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중캉의 생태주의로 영화읽기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 제국의 정원에 뿌려진 피의 노래
올 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 바깥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나치 사령관 가족의 모습을 묘사해 낸 영화입니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루돌프 회스 사령관 부부의 목가적인 일상을 지켜보지요. 그러나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생자들의 참혹한 울부짖음과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태운 검은 연기의 존재가 부부의 부유하고 평온한 일상이 어떤 비극의 자리에 서 있는 지를 더욱 선명하게 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영화는 인류사의 가장 잔혹한 폭력을 자행했던 이들을 악마적으로 대상화하여 관객과 분리시키는 대신 그들을 그저 평범한 욕망을 가진 보통의 존재들로 그려냅니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자녀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기를 소망하는 회스 부부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을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으로 우리 앞에 재현하지요.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쩌면 나의 안온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을지 모를 평범한 악의 얼굴을 마주하며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가 과거의 비극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는 죄악을 우리가 마주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중인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 조나단 글레이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소감
현재진행형인 홀로코스트와 제국적 생활양식
악의 평범성, 비인간화의 희생자, 빛나는 저항정신. 그 모두가 ‘그 때의 그들’이 아닌 ‘지금 우리’의 자리를 향하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철저히 현재를 비추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수상소감에서 가자지구의 피흘리는 얼굴들을 소환했지만, 반복되는 비인간화로 인해 양산되는 희생자들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도무지 끝을 맺기 어렵겠지요.
그 목록에 세계의 기후약자들과 멸종위기 생명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극한의 더위를 체감한 올 여름을 보내며 에어컨 아래 나의 안온한 일상이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선 자리에 펼쳐져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영화를 보며 우리의 ‘무관심지역’에서 무너져가는 생명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제의 책,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의 페이지들을 넘기며 영화가 전하고 있는 비인간화와 오늘날 생태 붕괴의 현실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겹의 회색 벽 너머 들려오는 희생자들의 비명을 애써 모른채하는 가해자들의 모습 속에서, 남반구에서 자행되는 굶주림과 폭력을 외면한 채 그들을 쥐어짜고 더 극심한 고통 속으로 빠트리는 북반구 자본주의의 제국적 생활양식을 떠올리게 됩니다. 국가의 권고에 따라 모범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 더 가열차게 학살 기계를 고안해내는 회스 사령관의 무감각한 충성심 속에서, 경제적 자유와 안정을 최고의 모범 가치로 내세우며 얼마 남지 않은 국토의 생태계를 끝까지 파멸하려고 하는 야멸친 자본정부의 풍경이 겹칩니다. 학살이 일상이 된 담장 곁에서 뛰놀며 폭력을 내면화한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생태감수성을 잃고 자연과 벗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슬프게 겹칩니다. 비인간화에 희생당한 약자들의 절규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오늘날의 지옥도 속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저항을 촉구하고 있는걸까요?
나치의 에코파시즘
회스 사령관은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동물과 자연을 몹시 애정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아들과 함께 야생 조류를 관찰하기를 즐기며 독특한 새들의 이름과 울음소리를 모두 구별해내지요. 산책중인 이웃의 강아지가 사랑스러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르고 있는 말에게는 인간 이상의 깊은 애정과 교감을 표현합니다. 아기에게 정원에 핀 꽃의 이름을 하나씩 일러주는 그의 아내의 모습까지 포함하자면, 영화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회스 부부의 목가적 취향과 생태감수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송희일의 책에서 그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을 ‘에코파시즘’이라는 언어로 소개합니다. 19세기 말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농촌이 붕괴되는 와중에 환경 파괴를 걱정했던 이들은 뜻밖에도 나치와 같은 극우세력이었고, 자연이라는 순수성과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게 만나며 인종 대학살이라는 기구한 풍경이 펼쳐졌다는 설명이지요.
요약하자면, 생태적 멸절과 환경파괴의 원인을 식민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 찾지 못하고(않고), 애꿎은 이웃과 타민족에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 우리가 맞딱드린 전 지구적인 생태계 붕괴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이나 ‘인류’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착취를 야기한 자본주의 구조, 그리고 그 거대한 기계 속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는 이들에게 단호한 심판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식민제국주의로부터 비롯된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를 개혁해 내고 새로운 세상의 춤판을 벌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오백여 페이지의 글을 통해 촘촘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발견하는 희망의 온기
암흑으로 시작해서 암흑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조처럼, 기후위기를 맞딱드린 우리의 세계에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티핑포인트의 마지노선인 1.5도 한계선을 이미 돌파한 와중에도 세계의 탄소배출량은 줄어들기는 커녕 여전히 가파른 그래프로 상승하고 있지요. 기후부정론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제 생태주의의 언어를 가져와 난민의 출현이 기후위기를 가속화시킨다며 이방인 혐오를 주창합니다. 젊은이들은 불타는 지구 속에 내 자녀가 살게 할 수 없다며 출산 포기를 선언하고 있지요. 아니나 다를까 올 여름은 정말로, 이제 과연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여름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염려하게 되는 날들이었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함께 읽은 책도, 영화도, 절박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저항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매일 밤 암흑 속에 숨어서 수감자들이 먹을 식량을 숨겨둔 소녀의 용기와 온기처럼, 우리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며 이 지독한 어두움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저항의 노래는 강처럼 흐르고, 우리의 몸짓은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펼쳐내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지요.
[모기책방 시즌2 OPEN!]
글 /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4년 8월 19일 월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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