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간모기영 179호

[원중캉의 생태주의로 영화읽기] <당나귀 EO>(2022)

2025.09.27 | 조회 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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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중캉의 생태주의로 영화읽기

<당나귀 EO>(2022)

 

당나귀의 눈으로 다시 보는 세계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영화사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그의 영화 〈당나귀 EO〉(2022)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당나귀이지요. 어딘가 어색하고 엉성한 영화의 흐름 속에서 어찌보면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한 주제를 말하는것 같기도 하고, 또 그 이면에 난해한 해석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숨은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말을 하지 않고, 복잡한 감정 연기를 보여주지도 않는 한마리의 당나귀가 어떻게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스크린 속 EO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 선택이야말로 지극히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당나귀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의 첫 장편이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잡지에 소개되었을 때, 그해 최고의 영화로 꼽힌 작품은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였습니다. (이 영화 이후에 당나귀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면, 반드시 브레송의 영화를 경유하여 해석해야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영화이지요.) 그 영화를 보던 순간 스콜리모프스키는 생애 처음으로 영화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눈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아니라, 말 없는 당나귀의 존재 그 자체와 그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위선과 잔혹함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감독은 〈당나귀 EO〉라는 영화가 바로 그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밝혔습니다. 절제된 서사와 동물의 시선으로 인간 세계를 비추려 했던 브레송의 그림자를 이어받으면서도 오늘날의 세계가 가진 모순과 위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시 쓴 영화인 것이지요.

로베르 브레송 <당나귀 발타자르>(1996)의 마지막장면 갈무리
로베르 브레송 <당나귀 발타자르>(1996)의 마지막장면 갈무리

영화속에서 우리는 당나귀 EO의 걸음을 따라다니며 낯선 순례를 경험합니다. 서커스에서 관객을 즐겁게 하던 EO는 동물 보호법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가 그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새로운 방랑의 시작이 될 뿐이지요. 경기장에 모인 시끄러운 군중의 함성, 삭막하고 폭력적인 농장의 풍경, 차갑고 어두운 수송트럭, 끝내 도축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게 되기까지 당나귀 EO의 여정은 인간 사회의 단면들을 차례로 스쳐 지납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처럼 당연한 풍경들이 EO의 눈높이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로 드러납니다. 축구장의 열광은 폭력과 광기로 변하고, 농장의 질서는 착취와 억압으로 읽히며, 도축장은 문명의 효율성이자 동시에 죽음의 통로로 비쳐집니다.

출처 : dmovies.org
출처 : dmovies.org

이 영화가 가진 더 큰 강렬함은 카메라와 관객, 관객과 대상의 관계 속에서 던지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에 있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딘가 엉성하고 아리송하게 느껴집니다. 과장된 카메라 무빙과 과도한 조명의 사용 때문이지요. 영화는 관객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만큼 다분히 의도적으로 과장된 카메라워킹을 보여줍니다. 또 영화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로봇 강아지가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감독 자신이 밝힌 바도 그러하지만, 많은 평론이 이 대목에서 발견하는 것은 비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기술적 노력(카메라)조차 오히려 더욱 자연과의 타자성을 더욱 깊게 발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카메라는 아무리 이오의 눈을 바짝 클로즈업하여도 이오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의 렌즈와 이오의 눈을 동일시하여 이오의 시점인 양 시점 숏들을 들이대도 이오의 눈을 대체할 수 없으며, 이오를 비롯한 짐승의 시점에서 짐승의 움직임을 따라하여도 여전히 기계로 남을 뿐이다. 이 씬의 존재로 인하여 영화 전반적으로 회상 내지 꿈처럼 등장했던 그 모든 숏들마저 이오가 한 회상 내지 이오가 꾼 꿈이 아니요, 바로 카메라가 자신이 이오라 망상하며 꾸었던 꿈임이 명확해진다. 카메라가 수없이 많은 재현의 시도로 발버둥치더라도, 그 수없이 많은 재현의 시도는 로봇을 분열시킨 수없이 많은 거울처럼 카메라를 수없이 많이 좌절시킬 뿐인 것이다.’

- 왓챠피디아 유저 양기연의 감상평

출처 : dmovies.org
출처 : dmovies.org

이러한 영화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영화의 표면에 있는 동물보호의 메시지뿐 아니라 보다 깊은 생태주의적 성찰을 만납니다. 당나귀 EO는 인간이 그 내면을 이해하거나 도구화할 수 없는 하나의 고유한 존재라는 발견이지요. 하지만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그를 수단화합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그리듯 EO는 인간의 노동력을 위해, 때로는 소비 그 자체를 위해, 심지어는 그저 오락과 폭력의 대상이 되기 위한 존재로 여겨지지요. 그리고 그러한 풍경을 인위적인 시선을 통해 지켜보는 관객들의 연민조차도 때로는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영화는 새롭게 짚어냅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의 형식으로도 철저히 구현해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출처 : dmovi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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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EO〉의 결말은 희망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 비극성을 통해 영화는 강렬한 울림을 남기지요. 서두에 썼듯, 영화는 연기하는 배우도 아니고, 그것을 관찰하는 카메라도 아닌 당나귀 EO의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게끔 만드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카메라와 스크린의 장막을 넘어 EO의 눈동자를 진심으로 ‘바라본’ 관객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인간과 동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게 되지요. 그 여운은 스크린을 벗어나 우리의 식탁과 소비 습관, 나아가 삶의 태도 전체를 흔들어 놓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상당수의 스태프들은 육식과 동물 소비를 줄였다고 하지요. 이런 것을 예술적 충격과 체험의 힘이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출처 : dmovi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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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환경과 생태라는 언어조차 인간중심적인 도구로 변모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나귀 EO가 제시하는 새로운 영화적 체험처럼, 여전히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생태주의가 아니라, 생명들의 눈망울 그 자체를 온전히 들여다보고자하는 마음가짐이 절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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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중

편집디자인 /  모기영 편집부

2025년 9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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