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죽음과 사랑
영화를 다 보고 떠오른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라는 산문집인데요.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전까지 병상에서 김진영 선생이 쓴 짧은 글귀들을 모은 책입니다. 빽빽한 검은 글자보다 침묵과 정적을 닮은 흰 여백이 명료한 시집 같은 책이에요. 말수 없는 사람이 오래 고른 낱말을 표현하는 걸 듣는 것처럼 이 책을 읽기만 해도 몸속 어딘가가 정갈해지고 말갛게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앞둔 선생이 남긴 글이라는 점에서 유서처럼 읽히기도 하고요. 기록된 모든 문장들을 다 읽고 나면, 이토록 담백한 유서를 저도 언젠가 말간 정신으로 써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습니다.
그 소망은 아마도 죽음 앞에 선 김진영 선생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자기 연민과 같은 감정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담담한 인식과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주변과 세상을 사랑하며 감사하리라는 결단이 고요하게 배어있어요. 그러고보니,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애도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말처럼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상실한 대상을 향해 쏟았던 리비도를 철회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면(김진영 선생의 경우, 그 ‘대상’이란 자신의 삶일 거예요.), 그의 문체에 배인 침착함이 조금 눈물겨운 데가 있습니다. 그는 서서히 자기 삶을 상실하는 실감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그 실감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고통, 절망에 있는 힘껏 저항하면서 끝내 삶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아무르>도 죽음을 앞둔 사람의 이야기죠. 극 중 안느(엠마누엘 리바)는 서서히 죽어가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갑자기 멍해졌다가, 몸의 오른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가, 급기야 언어마저도 잃습니다. 영화의 후반부가 되면서 안느의 언어는 놀랍도록 단순해지는데요. 복잡한 문장구조는 사라지고, 자신의 상태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투명하게 투영된 것 같은 두 단어만 남습니다. ‘엄마’, ‘아파’입니다. 안느는 이 두 단어를 ‘말하지’ 않고 외치는데, 그럴 때 이 말은 차라리 외마디 비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비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어른거리는 공포의 기운도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극의 초반, 안느는 조르주와 함께 피아노 연주회에서 돌아오는데, 집 문고리가 뜯긴 것을 발견하고 어떤 불길함을 느껴요. 그리고 안느는 그날 밤 잠들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세운 채 두려움에 떱니다. 안느는 자신에게 닥칠 가장 궁극적 공포(죽음)를 예감한 걸까요? 인상적인 것은, 남편 조르주 역시 공포를 느꼈다는 점입니다. 깊은 밤, 문에서 난 소리 때문에 조르주는 현관문을 열었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데 허공에서 누군가의 손이 뒤에서 그의 입을 틀어쥡니다. 그리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죠. 처음 저는 이 장면을, 안느의 죽음에 대한 조르주의 불안이 투영된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곱씹어 떠올려보니 조르주 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조르주도 안느처럼 몸의 오른편이 불편해 보이는데요. 이 장면은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안느에게 찾아왔던 죽음이, 조르주에게도 곧 임하리라는 전조라는 듯이요.
<아무르>에서 죽음을 앞에 둔 자의 초연한 태도는 찾기 어렵습니다. 임박한 종말 앞에서 안느와 조르주는 허둥대거나 소리치고, 자신(과 타인)을 향해 화를 내거나, 실망하고 절망하죠. 그런데 어쩌면 이런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조르주와 안느는 삶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잃어버려서가 아니고, 또 그런 반응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라, 그저 죽음 자체의 파괴적 영향에서 비롯된 현상일 뿐이 아닌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조르주와 안느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서로를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압도적 힘이 인간이 대항할 수 있는 희미한 사랑마저 단숨에 삼켜버렸죠.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토록 나약하고 언제건 쉽게 꺼질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이 그토록 고결하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면서 자신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증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무르>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의 의미처럼 ‘사랑’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계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시킨다.”(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문학동네, 2010, 210쪽) 감히 예상하건대 죽음이 가져다주는 치욕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거예요. 인생과 죽음을 논하기에는 민망한 저도, 죽음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김진영 선생과 <아무르>의 조르주와 안느에게 고요하게 흔들린 지점은, 그들이 놀라울 정도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점이 아니라, 쉽게 흔들렸다는 점. 절망과 사랑을 오가면서. 불안이 가져다주는 피로감을 견디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은 점에 있었습니다.
적절한 인용일진 모르겠으나, 바울은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했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린도후서 4:16) 이 구절의 맥락은 위에서 전개된 논지의 맥락과 다를 순 있지만, 적어도 바울이 신약성경 곳곳에서 드러낸 ‘역설의 신학’은 퍽 어울린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사적인 종말을 경험하기 전에도, 얼마든지 작은 층위의 죽음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의미를 찾기 어렵거나, 내가 그 자리에 존재할 당위를 찾기 어려울 때, 자신의 존재가치에 거대한 의문이 들 때, 우리 마음은 죽음에 가까워질 거예요. 어쩌면 그 과정을 견디느라 꽤 지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을 포기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덧 입춘이네요. 조금 풀린 날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신도 모르게 경직된 마음이 조금은 이완되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글 : 이정식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4년 02월 03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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