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낯선 것을 낯설게 두면서: 공존과 상생에 관한 시론
*결말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퍼스트 리폼드>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이번 글도 닮은꼴 영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폴 슈레이더의 <퍼스트 리폼드>(2019)입니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담임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스스로 목숨을 던진 환경운동가 마이클(필립 에팅거)의 사명을 이어받고, 그 자신도 테러로서 이 세계를 훼손한 인류의 죄악을 참회하고 경고하려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보이지 않게 폭탄 조끼를 입고서 퍼스트 리폼드 교회 250주년 봉헌예배에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나타난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발견하고는 돌연 조끼를 벗습니다. 대신 그는 뾰족한 가시가 박힌 철조망을 몸에 감고 메리와 깊은 포옹을 나누는데요. 영화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서사의 내적 인과율을 초과한 이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오래 고민한 기억이 있네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로 생태계에 끼친 인간의 과오를 성찰하게 만들어요. 물이 맑고 깨끗해서 ‘여기서 우동가게를 하려 한다’고 하면, 이곳 사람들에게 ‘뭘 좀 안다’며 칭찬 받는 곳, 사슴과 꿩이 다니며, 굴밤 나무, 층층나무, 소나무, 오갈피나무와 같은 다양한 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 문명의 오염에 덜 노출된 이곳에, 불현듯 위기가 닥칩니다. ‘플레이모드’라는 연예기획사가 글램핑장을 만든다는 거예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주민설명회를 갖긴 했지만, 정작 주민이 궁금해하는 질문과 요청하는 대책에 관해서 그들은 회피하거나 기업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주민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그들은 ‘공존과 상생’이라는 명목으로 그 사업을 밀어붙이려 해요.

결산하는 자연
사업설명회에서 마을회장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상류에서 한 일은 하류로 흐릅니다. 상류에서 벌인 행동은 결국 엄청난 결과를 가져와요.” 이 말을, 자연과 인류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전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예컨대 이기와 욕망을 상징하는 연예기획사가 상류라면, 그 행동의 결과를 받는 자연은 하류일 거예요. 그렇다고 자연이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훼손한 인간의 잘못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그 죄악을 결산할 때를 기다립니다. 여기서의 결산은 결말에서 주어져요. 이제 문제적인 결말을 말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마을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하나(니시카와 료)인데요. 방과후 픽업 시간을 자주 깜박하는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을 탐색하는 똘망똘망하고 활기찬 아이입니다. 타쿠미는 하나가 숲속 어떤 곳에 있어도 아이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타쿠미는 하나를 찾는 데 실패합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하나를 찾는 데 동원되고, 기업에서 나온 타카하시(코사카 류지)도 도움을 보태요. 사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평소 같았으면 고즈넉하게 들렸을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카메라는, 손전등을 들고 수색에 열중한 마을 사람들에게서 빠져나와 타쿠미와 타카하시 두 사람을 따라갑니다. 안개가 내려앉은 탓에 흐릿한 형체가 겨우 보이는 먼 곳에서, 하나와 두 마리의 사슴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슴의 몸에 탄환이 관통한 상흔이 있네요. 겁이 많은 야생 사슴이 인간을 마주치면 보통은 도망가지만, 되려 공격하는 경우는 총알이 빗맞았거나, 빗맞은 새끼 사슴을 둔 어미 사슴이라던 타쿠미의 말이 생각납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를 구하기 위해 타카하시가 서둘러 움직이는 순간,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붙잡고 목을 조릅니다. 그를 살해하려는 듯이요.

질문이 시작됩니다. 타쿠미는 하나를 구하려는 타카하시를 왜 죽이려는 걸까. 사슴과 마주보는 것 같았던 하나는, 다음 장면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데요. 하나는 죽은 걸까. 간신히 의식을 되찾고 일어난 타카하시는 위태롭게 걷다가 다시 쓰러지는데, 그도 정말 죽은 걸까.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어둑한 밤 하나를 안고 숲을 향해 달려가는 타쿠미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주면서요.
이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 타쿠미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선 존재라고요. 마을의 심부름꾼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곧 그 자연의 심부름꾼, 그런즉 자연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연을 대리하는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공격함으로써, 기업을 타격합니다. 타카하시가 기업을 대리하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타쿠미는 설명회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글램핑장을 세우려는 그들의 시도는 곧 균형을 깨트리는 침입이라고 느낀 걸까요. 그럼 이 결말은, 자연은 자연의 대리인인 타쿠미를 통해 자신에게 가해진 인간 문명의 억압과 박해를 반격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고 저는 금방 헛헛해집니다. 이것으로 영화가 납작해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저는 방금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문장을 염두에 두고 적었습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텐데, 나에게 그것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책머리에) 제 헛헛함의 기원을 알 것 같지 않으신가요. 저의 해석으로 영화의 일면이 드러난 것 같긴 하지만, 그것으로 영화가 더 심오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해석자인 제게 문제가 있는 걸까요.

공존과 상생의 해석학: 낯선 것의 낯설음
이번에는 다른 길을 가볼까 합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어둑한 길일 것 같군요.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하나를 발견한 시간은 밤입니다. 영화의 서사에서 밤의 시간대가 나온 장면은 (제 기억으로는) 두 군데밖에 없습니다. 글램핑장 건설에 관한 사업설명회가 있기 전날 밤, 마을회장의 집에서 대책회의가 열린 장면과 실종된 하나를 발견한 결말의 장면이에요. 불명확함, 불명료함을 특징으로 갖는 밤이어서 그런지, 그 밤에 사람들은 다른 존재의 정체성을 경계하거나 탐색합니다. 마을사람들은 ‘플레이모드’의 정체를 구하고, 인간은 사슴과 하나의 흐릿한 형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쥔 이성과 도덕이라는 손전등으로 주변을 탐색하지만, 그것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보자기만한 범위일 뿐. 밤이 숨겨둔 모든 것들을 드러낼 순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영화의 결말에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죽음도, 타쿠미의 죽임도, 타카하시의 죽음도, 문명의 침입과 자연의 반격도, 그리고, 악도 선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거대한 밤의 보자기만한 일부는 아닐까요.
저는 지금 낯선 것을 어떤식으로건 이성과 질서의 세계 안으로 포섭하려는 해석에 관한 인간의 욕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오래 고민하며 해석을 시도할수록 그것은, 자연을 향한 인간 문명의 욕심과 비슷한 양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내가 접촉한 불확실한 것을 기어이 납득 가능한 것으로 가지런하게 만들려는 자의식의 범위는 어디까지 뻗어나갈는지를 조심스럽게 반성하면서 말입니다. 진정한 ‘공존과 상생’은 낯선 것을 낯설게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요.
글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9월 13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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