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207호

[이정식의 밀플뢰르]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2026.08.15 | 조회 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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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밀플뢰르]

“저를 생각하는 건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학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열쇠가 있다면, 기도는 주의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영혼이 기울일 수 있는 주의력을 모조리 신께로 향하게 만든다. 기도의 질은 주의력의 질에 크게 좌우된다. 뜨거운 마음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학습은 물론 좀 더 낮은 차원의 주의력을 발달시킨다. 그렇긴 해도 기도의 순간 발휘될 주의력을 키우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다. 학습이 이 목적으로, 오로지 이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이창실 옮김, 복있는사람, 2025, 113-114쪽.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글을 적을 수 있는 영혼의 생김새가요. 베유가 적확하게 묘파했듯, 본질적으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몰입의 시간이죠. 몰입의 가장 깊은 핵에 다다르면, 어느새 언어는 사라지고 침묵과 고요가 덩그러니 남습니다. 적막은 의식되지 않습니다. 말은 불필요하고요. 그토록 아스라한 정적 안에서 오래 머물며 영혼을 말갛게 씻고 싶었던 경험은 제게만 있지 않을 거예요.

베유는 사려깊게 조언합니다.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면 주의력을 훈련해 보자고요. 훈련 방법은 공부입니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공부와 기도는 관련이 꽤 깊습니다. 겉보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대상을 향해 다가가야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의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도리어 대상이 내게 찾아온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고, 온 정신을 다해 주의를 기울인 그것이 그렇습니다.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단어 하나를 두고 오래 고민하는 저는, 이런 순간을 종종 맞이합니다. 찾으려 애쓸 때는 달아나던 활자가, 불현듯 마음에서 솟아오르던 때 말이에요. 숱한 작가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내가 찾은 게 아니라 글이 내게 찾아왔다’는 말에서 신앙 고백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신앙과 학습의 유사성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하나님이 여전히 침묵하는 것 같다면, 응답은 요원하고 오직 정적의 단음만 들린다면 어쩌죠? 이런 사태는 저 같은 목회자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겠지만, 로마 주교이자 세계의 주교인 교황이라면 더더욱 곤란할 수 있습니다. <두 교황>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가 자진사임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가정합니다.(물론 이것은 각본가의 각색입니다.) 거절 받은 가인의 제사처럼 자신의 기도는 늘 하나님께 외면받는 것 같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알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버디 영화로서 <두 교황>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맞은편에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을 내세웁니다. 그는 베네딕토를 뒤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죠. 많은 버디 영화가 그렇듯이 성격도, 신학적 지향도 정반대인 두 사람이 충돌하면서 서로에게 스미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 문화로부터 교리를 수호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로트와일러’라고 불리는 것을 기꺼워해요.

가톨릭의 전통을 중시했던 그와 달리 베르고글리오는 ‘교회가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 같음’에 염증을 느끼며, 그리스도는 담을 쌓지 않고 다리를 놓았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관해서도 서구의 상대주의와 방임주의에서 원인을 찾는 베네딕토 16세와 달리, 베르고글리오는 자기도취에 빠진 교회에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는 쪽입니다. 둘의 신학적 차이는 신론에 있어서도 드러납니다. 소개해 드리죠.

베르고글리오: 자연에서 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에서도요. 심지어 주님도 마찬가지예요. 베네딕토 16세: 주님은 변하지 않아요.
베르고글리오: 주님도 변합니다. 우리 쪽으로 오세요.
베네딕토 16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주님이 항상 움직인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오?
베르고글리오: 이동하면서요.

둘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지만 고정되지는 않으시죠.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확정적으로 말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러한 규정을 초과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변한다는 언술도 옳죠. 전반부만 해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던 둘은, 교황의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에서 하루를 보내며 닮은 점을 찾습니다. 다름 속의 닮음. 차이라는 담이 허물어지고, 유사성이라는 다리가 놓아집니다. 교회의 화려함을 마뜩잖아하며 검소함과 소박함을 귀하게 여기던 베르고글리오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과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들을 보며 ‘아름답다’며 넋을 잃죠.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고글리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그와 탱고를 춥니다. 둘은 변하지 않으면서 달라졌네요.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저는 무엇보다 두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보이는 반응에서 귀중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사임을 원했던 것은 베르고글리오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추기경으로 은퇴하고 평범한 교구 신부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소망이었습니다. 은퇴를 청원하는 편지를 수차례 교황청에게 보냈지만 회신을 받지 못해서 직접 찾아가려고 비행기 표도 끊었다는 점에서 그의 진정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듯이 그때 교황청으로부터 방문 요청 편지를 받습니다. 물론 그를 기다리던 하나님의 뜻은 은퇴가 아니라 교황이라는 직무였지만요.

두 인물 모두 사임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서로에게 달리 주어졌습니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베네딕토 16세)과 오르는 것(프란치스코). 오해를 막기 위해 말씀드리면, 이 구도를 ‘사울-다윗’으로 이해해선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베네딕토 16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뜻은 그가 더 이상 교황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한 교황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던 베르고글리오의 마음도 의심할 수 없죠. 다만 둘은,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므로, 겸허한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이라니. 어느 순간부터 이 표현은 우리에게 의심스러웠습니다. 자기 욕망에 세례를 주고는 들키지 않을 거라 과신하는 어떤 목회자의 사례도 있겠지만, 대관절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정말 알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문스럽긴 마찬가지죠. 본능과 욕망을 소거하면서 절대적 선을 추구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쉽게 생각하지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한 절대적 선은 내가 상정한 것이니까요.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두 교황>(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19) [출처: KMDB]

무엇보다 절대 선을 따른다 해도, 그 안에 정말 어떤 ‘부정함’(도덕적 우위, 의로운 자만심)이 하나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요. 제가 속한 보수교단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인 ‘절대무오한 성경관’을 믿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삶과 상황은 성경이 아니어서, 내가 선이라고 믿는 것도 오류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두 교황>으로 질문을 다듬어 볼까요.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서 내려오는 것과 베르고글리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것, 그 두 가지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요?

다시 시몬 베유입니다. 베유는 하나님의 뜻을 세 영역으로 구분지어 말해요. 하나는 인간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우주 전체에서 벌어진 모든 일, 그리고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중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이 포함됩니다. 이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전체로서, 또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신을 기다리며』, 30쪽) 둘째, 내 의지의 지배를 받는 영역입니다. 지성, 상상력, 의지와 같은 것이 거기 해당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고전 9:27)하길 원하는 바울의 고백은 이 영역에 해당됩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길 원하는 인간의 죄악된 욕망을 하나님의 선한 지배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세 번째.(어쩌면 이 점이 가장 독특한 점이라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지의 지배를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은 것들의 영역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죄악이라 단정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선이라고 확언할 수도 없는 것들의 영역이죠.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느냐, 계속 하는가. 혹은 교황이 되느냐, 은퇴하느냐. 물론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우리로서는 여전히 고민스러운 영역이기도 하죠. 하나님의 뜻도, 인간의 뜻도 해석되는 영역.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단정할 수 있을까요?

베유의 문장을 직접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신의 강요를 받을 만하다는 전제하에, 그런 자격을 갖춘 딱 그만큼 신에게서 강요를 받습니다. 신은 주의와 사랑을 기울여 그를 생각하는 영혼에게 보답하십니다.”(31-32쪽) 베유는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기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추호의 의심 없이, 그리고 욕망의 오염 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뜻’, 그야말로 (하나님의) ‘강요’라고 표현할 법한 것은 주어질 수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할 수는 있어도, 무턱대고 ‘자기 욕망을 은폐하려는 기만’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요’(하나님의 뜻)의 반경을 설정하는 기준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생각하느냐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단 하나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되기도 합니다. 열려있는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단 한 가지 필연적 길로 좁힐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포기를 감수하고 상대를 받아들이죠. 애초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뜻이라 확정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성경을 제외하곤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몫이 있다면 강요의 범위를 넓히는 일. 사랑에 나를 내맡기는 일일지도요.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자신에 도취되지 말아야 할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를 지나치게 긍정하지 말아야 할 것.

여하간 우리의 문제는 너무 나를 의식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베유의 조언.

“저를 생각하는 건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저의 일은 신에 대해 생각하는 거예요. 저를 생각하는 건 신의 소관이고요.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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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단편경쟁부문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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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대신 도모, 배제 대신 축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는(집행위원장 강신일 배우) 종교적 틀이나 신앙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이들이 모여 가치있는 작품을 통해 생각을 나누고, 풍요로운 영화문화를 누릴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영화제 입니다.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는 올해 8회를 맞아 첫 단편경쟁 공모를 시작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지원 바랍니다.

1)영화제 개최일정   

일시: 2026년 11월 19-22   

장소: KT&G 상상마당 시네마 홍대

2) 출품자격  

비종교인 종교인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연출자 / 2025년 1월 1일 이후 제작된 30분 미만의 단편영화 / 올해의 공모주제를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해석한 작품 / 유형 제한없음 (극영화, AI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3) 공모주제    

“하이-파이, 로-파이 (부제: 두 세계 이야기)"     

하이-파이(Hi-Fi) : 고음질, 선명함, 완벽함   /   로-파이(Lo-Fi) : 아날로그, 투박함, 결핍     

언젠가부터 하이파이는 투박한 인간적 결핍을 지닌 로파이를 향하고, 로파이는 하이 파이의 조율된 질서가 지닌 선명함을 꿈꾼다.  서로를 갈망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두 세계, 그리고 마주 안은 두 세계의 경계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이야기들.

4) 시상     

CFFFE 최우수상 1편 상금 100만원 및 상패 / CFFFE 우수상    2편 상금 30만원 및 상패

5) 접수기간     

2026년 7월 13(월) - 8월 26(수) 자정까지

6)접수방법     

아래 온라인 출품 바로가기 버튼을 통해 접수  *파일제출은 받지 않습니다.

7) 본선진출작 발표  

2026년 9월 중     

본선진출작 선정 결과는 홈페이지 및 sns를 통해 발표 (수상작 상영, 관객과의 대화 및 시상식은 영화제 기간에 진행됩니다) 

 

** 기타문의는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cff4every1@gmail.com 로 부탁합니다.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8월 15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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