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징글징글해도 다시 마주하는 관계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2
제목부터 이목을 끄는 이 영화는 속옷까지 공유할 수 있는 사이, 모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모녀 사이라고 하기엔 일반적이지 않는데요, 영화의 초반부터 독기 어린 눈빛과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손찌검, 독설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202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대상을 비롯해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회자 되는 이유는 모녀를 둘러싼 일반적인 통념을 넘어서 부모-자식 관계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어서입니다.
수경이라는 여자
영화는 이정(임지호)이 세면대에서 속옷을 손빨래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수경(양말복)은 그 화장실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볼일을 보고는 입던 팬티를 이정에게 던져주고, 이정은 수경의 눈짓에 빨던 팬티의 물을 짜서 다시 수경에게 건네주지요. 보통 누군가의 속옷을 빨아주는 장면은 엄마가 자식의 빨래를 해주는 설정으로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수경의 팬티를 빨아주는 사람은 딸 이정이었습니다.
첫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수경은 전형적인 어머니상에 어긋나는 엄마입니다. 이정의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을 챙겨주지 못한 이유가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빠서라기보다는 딸에게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요. 살림보다는 자신을 꾸미는데 더 관심있는 수경은 복분자를 소주에 타 마시면서 밝히듯, “곱고 맑게, 낭만적으로” 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녀의 앙칼진 말투도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종열(양흥주)과 데이트를 할 때면 그게 가능한 듯 여겨지죠.
하지만 집에 들어와 이정을 마주하는 순간, 마치 신데릴라의 마법이 풀리듯이 수경은 현실로 돌아옵니다. 전기세를 걱정 해야하고 돌보아야 하는 자식이 있다는 그녀의 현실을 자각하게 되죠. 어쩌면 그녀에게 딸 이정은 과거 선택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은 일찍이 사라지고 그 책임만 상기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사과를 요구하는 딸
평소 죽어버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가 자신을 차로 들이받은 그날부터 이정은 더 이상 엄마를 참아줄 수 없었습니다. 급발진을 주장하는 엄마의 의견을 반박하는 증거자료를 모으고 법정에 증인으로 서면서 엄마에게 사과를 요구하지요. 물론 수경은 자신의 차를 타고 다니고, 자신의 팬티를 입으면서 사과하라는 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요. 그 과정에서 이정은 회사동료 소희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신세를 지게 되면서 소희의 원룸이 집보다 편하다고 여깁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남보다 못한 가족?!
불편하리만큼 끝까지 치닫는 이 모녀 관계는 어쭙잖은 화해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한 관계를 탈피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던 모녀는 각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죠.
수경은 종열과 재혼을 준비하면서 종열의 딸과 사사건건 부딪힙니다. 때릴 거면 몇 대를 때릴지 정해서 매로 때리라는 딸에게 해방되나 싶었는데 이제는 맞기는커녕, 뒷담화했다고 사과를 요구하는 남의 딸을 거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죠. 자기중심적이고 자유분방한 수경은 어떤 집에서 살던 인생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한편 이정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희에게 연락하고 찾아가는 횟수가 잦아집니다. 이에 거리를 두는 소희에게 “내가 얼마나 힘든데 왜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냐”고 서운해하고 소희는 말없이 이직해버리죠. 의존적이고 애정결핍에 집착하는 이정은 누구도 나를 다 받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가족 혹은 하우스메이트
“엄마, 나 사랑해?” 라는 이정의 진지한 물음에 놀랍다는 듯이 한참을 웃던 수경은 다음 날, 이정이 짐을 싸서 나간 것을 확인합니다. 홧김에 나간 것도, 쫓겨난 것도 아닌, 엄마 곁을 떠나 독립한 것이었지요. 별일 없다는 듯이 집안일을 하던 수경은 욱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했던 리코더를 가져와 불기 시작합니다. 제법 빠르고 어려운 곡을 연주하는 리코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제서야 수경이 욱하는 성질을 죽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집을 나와 독립한 이정은 속옷 가게를 찾습니다. 그동안 숨을 참으며 자신의 사이즈도 모른 채 살던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신체에 맞는 속옷을 입게 되겠지요.
영화의 말미에 목욕을 하던 수경이 정전이 되자 이정을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말 없이 핸드폰 후레쉬로 엄마의 알몸을 비춰주는 딸의 시점 샷은 어떤 감정이나 욕망을 찾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문득 아이의 똥이나 오줌같은 배설물을 처리했던 기억과 엄마의 때를 밀어줬던 기억, 그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몇 개월 대소변을 도우셨던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말하는 속옷을 공유하는 관계란 아주 내밀하고 개인적인 부분이라도(더럽다고 여겨지는) 자립할 수 없는 상태라면 도울 수 있는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꼭 애정 어린 감정만 남아있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를 떠나 부모-자식의 그 오묘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 모기수다 시즌2 ]
🎬 가득찬 모기수다, <단지 세상의 끝>(2016)
3월의 모임은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모기수다, 정말 즐겁고 유익하기로 점점 소문이 나고 있다죠~?) 자비에돌란 감독의 <단지 세상의 끝>을 함께 보고 저마다의 감상을 나누었는데요, 가족들 간의 애증을 그린 영화여서 그런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등장인물 마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다양해서 정말 풍성한 시간이 되었지요. 이어지는 모기수다도 정말 기대가 됩니다! (4월의 영화 <매스>(2021), 프란 크랜즈)
* 공간과 음료, 간식 등을 위한 최소한의 회비를 책정하게 되었습니다. (회당 5천원, 2~10월 일시 납부시 3만원, 모기영 정기후원자 무료)
곳곳에 꽃 봉오리가 피어오르는 3월입니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을 이겨내고 움트는 새싹을 들여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뭐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생명력을 느낄 때 밀려오는
어떤 감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봄이 선사하는 감동 만끽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 박일아 프로그래머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3.3.18.토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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