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191호

[이정식의 밀플뢰르 ] 영화 <기차의 꿈>(2025)

2026.04.18 | 조회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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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밀플뢰르]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조응,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

겹쳐진 두 시간, 팔림프세스트

양피지(羊皮紙)는 고대, 중세를 책임지던 대표적인 기록매체였습니다. 다만 가죽이라 습기에 취약했고,값이 비싸다는 흠이 있었죠. 양피지로 책 한 권을 제작하기 위해선 수십 마리의 새끼 양이 필요하다고 하니까요. (이 대목에서 저는 희생되어야 했던 양들의 목숨에 놀랍니다. 그 시기 모든 문자는 무수한 피들을 그림자로 거닐고 있었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양피지를 재사용했다고 하죠. 최초의 글자가 새겨진 표면을 칼로 깎아낸 다음, 그 위에 새로운 글자를 적습니다. 그러나 먼저 적힌 글자는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아서, 글자 위에 글자가 덮어 쓰입니다. 흐릿하지만 잔존하는 문자들. 이렇게 재사용되는 양피지를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 부르더군요. 그렇다면 양피지는 단순히 하나의 기록만 보존한 것이 아니라, 기록들이 겹겹이 쌓인 역사매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선명한 전경의 텍스트와 어렴풋한 후경의 글자는 한 곳에서 공존합니다. 시간이 포개어집니다.

위 단락은 <기차의 꿈> 오프닝 시퀀스에 붙일만한 주석이라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엔 환한 출구를 향해 뻗어있는 터널 속 철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찌를듯이 높이 솟은 삼나무, 너울너울 흘러가는 실개천의 몽타주. 내래이션은 말합니다. “예전에는 구세계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 이제 그 구세계는 사라지고 없다. 두루마리처럼 말아 어딘가로 치워놓았다 해도 아직도 그 반향을 느낄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 아이다호의 깊은 숲을 배경에 두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벌목이 직업인 그레이니어(조엘 에저튼)입니다. 그레이니어는 나무를 베어낼 뿐만 아니라 철도를 놓는 일에도 투입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프닝 시퀀스, 나아가 영화 전체는 두 시간이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가문비나무, 삼나무, 곰과 물로 상징되는 구세계가 있습니다. 기차와 속도, 화약과 문명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덮어 쓰이고 있지만 구세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섬약하지만 잔존하는 세계. 중첩된 두 세계 사이에 그레이니어가 놓입니다.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KMDB]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KMDB]

납득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그레이니어

벤 다이어그램으로 치자면 두 개의 원에 모두 포함되는 그레이니어는 두 세계의 긴장과 갈등을 온 몸으로 통과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거창한 임무를 가진 캐릭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그저 성실한, 그리고 평범한 벌목꾼이에요. 그는, 이른 봄에서 시작해 늦가을까지, 짧으면 6-8개월에서 길면 9-10개월 정도되는 길고 강도 높은 작업 이후 녹초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가면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 덕분에 그 일을 견딥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작 2-3개월. 그 시간은 찰나와 같지만, 그 찰나가 나머지 강도 높은 노동과 긴 시간을 지탱해주어요. 영화의 내레이션은 그레이니어가 사랑하는 아내를 처음 만나고 결혼한 순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네요. “그레이니어의 삶에 갑자기 의미가 생겼다. 있는 힘을 다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다가 마침내 방향을 틀어 순항하는 것만 같았다.” 로맨틱한 문장이죠. 사랑은 단조로운 삶에 전구 하나를 켜는 일이라는 듯이요.

영화는 그레이니어의 삶에 켜진 빛을 한순간에 빼앗습니다. 거대한 산불에 그의 오두막과 가족이 모두 삼켜져 버린 것. 이제 그레이니어는 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체 왜? 왜 하필 내(가 아니라) 가족이지?’ 질문이면서 항의입니다. 당시 벌목꾼들 사이에서는 나무를 베는 일에는 자연의 응보가 따를 것이라는 불길한 믿음이 공유되었다고 해요.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다름 아닌 그레이니어 자신이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징벌에서 비껴나왔죠. 대신 영원히 슬퍼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비슷한 종류의 당혹감을 사람들은 안 피플스(윌리엄 H. 머시)의 죽음 앞에서도 가졌습니다. 그도 벌목꾼이었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무를 베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도끼날이 들어가는 순간, 나무가 쓰러지면서 자신에게 가할 복수를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안은 그가 베지 않은 나무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작업장의 관리자는 이렇게 말하네요. “저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납득을 못 하겠습니다.”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씨네21]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씨네21]

납득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자연

이 점에서 저는 <기차의 꿈>이 ‘상실을 견디는 사람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점을 고쳐야 합니다. 먼저 단순한 상실이 아닙니다. ‘납득되지 않는’ 상실입니다. 의문사 유가족에게 우울증이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연구도 있거니와 이해되지 않는 죽음은 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레이니어의 머리 위로 세월의 더께가 아무리 쌓여도 아내와 딸의 흔적은 여전히 그를 사무치게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가 하면 둘째. 저는 영화에서 상실을 당한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숲도 그레이니어와 비슷한 처지 아닌가요? 문명이 자신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가면서 터전이 불타거나 몸의 일부가 잘리고, 베어지며, 파괴되고 훼손되는 것은 자연이죠. 이것 역시 가족을 잃은 그레이니어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통각과 유사한 종류의 아픔 같은 것 아닐까요. 산림의 훼손과 파괴는, 그레이니어에게 닥친 우연처럼 어떤 성장이나 교훈, 의미 따위는 없는 무의미와 혼돈, 무자비한 살상이죠. 여하튼 그 기원은 인간의 탐욕이니까요. 무의미한 상실을 견뎌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생각도 인간 중심적 사고이긴 합니다. 자연을 인간의 쪽으로 끌어와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라면, 인간편에서 느낄 법한 통각과 생각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혀 비인간에게 대입해보는 것도 윤리적 태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팀 잉골드의 책 『조응: 주의 기울임, 알아차림, 어우러져 살아감에 관하여』(가망서사, 2021)을 보며 했습니다. 팀 잉골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별을 해체하고 평등을 강조할수록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전제가 드러난다며 신유물론의 한계를 짚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인정하되, 그럼에도 둘의 연결, 얽힘을 사유하자는 것이죠. 물론 자연에게 공허, 허망함 같은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아예 그것 자체일 겁니다. 하지만 공감을 통해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인간의 바깥으로 건너가는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연결과 얽힘은 이 소박한 공감에서 첫 발을 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해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운 비애를 느끼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레이니어가 아픈 만큼, 나무도 아픕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통곡이 터저나오는 것처럼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삼나무, 레드우드 앞에서 다른 자연도 함께 신음합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납득되지 않는 상실을 견디는 존재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레이니어가 설령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글래디스를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나무들이 불타고 베어진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것과 같지 않죠. 시간이 흐르고 그레이니어는 다시 현장으로 나갔지만 새로운 기술 앞에서 뒷걸음질칩니다. 일이 그에게 삶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또한 가열차게 진행되는 문명의 확장은 자연의 터전을 더 먼 곳까지 파괴해 버렸죠. 이토록 참혹한 시간에 의미는 있는 걸까요? 그저 무의미함을 견디는 것만이 전부인가요? 있다면 그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영화는 무의미 앞에선 자연과 인간을 두고, 관객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씨네21]
<기차의 꿈>(클린트 벤틀리, 2025), [출처: 씨네21]

조응,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

생각해보면 자연을 괴롭게 만든 원인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문제의 해결도 인간의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거예요.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소개해 드릴게요. 팀 잉골드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가 위기에 처한 것은 우리가 조응하는 법을 망각했기 때문”(33쪽)입니다. 조응한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그 무엇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29쪽) 예컨대 돌과 나무는 돌 아닌 것과 나무 아닌 것과 세계를 공유하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그 개체들은 모두 얽혀 있습니다. 이 얽힘으로 인해 각각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무엇도 고정된 존재(being)로 있지 않고 여전히 생성 중인(becoming) 상태로 있습니다. 조응한다는 것은 바로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엔 ‘나’만이 아닌 외부의 다른 존재자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존재자들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는 민감함을 갖추어야 할 거예요. 그렇게 외부로부터 내게로 오는 변화와 울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레이니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해답 쪽으로 걸어간 것 같아요. 그는 끝내 상실의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응하는 법은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불타 재가 되어버린 곳에 그가 망연하게 주저앉아 있을 때, 그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온 원주민의 호의를 받습니다. 당장은 호의의 따스함만을 느끼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나중입니다. 또한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강아지, 그와 함께 정서와 체온을 나누던 것의 의미 역시 그는 나중에 알아 차립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레이니어가 말년에 스포캔을 방문한 일화를 보여주어요. 그는 그곳에서 경비행기를 탑니다. 내레이션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봄날,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감각이 사라졌던 그때, 마침내 모든 것과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그때 그레이니어가 느낀 ‘모든 것과 연결됨’의 감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레이니어는 그순간 조응한 겁니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들과요. 이 조응의 범위는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원주민과 강아지, 자신도 남편을 잃은 아픔을 말하며 슬픔을 공유했던 클레어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처벌 받아야 하는 자신 대신 죽은 사랑하는 이들, 죄책감, 이름 없이 존재하다 간 평범한 사람들 넘어, 자신이 베어낸 숱한 나무, 돌, 물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고유한 개성과 특유성을 인식해내고, 그것의 변화와 생성의 과정을 알아차리며, 자신도 어느새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그는, 대기와 대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공중의 한복판에서 감각한 거예요. 삶의 무의미함이 나를 잠식해올 때, 그리고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이 훼손되어 갈 때, 이러한 연루와 얽힘의 감각이 해답일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그 감각은 마침내 그것들을 향한 책임감을 가져올 거예요. 그러고보니 이런 생각도 드네요. 어쩌면 세계 전체가 팔림스세스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고요. 우리 세계에서 섬약하고 희박한 것들은, 섬약하고 희박하게 있습니다. 흐릿해진 것 같아도 여전히 잔존합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밀플뢰르(millefleurs)는 직역하면 ‘천 송이의 꽃’인데요. 14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에서 융성했던 직조 방식으로, 벽걸이 양탄자에 작은 꽃들을 촘촘하게 배치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영화를 보며 떠오른 사유와 정동과, 기독교적 필터를 거친 해석을 한계없이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코너명에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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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4월 1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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