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190호

[최은의 ‘그 영화 봤어요?’] <프로젝트 헤일메리>(2026)

2026.04.04 | 조회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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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의 ‘ 그 영화 봤어요?’]

<프로젝트 헤일메리>(2026): 용기란 무엇인가

 

*주의: 영화의 결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서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알에이치코리아, 2021)를 읽다가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는 한 여성을 보았어요.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베스트셀러이고 제가 가진 책이 32쇄본이니 대한민국에서만 적어도 수만 명이 구입했을 터라서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텐데요,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 참 반가웠어요. 제게 주변머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마터면 다가가 말을 걸어버릴 뻔 했다지요.

“와, 저도 지금 거기쯤 읽고 있어요. 그 영화 보셨어요?”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지퍼로 잠긴 반투명 백 속에서 몸에 라인을 주렁주렁 달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정신이 아직 혼미합니다. 어렵게 몸을 일으킨 그는 보드에 글씨를 써가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씁니다. “나는 누구인가?” “친구는?” “여기 어쩌다가 왔는가?”라는 질문들이었어요. 영화는 그레이스가 우주에서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과정과 함께 그가 품었던 질문들에 답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나? 어쩌다 홀로 우주에서 깨어난 영웅

그레이스가 깨어나 발견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동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야오 선장과 일류키나, 두 사람의 시신뿐이었지요.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그는 자신이 우주에 와 있으며 인류의 운명이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그를 ‘페트로바 대책위’ 소속이라는 에바 스트라트(산드라 휠러)가 찾아오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죠.

‘페트로바선’은 금성에서 태양까지 이어진 붉은 선입니다. 이 선을 이루는 적외선 점들이 태양을 먹어치우고 있다는 건 그레이스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로 인해 30년 이내 지구 온도가 10-15도 정도 낮아질 것이고 인구 절반이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지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답을 찾고 있다고, 그레이스는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자기 자신이고 우주에서 머리와 수염이 도사처럼 자란 채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는 ‘어버버’ 상태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한때 촉망받는 분자생물학자였지만 지금은 학계에서 ‘왕따’가 된 그레이스에게 스트라트는 페트로바선의 검은 점 ‘아스트로파지’ 샘플의 성분 분석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곧 ‘헤일 메리’ 프로젝트에 그를 동참시킵니다. 주변 태양계 중 유일하게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되지 않은 ‘타우세티’에 탐사선을 보내 그 행성계만 건재한 이유를 밝히는 프로젝트였어요. ‘헤일 메리’는 미식축구에서 경기종료 직전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던지는 패스를 뜻하는 말입니다. 누군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 마리아시여!”를 외친 데서 유래했겠지요.

문제는 이 우주미션이 편도여행이었다는 거였어요. 대재앙까지 남은 시간도 지구에 무사귀환할 연료도 충분치 않았으므로, 헤일메리 호의 탑승자들은 최대한 빨리 답을 구해 무인탐사선 ‘비틀즈’에 자료를 실어 지구로 보낸 후 우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었어요. 일종의 자살 미션이었던 것이지요. 알 수 없는 이유로 임무 수행 전에 엔지니어와 비행사였던 일류키나와 야오 선장이 사망해서 이제 그레이스 혼자 남았던 건데요, 그레이스는 그 둘을 우주에서 장사지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들이 여기 있었으면.”

친구는? 어쩌면 ‘둘’일 수도 있었으나

영화 <마션>(2015)의 원작소설  『마션』의 작가이기도 한 앤디 위어는 이번에는 그레이스에게 동료들이 탄 구조선 대신 외계인 우주선을 보내줍니다. 돌투성이에 팔은 다섯이어서 거미 같기도 하고 게 같기도 한 외계생명체가 그레이스에게 다가왔어요. 눈으로 보는 대신 음파로 감지하고 장단의 리듬과 음조를 언어로 하는 그 생명체는 지구에서 ‘40에리다니’라고 불리는 행성에서 온 ‘에리디언’이었어요. 바위처럼 생겨서, 그레이스는 그를 ‘로키’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로키와 그레이스가 서로의 언어를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어휘를 늘려가는 과정을 지켜보자면 언어가 왜 ‘약속’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숨 쉬는 공기마저도 달라 서로에게 치명적인 환경 탓에 두 외계생명체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각진 유리공처럼 생긴 보호장벽이 필요했어요. 모든 불편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소통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단지 외로움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행성에서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멀리 떠나왔으며 둘 다 동료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는 점이 서로의 마음을 쉽게 열어주었어요. 그레이스와 로키는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의 목숨을 구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죠.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그레이스 기억의 회복에 따라 우리는 스트라트에서도 대해 조금 더 알게 됩니다. 헤일 메리 프로젝트가 자살임무라는 사실을 듣고 마음이 보들보들한 그레이스는 스트라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보내야 하다니) 많이 힘드시겠어요.” 였는데요. 냉정하기만 한 스트라트는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해요. 지구를 살리고 세계 인구의 절반을 살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동료들도 이 일에 기쁘게 자원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레이스가 보기에도 야오 선장이나 일류키나, 과학자인 드부아와 샤피로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다만 며칠 후 죽음의 길을 떠날 줄을 알면서도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그들을 지켜보는 중에 스트라트도 잠시 인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항공모함의 뱃머리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내려와 스트라트가 해리 스타일스의 노래 “Sign of the Times”를 구성지게 부를 때는 그 둘이 틀림없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스트라트는 역시 스트라트였습니다. 프로젝트 시행 사흘 전, 아스트로파지 폭발 사건으로 드부아와 예비탑승자였던 샤피로까지 사망하자, 스트라트는 주저없이 그레이스를 헤일메리 탑승 과학자로 지목했어요. 당신은 영웅이 될 거라고, 어차피 30년 후에는 당신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이 영광스러운 일에 헌신하라고 요청합니다. 실은 요청이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어요.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저 과학 선생일 뿐이고 용기라고는 없다고 내 일은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말이지요. 원작에서는 그레이스가 7천 명 중 한 명에게 있다는 ‘코마’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자의 보유자였다는 점도 강조가 되었지만 영화에서 스트라트는 조금 더 냉정합니다. “당신은 싱글이고 직계 가족이 없으며 반려견도 없잖아요.” 외로운 사람을 더 외로운 곳으로 보내 외롭게 죽게 만드는 것이 인류애 실천을 위한 스트라트의 영웅 선별방식 중 하나였다고나 할까요.

결국 스트라트는 도망치려는 그레이스를 붙잡아 코마상태로 헤일메리 호에 태워보냈어요. 자신이 자원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그레이스는 내내 괴롭고 부끄러웠겠지만, 친구인 줄 알았던 스트라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은 그보다 훨씬 컸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고도 내가 목숨 걸고 이 미션을 계속 수행해야 할까 고민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원작에서 네덜란드인이었던 에바 스트라트를 굳이 동독 출신이라고 밝힌 이유는 뭐였을지 슬쩍 궁금해지는군요. 산드라 휠러가 <추락의 해부><존 오브 인터레스트><아임 유어 맨><시빌> 등으로 너무나 유명한 독일 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일단 생각해보려고 합니다만.)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여긴 어쩌다가? 인류애와 우정 사이에서 찾은 ‘용기’

<인터스텔라>의 유명한 대사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처럼, 여러 위기와 서스펜스와 경이로운 순간들을 거쳐 영화는 그레이스와 그의 귀여운 돌 친구 로키를 각자의 별로 무사귀환 시킬 것으로 예상되었어요. 하지만 그레이스에게 현실은 끝까지 다정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인류의 오랜 서사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도 집에 가고 웬디도, 앨리스도, 피노키오도 집으로 돌아오지요. <인터스텔라>의 아버지도(비록 동료를 위해 다시 떠나지만) 돌아와서 딸과 재회하고요,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도 <마션>의 맷 데이먼도 무사귀환 했지만, 지구를 구한 우리의 영웅 그레이스는 차라리 <판도라>의 제이크 셜리가 되기로 합니다. 그레이스는 어렵게 출발한 귀향길을 멈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유턴’을 시도했어요. 위험에 처한 친구 로키를 구조하고 그레이스는 바로 그 친구의 행성에서 살게 됩니다. 로키는 그레이스에게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어요.

끝내 친구가 될 수는 없었던 스트라트와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구를 살린 것은 ‘비틀즈’였어요. 이런 유머와 위트가 참 좋습니다. 존, 링고, 조지와 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무인 우주선 네 척에는 감염된 태양을 구할 ‘타우메바’의 배양기와 그레이스가 우주에서 얻은 모든 지식과 경험이 담겨 있었어요. 그들이 지구를 향해 떠날 때 흐르는 비틀즈의 노래 “Two of Us”의 가사는 참으로 적절하고도 중의적입니다. “Not arriving, on our way back home... We’re going home...” 우리가 다 알게 되듯이, 집에 돌아가는 것은 비틀즈이고, 그레이스는 이제 ‘남의 집’에 가게 될 운명이죠. 여기서 영화는 나를 가장 아끼는 친구가 있는 우정의 시공간이 최고의 ‘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프로젝트 헤일메리>(필 로드&크리스토퍼 밀러, 2026) [이미지출처] KMDB

모든 영웅들이 다 귀향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오디세이’ 서사에서 주인공들이 출발시점보다 성숙해지듯이, 비록 그레이스의 귀향은 상대적으로 열린 결말로 남아 있으나, 그레이스도 마지막엔 달라져 있습니다. 그의 영웅됨과 성숙을 표현하는 핵심어는 ‘용기’였어요. 학자 시절부터 갈등을 피해 숨어들었고 자원해서 인류를 구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그레이스는 외계의 친구 로키에게 아마도 처음으로 “그레이스, 용감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어쩌면 그레이스는 영웅으로 성장한 것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여느 슈퍼히어로 영화들처럼, 그리고 스트라트의 기대처럼, ‘내가 인류를 구할 바로 그 사람이야’ 라는 각성이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는 인류를 구하는 지구의 영웅이 되기보다(그런 거라면 ‘비틀즈’가 있잖아?!) 내 친구를 살리러 가겠어‘ 라는 데 그 용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위대해졌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구뿐 아니라 에리다니까지 구한 두 세계의 영웅이 되기도 했고요.

어쩌면 그레이스는 처음부터 용기가 없었던 것이라기보다는 용기를 사용할 사람과 상황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거 아닐까요.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는 복음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용기는 곧 사랑이겠네요. 영웅심의 발로나 인류애와 같은 대의명분이나 강요된 희생이 아닌,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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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4월 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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