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중캉의 생태주의로 영화읽기
<퍼스트 리폼드>(2017) -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모기영에서 만난 인생 영화가 있습니다. 제 2회 모기영(주제:괜찮지 않다)에서 소개한 폴 슈레이더 감독의 <퍼스트 리폼드>입니다. 기후위기와 생태적 멸절에 관해 너무도 무관심한 채 침묵하고 있는 기독교회를 바라보며 한참 신음하던 시기였던지라 저에게는 마치 구원과도 같은 영화였어요. (반갑게도, 이 영화의 풀버전이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네요. 못보신 분들을 위해 맨 아래에 링크를 달아두었습니다.)
나아지지 않는 현실 앞에 깊히 절망한 환경운동가 마이클과 그를 상담하게 된 지역교회 목사 톨러는 ‘주님께서 과연 우리를 용서하실까?’라는 질문 앞에 동화되어가지요. 한편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삶’만을 쫓는 대형교회는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삼는 에너지회사와 유착관계를 이루며 기업의 생태적 범죄에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주인공 톨러의 몸이 병들어가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우리 모두의 ‘몸’인 지구도 죽음의 목전에 있을 만큼 병들어가고 있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예언자들이 울리는 경종(Toller)에 귀기울이지 않는 현실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영화 <퍼스트 리폼드>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과 해석은 제3회 모기영의 평론상 최우수 수상작, 그리고 모기영 유튜브에 올라온 모기월담 포럼 영상의 내용을 확인해 보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이클의 절박함
마이클과 톨러가 처음으로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마이클의 뒤로 나열된 소품들이 전달하는 정보들은 지난 30년 간 과학자들이 집중적으로 경고해 온 대표적인 이슈들을 나타냅니다. 화석연료 사용 이후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기후 그래프, 인류 거주가 불가능한 2050년의 지구환경,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 플라스틱 바다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해양생물들의 이미지는 마이클의 심연 깊은 곳에서 곪아가는 자연세계에 대한 연민과 고통을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생태계의 고통 앞에 절규하며 어쩔줄 몰라하던 마이클의 절망과 분노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테러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몸에 대한 테러로 분출됩니다.
함께 영화를 본 이로부터 ‘그래도 폭탄조끼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환경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한들, 상식적인 해결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나 마이클의 행동에 대해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해석의 요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 내면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순수한 영혼의 절박함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수만가지의 방법을 동원해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세상과 교회 앞에서 더 이상 상식의 언어는 역부족이라 여겨졌던 것이겠지요. 생명세계를 향해 인류가 일찍부터 시작한 잔혹무도한 테러행위를 도무지 온전한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이겠지요. 너무도 절박한 나머지 폭발해버린 환경운동가의 상처받은 마음에 이제는 우리도 얼만큼은 물들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폭탄 조끼를 입자는 말은 아니지만요.)
순수를 갈망하는 예언자의 처절함
톨러와 메리가 극적인 키스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의미를 남깁니다. 분노와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톨러의 영혼을 결국 위로하고 구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메리로 대변되는 어머니의 몸, 바로 자연세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포옹이 완성되기 위해 톨러의 몸을 감고 있는 고난의 가시는 그의 몸을 더 많은 피로 물들이게 되지요. (원래 이 가시 철조망은 교회 안으로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쳐놓은 울타리였다는 것을 발견하셨나요? 톨러는 그동안 자연세계와 그토록 철저히 분리되어 온 교회의 모습을 참회하며 자신의 몸에 가시 울타리를 둘렀던 것이죠.)
순수를 갈망하는 예언자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처절한 고통과 고난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장면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영화 내내 흐르는 생태적인 주제의식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처럼 절묘하게 연결한 장면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톨러의 몸에 걸쳐진 가운 위로 선명한 핏자국이 퍼져가는 것을 보며, 이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처절한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진정한 개혁(first-reformed)의 교회로서 다시 한 번 거듭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봄의 날을 기다리는 고난의 사순절에 오늘 우리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를 <퍼스트 리폼드>를 통해 묵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탈성장’으로 가는 길
자칭 생태주의자인 저에게 요즈음은 어떤 키워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누군가 질문해왔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탈성장’이라고 답했습니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에너지를 아끼는 개인적인 실천과 노력이 상징적인 차원에서의 의미는 있지만 마이클이 절망하는 2050년의 인류거주불능의 지구가 도래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스템의 전환이 유일한 해답일테니까요. “탈성장? 그럼 자본주의를 폐기하자는 말인지?” / “네, 탈성장은 탈 자본주의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어요.” / “…” 도무지 그런 세상은 상상해보지 못하겠다는 듯 그분은 근심하며 떠나가셨죠.
‘상상해보지 못함’ 바로 그 이유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생태적 멸절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근본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속성을 극복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상상해보지 않았지요.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습니다.(프레드릭 제임슨)
그럼 이제부터 모두 극단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자거나 문명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인가요? 우선 저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보고싶은 영화가 많거든요!) 탈성장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니 그렇게 무시무시한 아이디어는 아니더군요. 오히려 참 신나는 상상이었습니다. 그동안 ‘자본축적’에 한정되었던 경제의 의미를 전환해서 ‘인간의 필요와 생태적 안정성’에 두자는 개념이거든요.
결코 그런 세상은 올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그 분을 저는 결국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의 차이라기 보다, 절박함의 차이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 세계의 흐름은 점차 바뀌어가려는 듯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보다 지구생태계가 겪는 절박함을 더 우선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로부터 말이죠.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전하는 신나고도 절박한 제안이 궁금하시다면, <적을수록 풍요롭다>(제이슨 히켈, 창비), <디그로쓰>(요르고스 칼리스 외, 산현재)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모기수다 시즌2 ]
🎬 3월의 모기수다에 초대합니다!
모기영의 영화감상 모임인 ‘모기수다’는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 3시에 모입니다.
3월의 모기수다는 자비에 돌란 감독의 <단지 세상의 끝>(2016)입니다.
📍 시간 : 2023년 3월 11일(토) 오후 3시 (3시~5시 영화감상 / 5시~6시 감상나눔)
📍 장소 : 바람이불어오는곳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 5층, 501호)
📍 참여신청 및 문의 : 모기수다 시즌2 오픈 카톡방 / 강원중 사무국장 010-2567-4764
* 모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오픈 카톡방에 부담없이 입장하셔도 됩니다 :)
봄볕 좋은 토요일 오후,
함께 영화보고 즐거운 수다 나누시는 것 어떠실까요?
새단장을 마친 소담한 공간,
'바람이불어오는곳'에서 기다릴게요 :)
글 /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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