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주간모기영 131호

[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영화 <너와 나>(2023)"

2024.04.28 | 조회 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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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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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 열 다섯 번째 방: 영화 '너와 나'(2023)

그림자에서 새벽으로

  4월이었는데, 4월입니다. 10년을 돌아와 그때와 같은 4월을 맞이했어요. 올해 4월 16일의 오전은 그때처럼 구름이 하늘을 덮은 탓에 햇빛이 희박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일 년 중 저는 이맘때쯤에만 그날을 겨우 기억하는데, 그런 저와 달리 그날 이후부터 매일 두 시간대를 동시에 살고 있을 누군가의 마음에 대해서요. 철저히 외부자인 제게 허락된 것은 짐작 밖에 없지만 그것만이라도 제게 주어졌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려 했습니다. 다른 시간대가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지고, 끊김없이 흘러가는 현재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과거 사이의 아득한 시차를 감각하는 사람의 마음을요. 두 시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이 아주 단단해야 했을 거예요. 파도처럼 과거가 불쑥 현재로 밀려와 마음의 수면을 일렁이게 만들어도 현재의 일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나름의 비법들을 터득해야 했을 겁니다. 남은 사람들은, 10년을 보내면서 이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했을 거예요. 첫 단락을 길게 적어놓고는, 주제넘게 공감을 시도한 것은 아닌지 문득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너와 나>가 시도한 것도 실은, (‘공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어떤 겹쳐짐, 혹은 껴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세부를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너와 나>는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사랑 이야기가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건, 사랑을 나눈 사람은 세미와 하은만이 아니라 실은 관객 저마다가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영화가 자리를 마련해서 가능한 것 같기도 해요.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죽어있는(누워있는) 세미를 향해 ‘사랑해’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죠. 이 목소리의 발화자는 숨겨져 있으므로 누구의 목소리라고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여요. 누운 세미 위로, 음조와 파동이 조금씩 다른 목소리들이 ‘사랑해’라는 말을 쌓는 동안, 관객도 어느새 말의 더미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고 싶어집니다. 설령 그 말이 이전에 쌓인 것과 동일한 언어라고 해도, 오직 나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라는 자긍심을 갖고 말이에요. 그 자긍심이 <너와 나>가 세월호 아이들과 관객을 이어주는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끈이라고 생각을 하면 뭉클해집니다. 그렇게 외부인과 아이들의 첫 번째 포옹이 시작되네요. 

영화 <너와 나> 네이버 스틸컷
영화 <너와 나> 네이버 스틸컷

두 번째 포옹은 서사 속 장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서로를 향한 애절한 마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한 대신, 무수한 오해만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세미와 하은은 우연한 계기로 학교에서 재회합니다. 거기에서 둘은 실종된 강아지 진식이(똘똘이)를 발견해요. 그렇게 진식이는 보호자(길혜연)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뭐라도 대접해주기 위해 보호자는 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세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뭐랄까요. 거기 앉은 세 명은 분명 개별체이지만, 그들의 얼굴 위로 무수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에서요. 똘똘이의 보호자는 짧지만 상실했던 경험을 말합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어뒀는지, 똘똘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날부터 제 자신이 너무 싫고 매일 자책하고 정말 죽고 싶었어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이 말 위로, 곁을 떠난 사람에게 따뜻함을 건네지 못했던 일들, 작고 사소한 것들마저도 치열하게 기억해내고는 기어이 자기 책임으로 떠안으며 상실을 앓던 현실의 유족들 표정이 어른거렸습니다. 침착함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하은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제리가 많이 보고 싶거든요.” 얼마 전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반려견 제리와 사별한 하은은 자신이 경험한 상실감을 잇대어 말하는데, 저는 그게 꼭 4월 16일 이후의 시간을 겪을 저 자신에게 보내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하은이는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을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화적 허구와 현실의 실제가, 그들의 미래와 우리의 과거가, 또는 (상실을 미리 겪어본) 그들의 과거와 이제 곧 겪을 미래가, 그러니까 시간과 시간이 겹쳐지고 포개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 포옹.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포옹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세미는 자신이 꾸었던 꿈을 하은이에게 말합니다. 꿈속에서 세미는 하은이가 되어 살아보는데, 그 시간대는 수학여행 이후였습니다.  빈 교실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다 오기도 하고, 태풍 너구리 때문에 실종자 수색작업이 잠시 중단될 거라는 버스 라디오의 음성에 하염없이 눈물흘리기도 하면서요. 그런 끝에 세미는 눈물 흘리며 하은에게 사과합니다. “하은아 진짜 미안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지, 내가 몰라줘서 미안해.” 이 장면은, 이후에 일어날 일과 앞으로 겪을 통각이 현재로 흘러들어오게 만들어 세미와 하은의 눈물을 각각 이중적으로 만듭니다. 세미는 자신이 겪을 일을 알지만 하은은 어리둥절한 것처럼, 혹은 영영 떠난 친구에게 꼭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세미에게 작은 기회를 주는 것처럼.

세 번째 포옹 이후 둘은, 그리고 영화는 이제 ‘미안해’ 대신 ‘사랑해’를 말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칩니다. 저는 이 ‘사랑해’가 마치 세미의 긴 고백처럼, 남겨진 이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책감, 쓰린 통각을 앓는 이들을 향해 떠난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미안함보다는 사랑으로 남겨두자는, 사랑을 간직해달라는, 말처럼요. 미안해의 그림자에서 사랑해의 새벽으로, 영화는 우리를 옮겨다 놓습니다. 사랑을 잃지만 않는다면, 너와 나는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죽음은 뭘까요. 이런 질문들은 ‘여름이 왜 오는지’ 묻거나 ‘겨울 전나무가 왜 아름다운지’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고 반복만 있어요. 그러나 이 반복은 집요해서 아름다워요. 묻고 또 묻고 되묻고 묻고 다시 또 묻고 그렇게 묻다보니 거대한 능과 총이 서겠죠. 저는 지금 다시 되묻습니다.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당신은 뭐예요.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죽음을 뚫고 세계를 싸안아 가슴에 넣는 것.
용감하게 둔덕을 굴리며 살아가는 것.

나를 키운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가슴에 머리에 손톱에 혈관에 눈빛에 사방에 지금 이 순간에 불어오는 바람 속에 토실토실한 빵 속에 당신이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눈부신 연관 속에 있어요. 눈 감으면 언제든 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보고플 땐 눈 감아요. 눈을 감은 채 절실하게 봄여름가을겨울을 불러요. 저는 그렇게 지금까지 시를 썼어요. 눈비 맞으며, 사랑의 함박눈을 맞으며, 뭐가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가 제가 걸어온 시절입니다. 단 한 번도 홀로 걷지 않았습니다.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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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은 곧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예수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함께라는 것이 시간과 물리적 공간마저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요. 내가 사랑하거나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의 홀로인 사람이 누구도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새삼 드네요. 그 사랑을 모기영은 건넵니다.


글 : 이정식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4년 04월 27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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