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호의 ’극적인 다큐‘]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망겜이라 불리는 곳을 지키는 사람들
다들 어린 시절 용돈으로 넥슨 캐시 한 번쯤 긁어보지 않으셨나요. 아마 바람의나라나 크레이지 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같은 게임을 안 해본 90년대생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일랜시아’라는 이름도 들어보셨나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업데이트가 멈춘 지 십수 년, 심지어 이 게임을 만든 회사인 넥슨조차 사실상 방치해버린 ‘망겜’이거든요. 그런데 이 버려진 게임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유저들이 남아있습니다.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16년 차 고인물 유저이자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박윤진 감독이 일랜시아 유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같은 길드원들을 찾아가 묻습니다. 도대체 이 게임 왜 아직도 해요? 돌아오는 대답이 그리 명확하진 않습니다.
“아쉬워서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때 생각이 많이 나서, 그때 같은 추억을 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억이라는 게 무섭죠. 십몇 년을 한 게임에 붙잡아둘 수 있다니요. 이분들을 보면서 제게 그런 게임이 없는 게 아쉽기도 했고, 그런 유저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운영진이 떠난 무법지대 일랜시아라는 곳은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정겨웠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다니는 유저도 있고,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하는 유저도 있고, 모여서 그곳을 탐험하는 유저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온갖 불법 매크로가 판을 치고, 돈을 주고 캐릭터 육성을 대신 맡기는 ‘부주’도 성행합니다. 도대체 왜 이 게임에 돈까지 써가며 캐릭터를 키우는 걸까요. 어느 유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고는 싶은데 시간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돈 쓰면서 모바일 게임 많이 하잖아요.”
“너무 힘든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일랜시아는 수치로 어디까지 올랐는지 결과가 눈에 바로 보이니까, 그런 데서 성취감을 얻은 것 같아요.”
“진짜 힘들 땐 아무 걱정 없이 놀고먹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죠. 지금의 꿈이라면 그냥 여자친구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밖에 없는데, 뭘 더 하려니 너무 겁나요. 결혼식 비용도, 집 마련도 감이 안 잡히는데 다가가지 못하는 거예요. 부주를 맡겨서라도 캐릭터를 키웠다는 것, ‘내가 여기까지 해냈다’는 게 되게 뿌듯하죠.”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팍팍한 현실에서, 묵묵히 광물을 캐고 성장하는 캐릭터를 보며 성취감을 얻고 있었던 겁니다. 다른 대작 게임들이 과금 없이는 발도 붙이기 어려운 고난도 세상이 되어갈 때, 역설적으로 버려진 일랜시아는 모두에게 평등한 마지막 피난처로 남아있었던 셈입니다.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 그곳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길드원 하루히로는 어느 유저에게 아이템 사기를 당합니다. 상대는 감독의 닉네임을 교묘하게 사칭한 내언니전지‘헌’. 이후로 하루히로는 이 게임을 떠나겠다고 하죠. 그래서 그가 마지막으로 접속한 날, 그를 아는 유저들이 모입니다.
호무새: 야 히로야, 접진 않을 거지?
눈물금지: 맘이 아푸...
호무새: 너라면 금방 털고 일어날 거라고 형은 믿는다
하루히로: 저 이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다들 감사드립니다.
하루히로: 딱히 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딸람보: 그니까 너 접을 거 같아서 다 이렇게 온 거 아이가
내언니전지현: 그치 마음이 힘들지
하루히로: 그냥 뭔가 이런 게임 하나에 내가 막 감정 느끼는 게 그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하루히로: 어린 느낌 들어서 이럴 거면 그냥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은 거일 뿐
딸람보: 아니야 인마
내언니전지현: 대신에 더 좋은 감정도 많이 느낄 수 있음
내언니전지현: 그리고 이건 게임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사기당하면 다 그런 감정 느끼지
어느 유저를 마주치기만 해도 게임이 강제로 꺼지는 악성 ‘팅버그’가 등장했을 때는 모든 유저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게임이 종료되는 걸 경험하며 유저들은 이대로 이 게임을 지속할 수 없게 되는 건가 생각하죠. 안타까운 건 유저들이 넥슨에 신고한다고 이를 해결해줄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리고 신고해도 될지 주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고했다가 편하게 쓰던 매크로도 막히고, 아예 서비스를 종료해버리면 어떡하지?”
버그가 일상이 될 정도로 그곳이 망가져도 버틸 사람들만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결국 감독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넥슨을 찾아갑니다. 게시판으로 문의를 하고, 유저 상담실을 방문합니다. 이후에도 팅버그는 계속되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
“안녕하세요. 일랜시아입니다. 일랜시아 점검에 들어갑니다. 일정 참고 부탁드립니다. 각 점검 시간 동안 게임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앞으로 더 발전하는 일랜시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해낸 효능감으로 감독은 더욱더 일랜시아를 위해서 뭔가를 해보기로 결심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고, 넥슨과 유저 간담회를 열기로 하죠. 유저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초기 개발자를 만나기도 하는데요. 20년 전 자신이 만든 세계관조차 가물가물해진 개발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게임에서조차 자꾸 뭔가를 해야 하죠? 현실에서도 못 해보는 걸, 게임에서라도 그냥 편하게 낚시하고 요리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람의나라 유저였다고 합니다. 새벽 2시에 해골굴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유저와 의기투합하고, 어느 날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뎀을 사러 용산까지 뛰어갔다 오던 시절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온라인 게임의 순수한 낭만이, 게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라고 말하죠.
왜 아직도 그 게임을 하냐는 질문이 제게는 ‘왜 아직도 교회를 다녀?’, ‘왜 아직도 그런 종이잡지를 읽고 만들어?’, ‘왜 아직도 그런 비효율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해?’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효율과 성과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논리 앞에서 저는 늘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그런 머뭇거림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죠. 비록 2D 그래픽 속 가상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함께 문화를 가꾸어온 사람들은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각자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요.
세상이 보기엔 한물간 “구시대의 잔당들”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속한 작은 세계를 끝까지 사랑하고 지켜내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멈춰버린 세계를 기어코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유저들의 고군분투와 연대를 보면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과 공동체를 지켜갈 용기를 얻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용기를 얻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글 정민호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8월 22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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