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11. 덴마크 영화 어디까지 봤니?

덴마크 영화, 어디까지 봤니?

덴마크는 북유럽의 작은 국가지만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데요. 덴마크 영화의 시작은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덴마크 영화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한 세기 전부터 영화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한 셈이죠. 덴마크에서 첫 영화 상영은 1896년 6월로 오늘날의 영화 제작 ・ 배급 방식을 정립한 프랑스 루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첫 영화 상영을 했던 시기와 비교해도 겨우 6개월 늦었을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영화산업이 얼마나 이른 시기에 시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06년에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활동하며 북유럽을 대표하는 제작사 노르디스크 필름(Nordisk Film)이 설립되어 장편영화 제작과 영화 수출을 통해 덴마크 영화 산업이 유럽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는데요. 무성영화 시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칼 테오도르 감독 역시 노르디스크 필름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스웨덴 영화산업이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덴마크 영화산업도 국가의 지원을 통해 성장했는데요. 1966년에는 덴마크 국립 영화 학교(Den Danske Filmskole)를 설립하여 영화 ・ TV ・ 애니메이션 등 여러 분야에서 인재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21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라스 폰 트리에를 비롯하여 토마스 빈터베르, 수잔 비어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감독들 모두 덴마크 국립 영화 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입니다. 1973년에는 덴마크 영화 협회(Danish Film Institute)를 설립, 덴마크 영화 제작 산업 전반을 지원하고 있어요. 감독뿐만 아니라 두각을 나타내는 배우들도 많은데요. 한식당을 찾아 혼밥 만렙 능력을 선보이며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던 매즈 미켈슨을 가장 대표적인 덴마크 배우로 꼽을 수 있겠네요. 더불어 <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으로 익숙한 비고 모텐슨 역시 덴마크 배우입니다.

덴마크 영화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4명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대형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방식과 감독의 개성을 중요시하던 작가주의 영화에 반기를 들고 영화의 순수성에 집중하고자 한 「도그마 선언 (Dogma 95)」을 발표하며 영화사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이는 작은 영화 시장에도 덴마크 영화가 꾸준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는 영화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도그마 선언」에는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10가지 계명이 명시되었는데요.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35mm 카메라로 핸드헬드 촬영하기’, ‘효과음 및 특수효과 사용하지 않기’, ‘시간과 공간 뛰어넘기 금지’, ‘엔딩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기’ 등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 본연의 자연스러움에 집중하고 있어요. 거대 자본을 앞세운 상업영화에 반기를 들고 작가주의 이후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을 받지만,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제약이 많다는 비판도 존재하는데요. 주축이었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역시 이 점을 인정하며 현실성보다 의도가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도그마 선언」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 만든 영화 <셀레브레이션>으로 칸 심사위원 상을 받은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 역시 이후에는 규칙에 완전히 반대되는 영화를 제작하며 「도그마95」의 파괴를 선언하기도 했고요.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은 덴마크 대표 배우로 불리는 매즈 미켈슨과도 인연이 깊은 감독이자 가장 좋아하는 덴마크 감독이기도 합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는 수위 높은 장면과 영화 속에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감상하기 쉽지 않은데요. (그만큼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나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품을 추천하기 어려운 감독으로 꼽힙니다.) 반면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의 작품들은 비교적 입문하기 쉬운 편이라 추천하기에도 좋은 작품이 많거든요.

빈터베르 감독은 덴마크 국립영화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는데요. 졸업 작품이었던 <마지막 라운드>는 덴마크 대표 영화상인 로버트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단편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어요. 「도그마 선언」에 입각해 제작한 <셀레브레이션>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더 헌트>로 매즈 미켈슨에게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안긴 것은 물론 작품의 빼어난 영상미를 인정받아 촬영 감독이 벌칸상을 받았고요. (벌칸상은 미술 ・ 음향 ・ 촬영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적인 성취를 보여준 작품에 수여되는 상으로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최초로 벌칸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되었어요.) <더 헌트> 이후 오랜만에 매즈 미켈슨과 함께 한 <어나더 라운드>로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는 물론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모두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건재함을 입증했습니다.

매즈 미켈슨은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덴마크 배우가 아닐까 싶어요. 특히 미중년 배우를 논할 때 꼭 언급되죠. 얼굴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분위기라 다양한 캐릭터를 폭넓게 소화하며 많은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매즈 미켈슨이 배우가 된 것은 꽤 늦은 나이로 연기 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10년간 프로 댄서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의 댄스 실력은 최근작 <어나더 라운드>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여담으로 포커도 굉장히 잘 친다는데 그냥 잘 치는 수준을 넘어 덴마크 국가대표로 활동했다고 해요.

자국에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은 후 2004년 안톤 후쿠아 감독의 <킹 아더>로 할리우드에 진출, 이후 <발할라 라이징>,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등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요.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2006년 개봉한 <007 카지노 로얄> 입니다. 정갈하게 쓸어 올린 머리와 딱 떨어지는 슈트핏, 뛰어난 포커실력과 여유로운 미소까지. 역대 007시리즈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악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상적인 악역으로 얼굴을 알린 작품이 <007 카지노 로얄>이라면 그에게 배우로서의 정점을 안겨 준 작품은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과 함께 한 <더 헌트>를 꼽을 수 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아동 성학대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유치원 교사 루카스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는데요. 억울함과 분노를 섬세하지만 강렬한 연기로 표현해내며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매즈 미켈슨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캐릭터는 ‘한니발 렉터’라고 생각하는데요. 지적이고 우아한 외면 뒤에 살인은 물론이고 식인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캐릭터를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로 완벽하게 소화하며 전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하게 되었으니까요. 특히 작품에서 선보였던 슈트핏은 다수의 남성 패션지에서 분석 기사를 내놓았을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 헌트 (The Hunt)>, 토마스 빈터베르, 2013년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온 유치원 교사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 할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를 둘러싼 한 소녀의 사소한 거짓말이 전염병처럼 마을로 퍼지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광기 어린 맹신, 집단적인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의 <더 헌트>는 성범죄 무고에 대한 영화로 치명적인 오해 하나로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동학자의 실제 문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실제로는 없었던 성추행 후유증을 보이는 모습이나 아이들이 루카스네 집의 지하실에 대해 진술하지만 실제로 집에 지하실이 없었던 사실 등 영화 속에 등장한 사건들은 모두 해당 문서에 기록된 실화라고 해요. 매즈 미켈슨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21세기 마녀사냥의 한 형태로 공동체 정의가 항상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소셜네트워크상에서 정확한 근거와 확인도 없이 퍼지는 거짓 정보와 허위 소문, 편향된 주장이 남발하는 요즘 사회에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지는 영화입니다.

선량한 인물로 평가받던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친구의 딸이자 자신이 근무하는 유치원의 원생인 클라라의 거짓말로 인해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리게 되고,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가까웠던 친구들과 동료, 애인까지 모두 그를 의심하고 외면하기 시작하는데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집단의 지나친 맹신은 폭력으로 이어져 루카스의 삶을 망가트리게 됩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초반부에 보여준 후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는 오만과 그 오만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일삼고 정의라고 치부하는 것이 얼마나 섬뜩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공동체가 거짓을 부정당해서는 안 되는 진실로 만드는 과정은 영화의 제목처럼 사냥과 닮았어요. 그러나 동시에 관객들에게 과연 나라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진실과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 아래 표출되는 분노가 과연 정당한 것이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함부로 심판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죠.

영화를 보는 내내 고구마 백 만개를 사이다도 없이 먹은 것 같은 답답함과 불편함이 느껴졌는데요. 평론을 보고 이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클라라의 거짓말을 듣고 어른들은 이성적으로 사태를 파악해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지나친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이가 거짓말을 실토해도 ‘끔찍했던 기억이 무의식을 차단한 것’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른들의 믿음에는 악의가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거예요. 누구나 아이가 아닌 어른을 거짓말하는 존재로 인식하니까요. 이러한 ‘이성의 역설과 광기로 인한 합리적 부조리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하는 거죠. 그리고 자신들의 이성이 부정당한 집단은 비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마녀사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마을 공동체로 가족적인 유대감으로 결합되어 있는데요. 오프닝 호숫가 수영 장면은 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며 “개인에게 박해나 폭력을 가하는 대상이 개인과 몰랐던 사이거나 다른 곳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그와 동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때로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더 헌트>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매즈 미켈슨의 눈빛 연기가 돋보였던 교회 신과 함께 마지막 장면을 꼽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도 엔딩 신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요.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이 소문으로 인해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매도당하면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공동체로부터의 오해가 완전하게 풀릴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사자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만큼이나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뉴스를 보다 보면 ‘무죄추정의원칙’이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면피의 구실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되지만 “100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가 명확하게 이해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토마스 빈터베르, 2020

같은 고등학교에서 역사,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사 마르틴, 톰뮈, 니콜라이, 페테르는 의욕 없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열정마저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우울하기만 합니다. 니콜라이의 마흔 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마르틴이 실험에 들어갑니다. 인기 없던 수업에 활력이 넘치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아진 마르틴의 후일담을 들은 친구들이 모두 동참하며 직장과 가정에서 인정받는 교사와 가장이 되기 위해 점차 알코올 농도를 올리며 실험은 계속되는데요. 과연 술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의 결말은 어떻게 끝이 날까요?

<어나더 라운드>는 ‘혈중알코올농도 0.05%가 되면 더 적극적인 성격이 발현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시도하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알코올에 대한 가설은 스콜데루드 박사가 서문을 쓴 알코올의 효능을 담은 책에서 소개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인간은 애초에 0.05%의 알코올이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0.05%의 알코올을 채워야 정상적인 형태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일종의 상상 실험으로 사실에 근거한 이론은 아닌데 감독의 시나리오가 재미있어 영화화를 허락했다고 해요.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고 이후 세자르 영화제,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에서 모두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미국판으로 리메이크가 확정되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디카르프리오의 연기가 저만 기대되는 걸까요?)

영화는 원래 알코올이 없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에 대한 상상으로 시작하는 술에 대한 찬가 정도였는데 감독이 딸에게서 고등학생들의 자유로운 술 문화를 듣고 각본을 수정해 지금의 내용이 되었다고 해요. 딸의 모교에서 촬영했고, 극 중 학생들도 같은 반 친구들이며 딸이 마르틴의 딸로 출연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촬영 전 전방주시태만 운전자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음주에 대한 찬가에서 술로 삶의 활력을 찾아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시나리오가 다시 한번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감독은 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의 영감이 되어 준 딸에게 고마움을 표함과 동시에 그리움을 드러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기도 했어요.

영화는 술을 마셔야만 했던 40대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가설을 실험하는 단계를 따라가며 전개됩니다. 1단계 가설은 적정량의 알코올을 섭취했을 때 삶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가에 대한 실험으로 결과는 성공적입니다. 마르틴과 니콜라이는 무료했던 수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아이들의 집중력과 참여도를 끌어올리며 무기력하고 무능력해 보였던 교사의 모습에서 벗어나죠. 2단계는 개인의 혈중알코올농도 실험으로 처음 정했던 규칙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술에 빠져들게 됩니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고, 가설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3단계는 최대 혈중알코올농도 실험으로 궁극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까지, 즉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셔봅니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하는 그림과 다르지 않습니다. 통제를 벗어난 이들의 삶과 실험은 처음과 달리 망가지고 애써 다시 쌓아 올린 관계도 부서지게 되죠.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알코올 향이 배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나친 음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처럼 보이지만 술을 매개로 “정형화된 삶 속에서 간과하고 있던, 진정으로 삶을 살아있게 하는 의지를 일깨우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권태에 빠져 열정을 잊어버렸던 사람들에게 권태의 탈을 쓴 음주 상태에서 깨어나 ‘Another Round’를 시작하라고 외치는 것 같아요. 영화는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 키르케고르의 격언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란 말을 비추며 시작하는데요.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사랑하는 꿈을 꾸는 동안에는 청춘이란 의미가 된다고 해요.“영화에서 청춘을 잃어버리고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주인공들이 알코올로 위기를 극복해보려 하며, 결국에는 사랑 즉 청춘을 상징적으로 다시 찾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이동진 평론가님은 빈터베르 감독이 어떤 이유에서 알코올에 대한 상상 실험에 집중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이 삶에서 가진 행복의 양과 상태에 희망을 품은 이론으로서 술은 즐거움 ・ 쾌락 ・ 행복을 상징한다 가정하고, 우리는 행복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술로서 강제로 항상 행복한 상태를 인간의 기본값으로 만들어 준다”는 거죠. 그리고 주인공들의 가설 진행 과정과 일말의 사건을 통해 “사실 삶은 무조건 행복할 수 없고, 고통과 위기는 필연적인데 인간의 삶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믿음이 오히려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요. 개인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제가 왜 항상 남들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된 명쾌한 해설이라 인상적이었어요.

<어나더 라운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대부분 매즈 미켈슨의 황홀한 댄스 장면을 고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친구의 죽음과 아내와의 관계 단절까지. 춤을 출 상황이 아님에도 매즈 미켈슨의 마지막 춤사위는 보는 이들에게 어떤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 같았거든요. 전문 댄서로 활동했던 매즈 미켈슨의 춤 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라 더 기억에 남기도 했습니다.

Epilogue

<더 헌트>와 <어나더 라운드>는 모두 매즈 미켈슨의 호연이 빛나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더 헌트>는 무거운 주제만큼 감정 소모가 큰 영화라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에는 쉽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면서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라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어나더 라운드>는 가벼운 음주를 부르는 영화이기도 했는데요. 저 같은 알쓰에게도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주말 저녁 스콜데루드의 가설처럼 ‘0.05%의 부족한 혈중알코올농도’를 채우고 싶은 분들께 적극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앤더스 토머스 얀센 감독의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TV 영화채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작품이었는데요. 시원시원한 액션 신에 사로잡혀 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복수극 이면에 숨겨진 반전과 복수극이 불러온 예상치 못한 연쇄적인 사건에 몰입해 감상했어요. 복수라는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 인간의 본성과 가족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인 영화이기도 한데요. 자신이 볼 수 있고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추측한 것이 사실이라 맹신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시원한 액션과 유머를 곁들여 힘있게 표현했습니다. 북유럽 영화뿐만 아니라 유럽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외적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관객들이 고민해 볼 만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건데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방식은 쉽고 다양해졌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노출될 위험도 높아진 만큼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사고와 무조건적인 맹신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앞서 소개 한 두 편의 영화와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작품이자 매즈 미켈슨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돌진하는 시원한 액션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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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 자료 출처 표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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