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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이 파티 준비를 위해 꽃을 사러 나가면서 시작되어 그날 저녁 파티가 끝날 때까지, 단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 그녀의 삶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상쾌한 아침 기분을 느끼며 과거에 살았던 바닷가의 집 부어톤에서의 날들을 떠올리고 애정을 주고받은 사람들과 추억이 많았던 그리고 자신의 청춘을 보냈던 그 지역에서의 일화들, 뜻깊은 시간을 함께한 주변인들이 이날 하루 종일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길에서 마주친 옛 친구 휴,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돌아온 피터, 자신의 안정적인 삶의 버팀목인 남편 리처드, 그리고 특별한 옛 친구 샐리 등 과거의 파편들은 현재의 그녀를 알려주는 단서들처럼 등장합니다.
쉼 없이 진행되는 댈러웨이와 피터, 그리고 셉티머스, 레지아, 그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기억하고 싶고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싶은 문장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막상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에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이 책을 즐기는 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책의 해설이나 작품 설명에서 죽음과 삶의 화해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고,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여성의 해방을 넘어 인간의 해방에 대한 이야기라는 부분도 기억에 남았지만, 두 번 완독 후 제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는 건, 댈러웨이 부인의 삶과 사랑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삶에 대한 애착
이야기의 아주 초반 댈러웨이 부인은 기분 좋은 아침의 상쾌함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런던의 상징적인 빅밴이 종을 울리는 순간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하며, 종전 후 다시 활기를 찾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다양한 상념들을 쏟아내면서 삶을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이런 그의 태도를 인지하고 나면, 이 뒤로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 피하고 싶은 사람들, 사랑했지만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파티를 계속해서 열고 사람들을 만나는 클러리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변 인물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클러리서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존재감이 큰 사람입니다. 현재 중년의 나이임에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우아한 모습은 여전히 길에 나가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세상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며, 그 어디에도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리고 자신을 본연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건 주변의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피터처럼 자신의 속을 투명하게 다 아는 사람과는 결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다 생각하며, 오히려 조금 겉돌더라도 우아하게 자신의 영혼을 혼자만의 것으로 보호하기를 원하죠.
클러리서는 파티를 열고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고 흥겨운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일종의 종교적인 '베풂'의 의식과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무언가를 ‘베푼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좋은 것을 남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행위일 거예요. 즉, 그녀에게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나저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를 느끼는 것, 결국 삶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녀는 삶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클러리서의 모습은 어쩌면 ‘삶’ 앞에서 가장 솔직한 태도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 사실은 삶을 사랑하지 않던가요. 괴로워도, 외로워도, 억울하거나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을 겪어도, 미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고통스러워도, 대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죽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본능에 따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한편, 삶을 사랑하는 클러리서는 죽음을 선택한 셉티머스의 이야기를 접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택한 그를 이해하며 그의 선택에서 대리만족을 느끼죠. 자신이 택한, 현재 주어진 삶에 대한 선택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그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잠시 셉티머스의 소식을 듣고 상념에 빠졌던 그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요. 파티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어울립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 장면은 클러리서가 지닌 삶에 대한 애정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애착 그 이상의 강한 인류애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온전히 타인을 인정하는 것,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내가 속한 삶을 한걸음 떨어져 관조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능하며, 동시에 강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죠. 저는 클러리서 역시 셉티머스만큼이나 삶의 고통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삶과 죽음에 대해 같은 무게를 두고 있다고 느꼈어요. 산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허무할 수도 있으며 결국 언젠가는 사라질 유한한 시간이지만, 결국 자신은 삶을 사랑하는 쪽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클러리서를 속속들이 아는 피터에 의하면, 그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정치를 비롯 그 어느 중요한 사회적 안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없고, 여느 교양 있는 부인들처럼 손으로 하는 그 어떤 일에도 재주가 없지만, 사람들을 진심으로 맞이하고 적절한 태도로 대하는 그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안주인’이라고 할 만해요. 피터는 클러리서와는 거의 소울 메이트에 가깝지만 왜 클러리서가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클러리서의 특별한 영혼과 세속적이고 알맹이 없어 보이는 끊임없는 상류사회의 파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클러리서는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봤어요. 내가 감히 간단히 넘을 수 없는 큰 산처럼 느껴지는 막막한 장애물이 앞에 있을 때, 결국 우리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죠. 방향이나 목표가 확실치 않을 때 우리의 최선은 그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언니가 죽는 모습을 목격한 뒤 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고 종교를 믿지 않는 클러리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택한 방법은 결국 자기가 할 수 있는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이었어요. 가장 큰 재능이며 가장 수월하게 해낼 수 있고, 본인의 존재감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일테죠.
피터는 자신이 스스로 남의 비판이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리서도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클라리서는 타인에게, 소울 메이트와 같은 피터에게조차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도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3.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괴로움 – 셉티머스
전쟁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또 잃게 된 셉티머스는 혼자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에반스의 죽음 이후에도 삶은 진행되지만, 결국 그는 중심을 잃고 말죠. 어쩌다 결혼도 했지만 결국 더욱 외로움 속에 자신을 내던진 모양이 되었고, 한순간도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감을 느끼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셉티머스는 그저 적극적으로 슬픔에 빠졌고 그 상황에서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념을 따라가다 보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의 선택을 비난하기 힘들어요.
클러리서도 그가 느끼는 삶의 고통을 비슷하게 느낍니다. 셉티머스와 달리 삶을 선택한 클러리서가 더 강한 사람인걸까요? 저는 그저 ‘삶’에 더 적합한 성향이었고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4. 글을 닫으며
클러리서에게 중요한 주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피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늘 사랑에 빠져있고 그 때문에 남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뭘 하던 클러리서를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사람.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겠지만 결코 적합한 배우자가 될 수 없는, 클라리서에게 필요한 안정감과 충족감을 줄 수 없는 사람.
클라리서는 그를 떨쳐냈고, 피터는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서로를 애정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상대방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며 살아가요.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황량한 언덕배기의 형체가 부드러워지며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해도 밤은 그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색깔을 도둑맞았고 창문도 잃어버렸지만, 훨씬 더 묵직하게 존재했다. 정직한 대낮의 빛이 전하는데 실패한 것들을 내보냈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솔 출판사,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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