점을 댄다.

 

이 조합이 맞아떨어지면 1년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새로 쓰면서도 누가 봐도 그 브랜드다운, 10억 달러 규모의 비즈니스가 만들어진다.

 

3. 소프트웨어,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이다

패션은 원래부터 창조적 파괴가 일상인 세계였다. 지난 시즌 무대에 올린 옷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다. 시간이 갈수록 두터워지는 제품 해자 같은 건 없다. 오직 다음 컬렉션이 있을 뿐이다.

 

이제 소프트웨어가 그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번에 내놓은 제품은 해자도, 수익의 버팀목도 아니다. 참고서이자 교훈일 따름이다.

 

커서(Cursor)를 보면 이 흐름이 잘 보인다. 기반 모델이 점점 범용화되는 상황에서 커서는 엔진 성능으로 승부를 볼 수 없다. 커서가 이기는 곳은 경험 계층, 통합, 그리고 쓰는 맛이다.

 

가장 본래적인 의미의 브랜드다. 그래서 마이클 트루엘처럼 남다른 CEO는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CEO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가까운 방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제품의 구석구석에서 쉴 새 없이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디티아 아가르왈과 일라드 길(두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벤처 투자자이다)도 최근 사우스 파크 커먼스(미국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에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은 SaaS의 성공 방정식은 이미 깨졌고, 제품 하나로 승부하는 스타트업의 시대도 끝났다고 진단한다. 기존 강자들이 반격에 나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년에서 5개월로 줄었다. 반면 AI 덕분에 작은 팀도 창업 첫날부터 서로 맞물린 여러 제품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이들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금의 창업자가 살아남으려면 상식을 벗어날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패션 하우스 운영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4. 브랜드의 시대, 빌드의 시대를 만나다

폴 그레이엄(Y Combinator 창업자)은 「브랜드의 시대(The Brand Age)」라는 에세이를 내놓았다. 요지는 이렇다. 기술이 제품 사이의 차이를 지워 버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브랜드다.

 

그는 스위스 시계를 예로 든다. 쿼츠 시계가 나오면서 정확성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불가능해지자, 살아남은 업체들은 정밀 기기 제조사라는 간판을 내리고 명품 브랜드로 거듭났다.

 

그는 여기서 눈여겨볼 긴장 관계 하나를 짚는다. 브랜딩은 원심력처럼 작동해 차별화를 향해 바깥으로 뻗어 나간다. 반대로 디자인은 구심력처럼 작동해 정답을 향해 안으로 모여든다. 두 힘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조너선 앤더슨은 날마다 이 긴장의 한복판에서 일한다. 컬렉션마다 한눈에 디올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워야 하며, 무엇보다 팔려야 한다. 그는 이 모순을 산업적 규모로, 그것도 한 해에 스무 번씩 거듭해서 풀어낸다.

 

브랜드의 시대에 테크 창업자의 일도 빠르게 이 모습을 닮아 가고 있다. 취향과 속도를 팽팽하게 맞세운 채, 대량으로 결과물을 쏟아내는 일이다.

 

5. 회사에 남는 일자리는 네 가지뿐

그렇다면 회사에는 과연 누가 남을까?

 

슬로 벤처스의 요니 레히트먼이 제시한 프레임워크를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이제 테크 기업에 남는 일자리는 사실상 네 종류뿐이다.

 

첫째, 빠른 속도로 제품을 내놓는 제너럴리스트. 둘째, 시스템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보안·인프라 담당자. 셋째, 바깥 세상에 매끄러운 경험을 선사하는 영업·고객 경험 분야의 '매력적인' 사람들. 넷째, 속도가 붙은 조직에 제동이 필요할 때 "잠깐만"이라며 끼어드는 어른들이다(변호사, 컴플라이언스 담당자, 이사회를 떠올리면 된다).

 

조너선 앤더슨은 첫 번째 유형이다. 컬렉션을 줄지어 쏟아내는 고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그의 아틀리에와 공급망은 두 번째 유형이다. 기계가 과열되지 않게 관리하면서 스케치를 옷으로 만들어 세계 곳곳의 도시로 실어 나르는 인프라다. 매장 팀은 세 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LVMH의 CEO 베르나르 아르노가 네 번째 유형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어른이다.

 

더 빠른 차를 만들려면 더 좋은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창조의 엔진이 속도를 낼수록 어른의 역할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6. LVMH 모델

자꾸만 생각이 머무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LVMH는 세계에서 기업가치가 가장 높은 럭셔리 그룹이다. 그 운영 방식은 겉보기엔 단순하다. 핵심 인재를 한데 모은다. 그들에게 자원과 재량을 준다. 그렇게 모인 창의적 역량이 여러 사업 영역에서 여러 브랜드를 꽃피우게 한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핸드백을 디자인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조너선 앤더슨'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들을 꼭 맞는 하우스에 앉히고, 아틀리에와 공급망, 글로벌 인프라를 쥐여 준다. 그러고는 한발 물러선다.

 

테크 산업도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안목 좋은 1인 창업자가 AI 코파일럿 하나 끼고 소파에서 일하는 그림이 아니다.

 

압도적인 속도와 진짜 제품 감각을 갖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중심에 서고, 앞서 말한 나머지 직무들이 그 주위를 받치는 LVMH형 조직이 그려진다. 쉬지 않고 내놓고, 지난 것은 미련 없이 허물어 버리는 조직이다.

 

7. 속도 위에 취향을 얹다

패션 하우스가 새로운 스타트업이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새로운 창업자다.

 

세대를 대표할 인재를 찾고 있다면 그에게 취향이 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취향은 이미 기본값이 되어 가고 있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그 취향을 제대로 써먹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느냐다.

 

당신이라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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