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카비큐 사서함

SUTOME FANTASIA | 멤버십

CABICUE CHRONICLE No.016 “색채가 사라진 세상으로부터”

2026.11.02 | 조회 59 |
0
|
from.
SOPHIE HONG

남은 것은 목소리와 뼈뿐이었다. 목소리는 남았고, 뼈는 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 뒤로 그녀는 숲에 숨어 어느 산에서도 보이지 않으나, 누구에게나 들린다. 그녀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소리뿐이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3권 398–401행, 에코의 이야기 중에서

 

니콜라 푸생, <에코와 나르키소스>, 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74x100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니콜라 푸생, <에코와 나르키소스>, 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74x100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모교에서 미술사 수업을 진행하던 시절, 이 그림 앞에서 학생들에게 늘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인 것 같나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화면 중앙에 누워 있는 나르키소스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어쩐지 푸생이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은 왼쪽 구석의 그늘진 곳에 자리한 여인 에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1624년 로마에 도착했고, 이 그림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그의 스타일이 아직 완성되기 전의 작품인 것이지요. 이 시기의 푸생은 티치아노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베네치아 르네상스 특유의 자연주의적 색채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밝고 따뜻한 살결과 어스름의 빛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젊었던 푸생이 고전주의 회화의 명료한 '선'보다는 미묘한 '색'의 언어를 구사하던 시기였습니다. 

로마 시절의 푸생은 고대의 부조에 깊은 관심을 두었는데요. 화면 전경의 물가에 누운 채 죽어가는 나르키소스의 몸이 조각처럼, 전사한 고대의 영웅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른편에서 욕망의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에로스는 마치 무덤가를 밝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무덤, 죽음, 황혼과 같은 개념들을 무심코 함께 떠올리게 하는 아이러니가 화면 전체의 정서를 결정합니다.

이제 에코를 바라볼까요?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에코에게 남은 것이 목소리와 뼈뿐이었으며, 뼈는 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청각을 재현할 수 없는 회화 예술로 목소리만 남은 존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푸생은 ‘색채’에 주목한 듯합니다. 에코의 살결을 서늘한 잿빛으로 채색하여 몸의 실루엣이 바위 위에 녹아들도록, 마치 사라지고 있는 듯 표현한 것이지요. 꽃이 된 나르키소스와 돌이 된 에코를 이렇게 색채의 대비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회화의 기원과 한계가 공존하는 작품이라 말하곤 합니다. 상(像)에 사로잡혀 생명을 잃고 만 나르키소스는 회화의 시작이고, 그려질 수 없는 목소리로 사라져 가는 에코는 회화가 끝내 닿을 수 없는 지점일 테니까요. 서른 즈음의 젊은 화가 푸생은 이렇게 신화의 한 장면을 빌어, 예술의 처음과 끝을 한 화면에 담았습니다.

 

 

 

색채가 사라진 세상으로부터

첨부 이미지

한 소녀가 거대한 석상의 손바닥 위에서 눈을 뜹니다. 노래를 부르려 입을 열어 보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윽고 석상이 부서져 내리고, 소녀는 끝없이 펼쳐진 회색의 땅으로 떨어집니다. 바르셀로나의 작은 게임회사 노마다 스튜디오(Nomada Studio)에서 2018년에 출시한 《GRIS》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gris’는 스페인어로 회색을 의미합니다. 기술감독 아드리안 쿠에바스(Adrián Cuevas)는, 이 게임이 색채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시작되기에 제목과 주인공 소녀의 이름에 그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GRIS》는 두 개발자 로저 멘도사(Roger Mendoza)와 아드리안 쿠에바스가, 화가 콘라드 로셋(Conrad Roset)을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요. 수채화가 로셋은 예술가로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를 꼽아 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GRIS》는 게임을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정교하게 채색된 그림이 가득 담긴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멤버십 구독자만 읽을 수 있어요

구독하려면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이웃 뉴스레터 Beta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다른 뉴스레터의 글이에요.

카비큐 크로니클과 대화하기
© 2026 카비큐 크로니클

감각과 사유의 기록: Season 1. 조향사 소피의 포뮬러와 에세이

뉴스레터 문의sutomeapothecary@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대표번호: 070-8027-1409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