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등용문, 선댄스 영화제
선댄스 영화제는 매년 1월 20일을 전후로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개최됩니다. 올해로 40회째를 맞아 1월 18일부터 28일까지 (미국 현지일 기준) 열리고 있어요. 사실 선댄스 영화제의 전신 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가 있는데요.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리던 이름 없는 영화제가 그 주인공입니다. 해당 영화제를 로버트 레드포트가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영화제 이름은 본인이 출연했던 작품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ce Kid)>에서 맡은 배역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해요.🤓 이후 ‘선댄스 협회(Sundance Institute)’를 설립, 1985년에는 미국 영화제를 흡수하면서 지금의 선댄스 영화제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댄스 영화제는 가치관과 방향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영화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주로 다양성 영화에 초점을 두고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위주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대형 영화사들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과 배우들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아 신인 감독과 배우들에게는 중요한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특히 작품이 영화제에 채택된 후 베를린이나 칸과 같은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선댄스 재단이 설립된 이후에는 ‘인디 영화 육성’에 집중하며 재단을 통해 시나리오가 선정되는 경우 제작비를 지원하고 다음 해 영화제에 자동으로 출품해 배급사와 제작사 혜택 등을 받을 수 있는 등 말 그대로 ‘영화계의 등용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이 많은데요. 윤여정 배우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미나리> 역시 선댄스를 통해 주목받았습니다. <미나리>는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모두 수상한 케이스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 이후 6년 만의 동시 수상이었다고 해요. 이외에도 <코다>, <스크래퍼> 등이 모두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들입니다. 국내 영화는 <지슬>이라는 작품이 2013년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두가 본 영화나 상을 받은 영화가 관람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감상의 폭을 넓히는 방법으로 영화제를 통해 주목받은 작품을 보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로맨스만 좋아하던 편협한 관객이었지만😂 영화 뉴스나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작품을 시작으로 영화제 수상작들을 찾아보면서 지평을 넓혀나가는 중이거든요. ‘상’이 주는 유명세에 매몰되기보다 심사위원들의 긍정을 이끌어낸 지점과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한다면 영화 감상의 폭 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드릴 2편의 작품은 <유 캔 카운트 온 미>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입니다.
유 캔 카운트 온 미 (You Can Count On Me)
케네스 로너건 감독, 2000년 개봉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취향도 연애 관계도 극과 극인 남매가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면서 겪게 되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합을 그리고 있습니다. 9호 레터에서 소개했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연출한 케네스 로너건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데요. 캐네스 로너건은 브로드웨이에서 이름을 알린 극작가로 감독 데뷔 이전에는 몇몇 영화에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이력이 있습니다.
📹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는 로너건 감독이 가져온 시나리오에 반한 제작자들이 그 자리에서 판권을 계약하고 캐스팅부터 로테이션까지 참여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요. 선댄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베니스와 아카데미까지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누나 새미와 남동생 테리로 새미 역에는 <러브 액추얼리>로 익숙한 로라 리니가, 테리 역은 마크 러팔로가 맡았습니다. 마크 러팔로의 경우 <유 캔 카운트 온 미>를 통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게 되었어요. (물론 국내에 얼굴을 알리게 된 작품은 <비긴 어게인>과 이후 마블 사단에서 나오게 될 작품이지만요…) 그리고 새미의 아들이자 테리의 조카 루디는 로리 컬킨이 맡았는데요. 크리스마스만 되면 전 세계에서 찾아 헤매는 케빈을 연기한 맥컬리 컬킨의 남동생입니다.
📼 줄거리
아들 루디를 홀로 키우는 새미는 태어날 때부터 자라온 뉴욕 근처 스코츠빌에서 살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지역 은행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활동하는 평범한 여성으로 작은 마을에서도 사회적 제약이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녀에게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서로 의지하며 지내온 남동생 테리가 있지만 테리는 그녀와는 반대로 마을을 옮겨 다니며 방랑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리가 불쑥 찾아오고 오랜만의 재회에 설레어하는 새미와 달리 테리는 돈을 빌리러 왔다고 말하며 모처럼 함께 지낼 거라 생각했던 새미의 기대를 무너트립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잠시 누나의 집에 머물게 된 테리는 내심 고향에 정착하기를 바라는 누나의 바람과 달리 조카 루디를 데리고 내기 당구를 치러 가거나, 술집에 가는 등 엉뚱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말썽만 일으키는 테리와 테리의 행동으로 인해 루디까지 상처를 받게 되자 새미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 마리의 리뷰
새미와 테리 남매는 정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미는 정착하는 삶을 테리는 길 위를 떠도는 방랑자적 삶을 지향하는데요. 영화는 두 사람의 대비되는 성향과 그로 인한 갈등을 부각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서로를 향한 애정과 이해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외부와 접근성이 떨어진 소도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도 묘사하고 있는데요.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만큼 가족 같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관찰할 수 있기에 감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나 새미는 이러한 마을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동생 테리는 견디기 힘든 구속을 느끼는 거죠.
🎞️ 마리’s Clip
"내가 어딘가에서 또 바보 같은 짓을 해도 누나가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할게. 이제는 다 잘될 거야. 언젠가 또 누나 보러 올게."
테리, <유 캔 카운트 온 미>
영화를 보는 동안 왜 제목이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일까 궁금했는데요. 서로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갈등 이면에 결코 바래지 않을 서로를 향한 믿음이 자리한 남매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테리는 영원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디에 있건 항상 자신을 기억하고 돌아가면 반겨줄 누나 새미라는 뿌리를 가졌고, 새미 역시 동생이 어디에 있든 고향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무한한 애정으로 맞아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함께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오스카 그랜드의 어떤하루 (Fruitvale station)
라이언 쿠글러 감독, 2013년 개봉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영화화한 실화 바탕의 작품으로 라이어 쿠글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100만 달러 미만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는데 북미에서만 1,61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평론가들의 호평과 흥행까지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 비하인드 스토리
감독인 라이언 쿠글러와 주연을 맡은 마이클 B. 조던은 해당 작품을 통해 유명해졌는데요. 마이클 B. 조던은 이후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하며 라이언 쿠글러의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마블 영화를 즐겨보지 않아서 감독과 배우 모두 해당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요.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나 독립영화에도 꾸준히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이었어요!) 여담으로 마이클 B. 조던은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이름, 성, 인종까지 똑같아서 활동할 때 미들 네임을 넣어 꼭 ‘마이클 B. 조던’이라고 표기한다고 해요.
📼 줄거리
2008년 12월 31일. 22살의 오스카는 새해를 앞두고 불법적인 일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할 결심을 합니다. 합법적인 직장을 구할 결심, 여자친구에게는 프러포즈할 결심, 딸에게는 사랑을 듬뿍 주는 당당한 아버지가 될 결심, 생일을 맞은 엄마에게는 믿음직한 아들이 될 결심을 한 하루의 끝자락. 모처럼 새해 카운트다운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나선 길에 그의 인생을 뒤바꿀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마리의 리뷰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지하철역에서 벌어진 과잉진압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원제목이기도 한 프루트베일 역(Fruitvale Station)이 실제 사건이 벌어졌던 역 이름입니다. 외화는 국내 개봉과정에서 원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개인적으로 원제목보다 더 좋았던 타이틀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꼽고 싶을 만큼 영화의 스토리와 메시지가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오스카 그랜트는 새해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예기치 못한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출동한 경찰들이 싸움에 연루된 사람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테이저건으로 오인해 발사한 권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된 후 사망하게 되는데요. 실제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비무장상태의 흑인 청년을 향해 색안경을 끼고 과잉진압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사건에 대한 감독의 견해를 주입한다거나 오스카의 죽음을 섣불리 동정하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오스카 그랜트의 마지막 하루를 공들여 재구성해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나쁜 길에 빠지기도 했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청년의 어떤 하루를 보게 됩니다. (제목 그대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폭력이 초래하게 되는 결말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이러한 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그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감독은 사건이 발행한 후 오스카가 ‘한 번도 나쁜 짓을 한적 없는 성직자’ 혹은 ‘죗값을 치른 괴물’로 양분되어 그의 인간적인 부분이 지워져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의 삶이 사회 안에서 이토록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오스카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고 밝히며 영화를 통해 오스카 그랜트의 삶이 녹아있는 하루를 밀도 있게 그리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실제 사건이 벌어지고 영화로 만들어 진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감독이 이야기한 '오스카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결코 가볍게 넘겨지지 않습니다.
🎞️ 마리’s Clip
"내가 지하철 타라고 했어요. 내가 시킨 거예요. 아들이 다칠 줄 몰랐어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을 겪게 될 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독이 왜 오스카의 하루를 이토록 공들여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영화를 보는 내내 ‘만약에’라는 가정이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불꽃놀이를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갔더라면, 만약에 낮에 마트에서 만난 여성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 오스카 엄마의 후회는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누군가의 일상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폭풍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잔해를 남기기 마련이니까요.
Epilogue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미나리>, 정이삭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가족이 아칸소 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미국사회에 뿌리내리는 이야기로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입니다. 2020년 선댄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국내에서는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를 통해 미국배우조합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이어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건을 제외하고 대체로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미국 영화임에도 오히려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더 많은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제목마저 낯선 <미나리>가 외국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가족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2편의 영화와 함께 보기 좋은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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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자료 출처 표기방식)
- 영화의 줄거리는 '네이버 영화 소개'란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 개봉년도는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제작년도를 기준으로 합니다.
- 김소희(영화평론가), “유 캔 카운트 온 미”, 씨네21, 2001-12-11
- 선댄스 제단 공식 홈페이지
- 씨네21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제작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