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6. 20세기 로맨스

Issue 6. 20세기 로맨스와 노라 에프론

20세기 로맨스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노라 에프론인데요. 2016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로맨스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항상 회자되고 로맨스 장르를 즐겨보지 않는 이들도 제목은 들어본 유명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노라 에프론은 기자, 수필가,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그녀의 작품은 리얼리티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모던한 로맨스 영화가 많은데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 흥행에 성공한 로맨스 영화들이 모두 그녀의 손에서 탄생했어요. 로맨스 장르에 특화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으로 알려졌지만 저널리스트로 먼저 활동했고 당시 출간한 작품들은 냉소적이고 신랄한 사회드라마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존재감을 알린 작품 역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여성 노동자 카렌 실크우드의 실화를 영화화한 <실크우드> 였고요.

그녀의 첫 롬콤(romcom)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는데 이후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망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연출에도 참여하며 감독으로도 데뷔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녀가 집필하고 연출한 대표작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이죠. 로맨스 영화에 흔히 갖는 편견 중 하나가 ‘뻔하디뻔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인데요.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에프론 특유의 유머와 풍자, 세련되고 지적인 취향, 예리한 통찰력에서 나오는 공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거든요. 수상은 못했지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고요.

노라 에프론이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은 꽤 늦은 나이였는데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때가 47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메가폰을 잡았을 때가 51세였습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동생 델리아 에프론과 함께 집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노라 에프론의 부모님도 유명 작가였고, 두 동생도 작가로 여동생 델리아 에프론과는 많은 영화를 함께 작업하며 할리우드의 브론테 자매로 불렸습니다.) 노라 에프론은 동시대 여성들의 경험과 욕망에 귀 기울이며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낸 작가이자 감독으로 평가받습니다. 나이와 성별이라는 한계를 규정짓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도전해 왔던 그녀의 인생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투영되었기에 나온 평가라 생각합니다.

김혜리 평론가님은 “세계의 영화사를 정리할 때 노라는 언급되지 않겠지만 미국인들이나 우리 개개인이 소장하고 싶은 영화를 꼽을 때는 그녀의 영화가 선사한 추억 때문에 가슴에 길이 남을 것”이라 했는데요. 그녀의 로맨스 영화에서 유쾌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기에 많은 관객이 그녀와 그녀의 작품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도 같은 이유로 그녀의 작품들을 좋아하고요. 그중 지금도 다시 찾아보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유브 갓 메일>을 소개합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롭 라이너, 1989년 개봉

대학 졸업 후 뉴욕 행 차를 나눠 타게 된 해리와 샐리.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명제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성격도 취향도 정반대인 서로를 별종이라 생각하며 뉴욕에 도착한 후 짧은 인사만 나누고 헤어집니다. 몇 년 후,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또 한 번 재회하지만 역시 짧은 대화만 나눈 채 헤어집니다. 샐리는 오랫동안 만나 온 연인과 이별하고 해리는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 받은 후 서점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 뒤에야 둘은 친구가 됩니다. 남사친과 여사친으로 우정을 이어가던 두 사람. 헤어졌던 연인의 결혼 소식에 슬퍼하는 샐리를 해리가 위로하다 뜻밖의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면서 둘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오는데요. 해리와 샐리는 친구일까요, 연인일까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우연히 알게 된 사이인 해리와 샐리가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며 밀고 당기는 썸을 지속하다 결국 연인이 된다는 전형적인 롬콤 영화입니다. 뻔한 스토리지만 주연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 훌륭한 각본과 연출, 가을에서 겨울까지 이어지는 뉴욕의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져 지금까지도 20세기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하면 떠올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저는 레터를 준비하면서 벌써 3번째 다시 본,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TOP5 안에 들어간답니다.😆

영화는 중간중간 노부부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서로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마지막 인터뷰이는 해리와 샐리였습니다. 두 사람의 시작과 끝이자 영화의 모든 줄거리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죠.

오은영 박사님이 내린 남사친과 여사친에 대한 정의를 들어 본 관객이라면 영화 속에서 해리와 샐리가 친구가 된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결말은 예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해리가 샐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 역시 오은영 박사님이 정의 내린 남사친과 여사친에 대한 결론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이야기는 로맨스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소재이기에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능글맞고 재수 없는데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해리를 연기한 빌리 크리스탈과 매사에 똑 부러지는 성격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조금 어리숙한 사랑스러운 샐리를 연기한 맥 라이언, 두 사람의 연기가 진부한 소재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바꿔주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의상과 소품 등 곳곳에서 20세기 아메리칸 레트로 무드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는데요. 오랜만에 20세기 로맨스 감성에 젖어보고 싶은 분들, 그리고 아직 로맨스 영화에 입문하지 않은 분들 모두에게 추천해 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유브 갓 메일>, 노라 에프론, 1998년 개봉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조와 캐슬린은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NY152와 SHOPGIRL이라는 ID로 두 사람은 서로의 일상과 취미를 공유하고 뉴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조와 캐슬린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캐슬린은 동네 모퉁이에 있는 아동 서점의 주인이고, 조는 맨해튼 대형 체인 서점 폭스 북스의 사장으로 새로운 체인점을 캐슬린의 서점 근처에 오픈할 계획이죠. 폭스 북스는 박리다매와 편리한 서비스로 캐슬린의 서점을 위협하고, 조와 캐슬린은 서로 펜팔 친구인지도 모른 채 앙숙이 됩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서점이 문 닫을 처지가 되자 캐슬린은 NY152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유브 갓 메일>은 노라 에프론이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작품이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호흡을 맞췄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재회해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결말 등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두 주연배우의 케미와 뉴욕의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져 마음을 설레게 하는 로맨스 영화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영화는 고전 <모퉁이 가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리메이크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원작에서는 서로 티격태격하는 직장동료가 알고 보니 펜팔을 주고받는 설정이었다면, <유브 갓 메일>에서는 서로 다른 서점을 경영하며 원수가 된 두 남녀가 호감을 갖고 메일을 주고받았던 사이로 바뀌었어요. 원작은 로맨틱 코미디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원작의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역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대가로 꼽힌답니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연출과 재치 있는 대사 등은 ‘루비치 터치’로 불리며 그만의 독자적인 연출 방식과 인물 설정은 이후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아요. 영화 속에서 캐슬린이 운영하는 서점 ‘The Shop Around Corner’는 원작의 영화 제목을 오마주 한 거랍니다.😊

서로의 얼굴을 모른 체 메일을 주고 받던 두 남녀가 알고 보니 으르렁대던 원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어진다는 스토리 라인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대형 서점이 동네 소형 책방을 문 닫게 만든다는 설정이나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스타벅스 등의 요소는 미국의 거대자본이 소상공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화두가 될만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원작이나 감독의 전작과 비교했을 때도 <유브 갓 메일>은 아쉬운 평이 두드러지는 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관객들이 두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 마음을 몽글몽글 설레게 만드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캐서린의 내레이션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아이돌 덕질을 하며 팬카페에서 만난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와 펜팔 친구가 된 적이 있는 데요. 시험 망친 이야기, 부모님께 혼난 이야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펜팔이 주는 묘한 셀렘을 느꼈었는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되새겨보게 된 장면이에요. 해당 내레이션의 배경음악으로 The Cranberries의 ‘Dreams’ 이 흘러나오는데 장면과 곡이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참고로 해당 곡은 <중경삼림>의 배경음악으로 유명한 ‘몽중인’의 원곡으로 원곡과 번안곡 모두 찾아서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려요!

Epilogue

로맨스 장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 함께 설레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표독스러운 악역이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도 제가 로맨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뻔한 클리셰로 점철되어 있어도 결국에는 ‘두 남녀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된다는 점도 좋고요. 노라 에프론의 로맨스 영화들은 여기에 자신의 철학과 삶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에 더 재밌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녀의 작품 속 여주인공들은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 같은 인물이기보다 진취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고 당차게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사랑 앞에서 흔들리고 상처받아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서는 용기도 지녔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노라 에프론은 자기 작품 속 주인공들이 책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녀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읽는 책과 보는 영화나 TV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데 현실 세계를 그리는 영화에서 그런 대화가 빠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죠. “영화는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자서전의 한 구절을 써 내려가는 셈 (씨네21 인터뷰 발췌)”이라고요. 누군가에게는 뻔한 로맨스로 치부될지라도 노라 에프론의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기억될 영화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저마다의 자서전을 써봤기 때문일 것 같아요.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고전 로맨스의 명작으로 꼽히는 <러브 어페어>를 각색한 작품이기도 해요. 그래서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러브 어페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러브 어페어>는 1932년 처음 만들어진 후 무려 4번이나 리메이크된 고전 중의 고전으로 영화 속에서 애니가 매일 밤 보는 영화이기도 한데요. 애니가 보던 버전은 데보라 카와 캐리 그랜트가 주연을 맡은 1957년 작이랍니다. 애니가 샘과 만날 장소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고른 이유도 바로 이 영화 때문이기도 해요.😉 기회가 되신다면 1957년 버전 <러브 어페어>도 감상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해당 버전은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클리셰가 모두 들어있음에도 노라 에프론 감독 특유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감성이 함께 녹아있어 많은 이들의 인생 로맨스 영화로 꼽힙니다. 엔딩 크레딧에 흘러나오는 ‘When I Fall in Love’도 정말 좋답니다! 공기에서 겨울 향기가 느껴질 무렵이 되면 자동으로 생각나는 캐럴처럼 겨울과 참 잘 어울리는 곡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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