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봄 정월,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중에서

천연 향료를 고집해 온 것은 조향사로서의 제가 선택한 미학이자, 철학입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좋은 냄새’를 흔한 범주로 구분하지는 않는데, 아마도 감각 경험을 특정 순간이나 시기의 서사에 입혀 기억하는 오래된 습성 때문인 듯합니다. 지난 긴 시간 동안, 많은 분들이 제가 어떤 향 제품들을 즐겨 쓰는지를 궁금해 하셨는데요. 오늘은 제가 사랑해 온 제품들을 소개하면서, 각각의 향에 담긴 이야기도 함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다 보여드리지 못 하는 제품들은 조만간 다시 한 번 소개해 드리도록 할게요.
아이보리 비누

아이보리 비누에는 아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키가 닿지 않던 높은 선반에 언제나 가득 쌓여 있던 아이보리 비누는, 어떤 방향제보다도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취를 발산했습니다. 긴 세월에 걸쳐 여러 층위로 쌓여 온 이 기억으로부터 ‘향장’에 대한 저의 근원적인 테이스트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향수보다는 샤워 후 살결에 밴 비누의 잔향에, 그 오묘한 미감에 매혹되거든요.
1879년 미국에서 출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 받고 있는 이 미색의 비누에서는 미색의 향기가 납니다. 생강, 암브레트 씨앗, 곱게 말려 가루를 낸 아이리스의 뿌리, 아열대 지방의 꽃들을 무심코 떠올리게도 하지만 비누 고유의 냄새가 얇은 비단결로 시야를 한 겹 가리듯 향취를 은은하게 만듭니다. 자기 주장이 강한 입욕제보다도 아이보리 비누 하나 욕조에 띄워 놓고 바쓰를 즐길 때 향기를 더욱 다채로운 감각으로 즐길 수 있게 되는 듯해요. 비워 놓은 자리, 여백의 공간에서 비로소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법이기도 하지요.
시슬리 오 드 깡빠뉴

1976년, 브랜드의 탄생과 함께 출시된 시슬리의 오 드 깡빠뉴는 훗날 에르메스의 전속 조향사가 될 장클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의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로마틱한 그린 계열의 이 향을 저는 향수가 아닌 바디 로션으로 즐기는데요. 오일을 베이스로 한 포뮬러에서 이 블렌드에 담긴 청명한 정경이 훨씬 온화하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버가못과 레몬, 바질이 첫인상을 그리며 토마토 잎과 약간의 자스민이 미들 노트를 채웁니다. 그리고 오크모스와 패출리, 베티버가 깊은 잔향을 남기지요. 오 드 깡빠뉴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주인공은 단연 토마토 잎입니다. 짙은 녹색의 잎을 가볍게 문지르면 손끝에 묻어나는 풋풋하고 쌉싸름한 향기가 이 블렌드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계절이든 오 드 깡빠뉴는 초여름의 정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뜨와 드 퍼퓸, 〈1828〉

세 번째 소개하는 제품은 드디어 향수입니다. 파리의 이스뜨와 드 퍼퓸(Histoires de Parfums)은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향수를 만드는 브랜드입니다. 12 년 전부터 사용해 오고 있는 1828은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소설가 쥘 베른이 태어난 해의 연도입니다. 자몽과 만다린, 유칼립투스의 싱그러움이 잦아들면 솔방울, 넛멕, 블랙 페퍼 등 발사믹하고 아로마틱한 스파이스들이 모험 소설의 새 챕터를 열듯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긴장이 해소된 자리에서 긴 전설이 될 이야기처럼 삼나무와 유향, 베티버 뿌리가 묵직한 잔향을 남깁니다. 어쩐지 쥘 베른의 서재에서 이런 향이 났을 것만 같습니다.
사실, 몸이 ‘향에 절어 있는’ 직업의 특성상 쉬는 날에도 향수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데요. 〈1828〉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파티에 초대 받아 갈 때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클래식한 구성 위에서 반전의 트레일을 만드는 이 향수가, 저를 낯설지만 기분 좋은 세계로 이끄는 것 같거든요.
메오 푸쉬우니, 1# 노타 디 비아조(Nota di Viaggio)

마지막은 이탈리아의 작은 향수 브랜드 메오 푸쉬우니(Meo Fusciuni)의 1# 노타 디 비아조(Nota di Viaggio)입니다. ‘통과의례(Rites de passage)’라는 부제가 붙은 이 향수는, 제가 수토메 아포테케리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막 내어놓은 무렵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브랜드를 소개해 주신 편집숍 ‘프로젝트 루(project rue)’의 대표님을 통해서였는데요. 1# 노타 디 비아조는 조향사 주세페 임프레차빌레(Giuseppe Imprezzabile)가 ’여행 3부작‘의 첫 작품으로 선보인 향수이기도 했으니, 저에게는 ‘처음’의 의미가 다채롭게 담겨 있는 소중한 작품입니다.
메오 푸쉬우니는 조향사 주세페 임프레차빌레가 2010년 창립한 브랜드입니다. 아버지 바르톨로메오의 애칭 ‘메오’, 그리고 할아버지의 별명 ‘푸쉬우니’를 조합하여 브랜드명을 지었다고 해요. 조향사가 되기 전 주세페 임프레차빌레는 화학을 공부한 약초학자였는데요. 1# 노타 디 비아조에 담긴 이야기는 그가 아직 약초학자였던 시절 떠난 이스탄불 여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랜드 바자르의 향신료와 오래된 직물 특유의 쿰쿰한 듯 건조한 냄새, 그리고 그 여정을 채운 수피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하네요.
핑크 페퍼, 시추안 페퍼, 계피, 사프란 등의 향신료가 이국적인 첫인상을 만들며 장미와 자스민, 제라늄, 타바코의 노트가 밀도 높은 메인 노트를 펼쳐냅니다. 자작나무, 엘레미, 유향, 베티버, 그리고 삼나무가 긴 여운과 같은 잔향을 남기지요.
이렇게 몇 가지의 제품을 소개하고 보니, 제 취향의 큰 골격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흰색의 맑음, 초록의 식물성, 그리고 잿빛 연기와 검게 탄 나무. 깨끗하지만 멸균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만 날것 그대로는 아니며, 어둡지만 무겁게 침잠하지 않는 향. 그대로 수토메 아포테케리의 정체성이기도 하네요.
OLFACTORY STUDY No.022 “The Perfumer’s Drawer”
Elemi 12 drops, orris concrete (30%) 10 drops, frankincense 7 drops, ambrette seed 3 drops, ho wood 3 drops, Virginian cedarwood 2 drops, ginger 2 drops, basil ct chavicol 2 drops, yuzu absolute 2 drops, violet leaf absolute (10%) 2 drops, vetiver 2 drops, ylang ylang (1st) 1 drop, pine tar (1%) 1 drop
‘조향사의 서랍’을 주제로, 오늘 소개한 향 제품들이 한 서랍에 담겨 있는 장면을 그려 봅니다. 우선 감람나무과의 엘레미와 프랑킨센스, 그리고 아이보리 비누의 미색 결을 연출하는 오리스 콘크리트를 메인 노트로 삼습니다. 유자와 바질, 바이올렛 리프로 초여름의 정원을, 호우드와 생강, 암브레트 씨앗, 한 방울의 일랑일랑으로 샤워 후 살결에 남는 비누의 잔향을 그립니다. 그리고 라스트 노트에서 버지니안 시더우드와 베티버 뿌리, 아주 적은 양의 파인 타르가 〈1828〉의 서재와 1# 노타 디 비아조의 여정을 포개어 놓습니다. 흰색의 맑음, 초록의 식물성, 잿빛 연기와 검게 탄 나무가 한 병 안에 조화롭게 담깁니다.
Today’s Music
김현철 — 〈시월애〉 O.S.T (2000)

세기말적 환상과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정제되어 담긴 이현승 감독의 영화 〈시월애〉는 바닷가에 지어진 집 '일 마레'의 우편함을 통로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김현철이 직접 작곡하고 부른 메인 테마 〈Must Say Good-bye〉를 비롯해, 연주곡 〈時越愛 (Main Theme)〉와 〈Il Mare〉까지, 앨범 전체가 바닷가의 초겨울 공기처럼 담백하게 흐릅니다. 저는 특히 지영선의 처연하면서도 맑은 음색을 정말 좋아했어요. 〈I'm Crying〉을 꼭 들어주세요!
P.S. 이 영화에는 ‘향수’에 얽힌 저의 추억도 담겨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00년 가을, 같은 반 남자친구가 극장에서 이 영화를 함께 보았던 날 카사렐의 〈노아(Noa)〉를 선물해 주었거든요. 조향사 올리비에 크레스프의 작품인 노아는, 이전까지의 플로럴하고 파우더리한 여성 향수들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깨끗하지만 날카롭지 않았고, 생강 향이 알싸하게 스치는 듯도 한 모노크롬의 투명함 속에 안개의 질감 같은 것이 배어 있었지요. 마치 이 영화 속 바닷가처럼요. 향수병 안에 담긴 작은 진주까지, 지금까지도 제게 〈시월애〉는 노아의 향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