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간모기영 168호

[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2025.07.12 | 조회 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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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 스물세 번째 방,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당신의 그늘

 

이 영화에 마음을 기꺼이 주어야겠다고 느낀 장면은 생각보다 거창한 데 있지 않았어요. 좁은 골목에서 영화의 초점인물인 오가와 케이코(키시이 유키노)와 그녀가 다니는 체육관의 회장님(미우라 토모카즈) 부부가 마주치는데, 회장님은 황급히 인사하고 지나간 케이코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무슨 여운이 남았길래 그는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요. 그렇게 서서 얼마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을 옮겨요. 이런 식으로 영화는 사람의 뒷면을 주의깊게 응시합니다. 뒷모습은 명랑과 쾌활을 가장하지 못하잖아요. 언어의 그늘, 제스처의 그림자, 존재의 뒷면은 그렇게 사려깊은 사람들의 응시 덕분에 영영 감출 수 없게 됩니다.

 

경기 이후의 경기

프로복서인 오가와 케이코는 선천성 감응 난청 장애로 양쪽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복서에게는 치명적으로 불리한 점이라고 해요. 심판의 판정뿐 아니라, 코치의 지시도 들을 수 없어 경기 중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요. 케이코는 그러나 자신의 선천적인 불리함을 크게 개의치 않아 합니다. 여느 선수처럼 그는 자신의 훈련과 페이스에 집중해요. 그런 그녀에 대해 회장님이 평하는 인터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선수로서의 재능이 특출나진 않지만, 인간적인 기량은 출중하다’네요. 솔직하고 정직하며, 성실하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케이코는 매일 새벽, 10km를 달리고, 호텔에서 객실을 청소하는 일을 마치면 체육관으로 가 지난한 훈련을 반복합니다. 이런 성실함의 소유자를 향해 응원하지 않기란 누구라도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림 1]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그림 1]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그런데 그런 성실함에 대해 저는 좀 다른  생각도 듭니다. 케이코의 모습이 필사적인 데가 있거든요. 어쩌면 케이코의 시합은 링 아래에서도 계속되는 것은 아닌지요. 일상이라는 링에서 그녀는 매 순간 자신과 대결하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케이코는 이중의 다툼을 하는 중입니다. 복서로서 상대선수와 시합하는 것과 자신으로 존재하는 케이코와. 늘어지고 싶은 게으름에 채찍질하고, 녹초가 된 체력과 심정을 다독이며 그녀는 경기 이후의 경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케이코의 눈빛은 늘 힘이 들어가 있네요. 시합 다음 날에는 쉬지 왜 출근했냐는 동료의 염려에 케이코의 대답처럼, 한 번 마음을 풀면 쭉 늘어질까봐 그런 걸까요. 시합과 같은 밀도의 긴장감으로 일상을 보내는 그녀를 저는 경이로움과 애처로움을 공평하게 담아 바라봤습니다.

[그림 2]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그림 2]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세계는 저마다 다채롭고 비슷한

그런 케이코에게 어느 날 동생이 가볍게 던진 말로 시작된 대화가 의미심장한 데가 있어요. 복싱을 잠깐 쉬겠다는 마음을 케이코는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지만 동생은 그녀의 깊은 데서 일어난 파문을 감지합니다. “말해봐.” 케이코는 이렇게 답해요. “말해봤자 사람은 혼자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으로 주어진 생이라는 다툼을 홀로 해나가야 한다는 걸까요. 동생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누나는 강해도 모두가 그렇지 않아.” 케이코처럼 자신과의 다툼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 운명에 끌려다니는 약한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 생이 불현듯 그어놓은 자기 한계를 도저히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여기서 저는 대화의 시작점인 동생의 대사를 떠올립니다. (그러니) “말해봐.”

   동생이 요청하는 건, 결국 홀로 짊어진 생의 무게를 나눠달라는 의미일 거예요. 말은 그렇게 마음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마음을 옮겨나르는 도구가 언어만이 아니라는 점은 생각할 만한 점 같아요. 고요하게 일렁였을 뿐인 케이코의 변화를 동생이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도. 묵묵하게 걸어가는 케이코의 뒷모습에서 남몰래 분투하는 흔적을 알아차린 체육관의 회장님과 같은 상황은, 누군가의 마음이 언어 없이 연결된 장면이 아닐까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케이코와 코치가 주고받는 콤비네이션 미트 신은 대사 없이 숨 가쁜 움직임만이 형형한데, 그 순간 두 사람은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둘만의 내밀한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글러브와 미트를 통해 서로에게 공명하고 있다고요.

[그림 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그림 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사실 앞에 소개한 케이코와 동생의 대사에서 제가 빠트린 것이 있습니다. “누나는 강해도 모두가 그렇지 않아.”라고 동생이 말한 뒤에 케이코의 대답이 있는데요. “나도 강하지 않아.” 그러니 마음을 나누는 일은 동생에게도, 케이코에게도 필요합니다. 설령 그것이 명료한 발음으로 표현되지 못하더라도, 홀로 고투하느라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외마디 한숨이라 할지라도요. 청각, 시각, 촉각 등 감지가능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너의 언어를 알아듣겠다는 다정한 의지가 영화의 인물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비슷한 그늘을 나도 갖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세계는 저마다 다채롭지만 비슷한 언어와 그늘을 가진 존재들을 통해 연결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케이코는 얼마 전 자신을 이긴 상대 선수를 강변에서 우연히 만납니다. 어리둥절하는 케이코와 달리 상대 선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와 쭈뼛쭈뼛 인사해요. ‘고마웠습니다.’ 작업복 차림인 걸 보니 경기가 없는 날에는 케이코처럼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주고받은 말은 저것이 전부인 짧은 만남이었지만, 케이코는 그 직후 강둑으로 올라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 찰나에 케이코와 상대 선수는 서로의 낯익은 그늘을 알아보았고, 보이지 않는 층위에서 무수한 말을 나누었을 겁니다. 

영화의 배경이 팬데믹이라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실내의 의자엔 착석할 수 없다는 표식이 붙어있어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입을 가린 마스크가 이 영화에서만큼은 (과장해서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말하는 입을 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불가역적인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가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생과의 다툼은 여전히 힘겹지만, 사람이 말로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느린 그늘, 그림자의 윤곽을 누군가 알아보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림 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그림 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출처: 네이버 포털

인삿말

여름에 막 접어든 것만 같은데 마치 한여름인양 더위는 맹수처럼 몰려드네요. 피서라는 단어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피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소식도 떠오르네요.

아무쪼록 무탈하시길,

강건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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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7월 1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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