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을 증류한 것이
유리병 안에 액체의 포로가 되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름다움은 아름다웠던 기억과 함께 사라졌으리라. 그러나 증류된 꽃은 겨울을 맞아도
형체를 잃었을 뿐, 그 본질은 여전히 살아남아 향기로우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1609), 제5번, 9–14행 발췌·의역
Olfactory Study No.001 “10월의 푸성귀”

계절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 그 태도가 쌓여 만드는 품위를 생각합니다. 10월은 한 해의 마지막 향연을 앞둔 계절이자, 비움의 여정을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무성한 풀숲이 잠잠해지고 가지마다 열매를 맺었던 나무들은 다음 해 봄의 새잎을 틔우기 위해 세상을 온통 붉게 노랗게 물들이며 양분을 회수한 뒤 잎들을 떨구어내지요. 봄과 여름이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계절이라면, 가을과 겨울은 그 힘을 내면으로 품는 계절이라 할까요?
10월의 이른 아침, 서리가 내린 차갑고 축축한 흙 위로 여전히 새잎을 틔우는 푸성귀를 생각합니다. 여려 보이면서도, 청록의 계절보다 깊고 단단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그 곁의 흙이 유난히 향긋하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란다 정원의 이 작은 풍경을 향으로 그리는 오늘은 몇 가지의 민트와 월계수 잎, 그리고 서늘하지만 비옥한 흙의 기운을 닮은 패출리와 이끼, 진저릴리 오일을 사용합니다.
Peppermint essential oil 5 drops, spearmint essential oil 2 drops, laurel leaf essential oil 3 drops, rosemary essential oil 2 drops, patchouli essential oil 2 drops, vetiver root essential oil 1 drop, ginger lily essential oil 1 drop, oak moss absolute (5%)* 1 drop
*Oak moss absolute는 무수에탄올에 5%의 농도로 용해한 것을 사용합니다.
조향사 소피의 노트
향으로 ‘차가움’의 인상을 표현하는 경우, 저는 페퍼민트 오일을 즐겨 사용합니다. 페퍼민트에 풍부하게 함유된 멘톨이 낮은 온도에서 반응하는 감각 수용체 TRPM8을 활성화하기 때문이지요.
Sutome Laboratory
수영장
제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로비에서 반 계단 정도 내려가면 되었지만, 창문이 높고 작아 흔한 지층보다 훨씬 어두운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영 수업이 있던 첫날,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물안경을 쓰고 물속에 몸과 머리를 차례로 담갔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정면으로 마주한 어둠의 색채, 처음 경험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극대화하던 수중의 소리는 여섯 살 저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공포였습니다. 이 상황을 알 리 없던 선생님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저의 몸과 머리를 강압적인 손길로 물속에 눌러 넣었고, 허우적대며 발버둥을 치던 과정에서 귀에 물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런 탓이었는지 그저 우연이었는지, 저는 곧 중이염에 걸려 그 학기의 수영 대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뒤에도 저는 여전히 수영 수업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호기심 많고 명랑한 성향이었던 제가 수영을 배우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신 부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따로 연락을 하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딸이 물을 무서워한다고 했고, 선생님은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라도 제가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하셨다네요. 그렇게 일주일에 두어 번,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의 연습이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더는 물을 무서워하지 않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셨고, 용기를 냈던 순간마다 환하게 웃어 주셨고, 저는 몇 주 만에 다른 친구들과 실력을 맞추어 그 학기의 대회에 참여해 금메달까지 따내고 말았답니다.
그 시간이 계기가 되어 저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영을 계속했습니다. 여전히 수영을 어떤 운동보다 좋아하지요. 선수반에서 TV에 나오는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훈련을 했던 때에도, 한적한 플로리다의 바닷물 위에 누워 에메랄드빛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름에도, 달콤한 휴가를 만끽하던 근사한 호텔의 수영장에서도 저는 물속에서라면 언제나 그 시절 부담임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키판을 잡고 물장구를 치며 머리를 물속에 넣을 때마다 제 키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뒤로 천천히 걸어가시던 선생님의 발걸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곁에서 안전하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보다 큰 축복이 있을까요? 선생님을 꼭 다시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생이별이 흔했던 옛날 사람들의 일이란 게 참 이렇습니다.
Formulation Record No.001 “Swimming Pool”
French lavender essential oil 75 drops, Bulgarian lavender essential oil 25 drops, sweet marjoram essential oil 20 drops, rosemary essential oil 15 drops, basil essential oil 15 drops, amber essential oil (5%) 15 drops, frankincense essential oil 10 drops, sandalwood essential oil 8 drops, osmanthus absolute 8 drops, jasmine absolute 7 drops, agarwood absolute (5%) 7 drops, ginger lily essential oil 2 drops, cistus essential oil 1 drop
*Amber essential oil, agarwood absolute는 무수에탄올에 5%의 농도로 용해한 것을 사용합니다.
조향사 소피의 노트
SWIMMING POOL을 작업하며 가장 무게를 둔 것은 실내 수영장의 물 냄새였습니다. 그리고 높은 창으로부터 빛이 들지만 수면 아래까지 환하게 밝히지는 못하던 오후의 햇살, 중저음의 파동을 만들며 흩어지는 물결, 그 곁에서 제가 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까지 기다려 주던 선생님의 온기를 함께 담고 싶었습니다.
이 포뮬러의 중심은 스위트 마조람과 바질, 오스만투스 앱솔루트입니다. 스위트 마조람과 바질의 서늘한 인상에 오스만투스의 부드러운 결을 포개어 수영장의 물 냄새를 재현했습니다. 아가우드 앱솔루트와 시스투스는 습기 가득한 그늘 속에 부서지는 빛을 그리며, 자스민 앱솔루트로 온기를 더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조합으로 연출한 햇살의 이미지는 프렌치 라벤더와 불가리안 라벤더, 그리고 앰버 오일이 그리는 따뜻한 정서로 이어집니다.
Today’s Music
Maurice Ravel — 「Le jardin féerique」, 《Ma mère l’Oye》
《어미 거위 Ma mère l’Oye》는 프랑스의 음악가 모리스 라벨이 친구의 두 아이를 위해 쓴 피아노 연탄곡입니다. 이 작품을 이루는 다섯 곡 중 오늘은 마지막 곡 「요정의 정원」을 함께 듣고 싶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때때로 길을 잃더라도, 낯선 세계에서 마주할 경이로운 장면들을 함께 바라보며 기쁘게 걸어갈 수 있기를, 이 긴 호흡의 여정이 어른을 위한 동화로 쓰여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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