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일로 메일이 아주 많이 늦어졌네요. 다시 한번 좀 속도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시고, 또 읽어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우울한 잿빛의 가상 미래 이야기 1984.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국 인간성 자체의 말살을 추구하는 묘사를 읽다 보면 일차적으로는 형태와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의 사회 제도나 생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생존과 이상 사이에서 늘 타협하며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명목하에 점차 자아를 잃어가는 현대 사회 속 개인들의 모습도 떠올려 보게 되었어요.
외압에 의해 끝없이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반대로 우리가 좀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짚어보게 되었고 이런 부분을 중심으로 감상을 기록해봅니다.
작가 조지 오웰과 1984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이 소설은 개인의 생각까지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를 보여주며 개인의 자유와 전체주의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차 한없이 추락하는 주인공 윈스턴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파고듭니다.
1. 생각과 감정의 자유,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자유
개인의 행동은 결국 생각의 반영이다 보니 빅 브라더로 대표되는 소설 속의 정부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행군, 궐기대회, 증오주간같은 집단적인 행사들을 통한 선동은 기본이고 사용하는 어휘를 제한하고 습관과 기본적인 욕구까지 제한하려 해요. 개개인은 그렇게 길들여져 가며 자신의 개성과 성향에 따라 각자 다른 방법으로 적응해갑니다. 옆집에 사는 파슨스처럼 적극적으로 바보가 되는 사람, 윈스턴의 전 부인 캐서린처럼 조직에 그저 순응해 사고력 자체가 아예 없는 기계 같은 사람, 그리고 줄리아처럼 사회에 큰 기대 없이 약간의 일탈을 꿈꾸며 즐거움을 찾는 사람 등.
앞의 유형들보다 조금 더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적인 언어학자 사임은 현재의 체제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합니다. 존재하는 어휘를 삭제함으로써 표현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신어 작업에 참여하는 그는 언어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어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어휘가 줄어들수록 결국 사고의 폭도 좁아지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이해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를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상죄를 저지를 빌미를 없앨 수 있다며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듯 신어 예찬론을 펼칩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저지르곤 하는 가장 쉬우면서도 나쁜 죄, 조금의 의심이라도 생기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자비 없는 죄목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인 사상죄. 사임처럼 지적인 사람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래서 언제나 자신이 잠시 방심한 사이 이 죄를 저지를까 싶어 꽤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임만큼이나 지적이며 그래서 위태로워 보이는 주인공 윈스턴은 자신 내면의 소리에 늘 귀 기울이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숲 밖으로 나와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그는 사임만큼 똑똑하지만 함부로 지성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신중해요.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통해 본능적인 즐거움을 느끼지만 연인인 줄리아가 일탈을 통한 단순한 유희를 누리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즐거움 그 이상을 희망합니다. 이 책의 등장인물 중 가장 깨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가장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 가깝죠.
역사와 지난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는 체제 속에서 그는 작은 공책에 펜으로 직접 일기를 적어 자신의 기억과 과거를 기록합니다. 일기장이 발각되는 날 자신은 가차 없이 처벌받게 될 것을 알고 있어요. 심지어 이 죄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고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하지요. 한편, 당장 일기장이 발각되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이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고 의견을 표명하거나 질문을 제기할 수 없는 상태로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합니다. 때문에 언제 닥칠지 모를 체포되는 순간까지 비록 보잘것없는 일기라고 해도 꾸준히 적으며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기로 결정합니다.
그에게 인간답다는 것은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었고 본능에 충실한 것이며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모든 게 감춰지고 사라져 왜곡된 기록만 남아있는 과거의 진실을 알고 싶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우연히 발 닿는 대로 이끌려 찾게 된 노동자 계급 ‘프롤’들의 거주 지역에서 그는 과거의 단서를 찾고자 해요. 지금은 사라진 옛 단어를 사용하는 노인을 우연히 마주쳐 그에게 뭐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질문을 해보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듣지 못합니다. 윈스턴은 정부가 선전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알고 싶어 노인에게 자신이 들어온 대로 과연 ‘과거는 더 나쁜 사회였는지’ 물어봅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물어보는 질문 속 내용들은 ‘더 좋은 사회’를 판단하기에 정확하고 충분한 기준이라고 할 수 없어요. 윈스턴의 질문을 보면서, 그리고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며 ‘더 나은 사회의 기준’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윈스턴은 과거에 자본가들에 의한 불합리한 노동력의 착취가 만연했었다니 정말 그렇게 과거가 더 나쁜 사회였냐고, 그 정보가 맞는지만 자꾸 물어보죠. 그의 질문은 어쩐지 핵심을 비껴나간 것 같아 맞는 답을 하기가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프롤의 입장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 체계 속 지배 계급에 의해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과거는 어떤 면에서는 현재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던 작은 행복과 자유, 진실들이 존재했던 과거가 거짓으로 모든 걸 통치하는 지금보다 더 나쁜 사회일까요?
연인과의 사랑은 때때로 나의 자아, 타인과의 관계, 때로는 내가 속한 사회 모습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것처럼, 소설 속 윈스턴과 줄리아와의 사랑 역시 세상을 향한 광범위한 질문을 순식간에 펼쳐 보입니다. 그저 본능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가족 간, 연인 간의 사랑이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용기 있고 무모하게 만드는지부터 시작해 성장과정과 과거의 기억에 따라 개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줄리아에 대한 윈스턴의 감정은 자유연애 자체가 반정부적인 행위라는 것이 가장 큰 동기가 되어 시작된 것이었어요. 줄리아와의 애정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면서 남녀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를 쌓아가지만, 솔직한 감정에 기반한 연애뿐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수많은 금지 사항이 있는 사회에서 살아온 윈스턴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서로 사랑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삶에 대한 태도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외에는 공통분모는 전혀 없다고까지 느껴지기도 해요. 이전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미 강력한 통제가 구동되고 있을 때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란 줄리아는 한 개인이 통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무너지지 않을 빅 브라더의 체제의 굳건함을 오히려 윈스턴보다 더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 경계를 잘 알기 때문에 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것에 있어서는 더 대담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있는 윈스턴은 현재 사회의 모습을 커다란 역사적 줄기 속에서 인지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자주 의심하거나 확신을 가지지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희망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죠. 정부와 삶에 대한 둘의 입장 차이는 단순히 성격 차이를 넘어 세대 차이 그리고 같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간극을 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2. 이해
잘못된 신념으로 확신에 찬 오브라이언. 그는 어쭙잖은 수많은 당원들처럼 맹목적이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도 아니에요. 단지 완전히 잘못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이상한 이 사회에서 윈스턴만큼이나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만 그의 생각은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이 윈스턴과는 크게 달라요. 그는 이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천하무적의 위치에 있습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듯, 그렇게 둘은 서로를 알아보게 됩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아니 속을 털어놓지 않더라도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윈스턴은 직감적으로 오브라이언과는 말이 통할 것임을 느끼고 그와 교류하고 싶어 해요. 어차피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하는 윈스턴은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인간답게’ 살고자 합니다. 아마도 심사숙고 끝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어 드러나 버린 것이겠지요.
언제나 더 갈구하는 사람, 더 애정 하는 사람이 패자인 법이죠. 이 둘 사이의 관계에서도 어김없이 이 법칙은 적용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중하고 자신을 감추는데 능숙했던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에 대해서만은 경솔하게 평가를 내리고 도박과 같은 행동으로 결국 덫에 걸려들고 말아요.
결국 오브라이언은 윈스턴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적이라는 게 밝혀지지만 서로에 대해 잘 이해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은 누구보다 윈스턴을 잘 아는 인물이기에 사상죄로 그를 다루며 심문하고 고문하는 과정에서조차 윈스턴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죠. 그가 거짓말로 대답하는지, 얼마나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느 정도로 그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포기했는지, 그리고 끝내 자아를 내려놓고 사고하기를 멈췄는지까지 윈스턴은 다 파악해요.
윈스턴이 지독하게 고문을 당하며 거의 정신을 잃게 되는 지경이 되자 모든 것이 흐릿해지며 오브라이언과 완전히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는 장면은 얼마나 먹먹하던지요. 사랑하는 연인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그의 언어와 생각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하필 나의 적이자 권력자라니요.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 실체를 결국 알아주는 타인이 한 명이라도 있을 때에야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있음을 느끼나 봅니다. 그가 나의 적이라 결국 나를 파멸시킨다 해도 영원히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겠죠. 윈스턴이 자신의 평소 신중함을 다 내팽개치고 마치 도박처럼 오브라이언이 놓은 덫에 걸려든 건 오로지 그와 대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어요. 생각의 자유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라면, 그 생각을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자유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일까요?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3. 타협, 배신, 자기혐오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서 2부까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인들과의 관계 속 윈스턴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자유’라는 큰 주제를 따라가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곁가지를 뻗어냅니다. 그리고 3부에서는 오로지 윈스턴이 자기 자신을 포기해가는 과정을 묘사해요.
육체적으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고문을 받으며 우선 자존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신체적인 존엄을 먼저 내팽개치게 되죠. 고통에 울부짖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응하게 만들어 진심이 아닌 것들을 말하게 하는 강제성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과정은 책 속에서 꽤 빨리 지나가버려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의 생각을 개조하겠다며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듯한 윈스턴을 한 번 더 끌어내립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연스럽게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그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긍할 수 없지만 괴롭고 힘들어 그저 거짓으로 동조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요. 오브라이언은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고 설득합니다. 모든 게 다 수정되버려 더 이상 어떤 게 진실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역사의 왜곡을 오브라이언은 정당하다고, 그저 현재만이 중요하며 당의 지침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해요.
꽤 오랫동안 서술되는 이 과정을 읽다 보면 소설 속 맥락과 관계없이 현대 사회 속 이상과 현실 사이 타협의 기로에 서곤 하는 하는 수많은 결정의 순간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어깨 위 얹어진 책임을 위해 그리고 사회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외면해야 하는 순간들,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들, 그런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를 한참 지내다 보면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아예 판단이 힘들어지기도 하죠.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외면하는데 익숙해져가는 것뿐인 지 잘 판단할 수 있을까요?
윈스턴은 그렇게 한 번 더 자신을 포기하게 됩니다. 자존심을 버리는 걸로는 부족해서 자아를 포기하죠. 하지만 이걸로도 여전히 충분치 않았던 오브라이언은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듯 한 번 더 윈스턴을 극한으로 몰아가요. 윈스턴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마지막 인간성, 빗장을 걸어두었던 그 어떤 것까지 다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결국 윈스턴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사람이 가장 순수하게 남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내팽개치게 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스로 지켜내고자 한 인간으로서 내면의 존엄을 버리게 되죠.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게 되자 윈스턴은 자기도 모르게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수에게 먹잇감을 던지듯 줄리아의 이름을 말하며 그녀에게 모든 공포가 옮겨지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사랑을 배신하는 것,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든 외부적인 압박이 절대적으로 악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날 것 그대로의 내 바닥을 스스로 봐버린 상처는 결국 고스란히 내 안에 남게 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이런 상황에 적합하겠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처럼, 윈스턴과 줄리아는 결국 어떤 뻔뻔함으로도 결코 덮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지고, 결국 사랑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에 무디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이제 윈스턴은 석방되고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4. 영원한 패배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며 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지내는 윈스턴.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며 친구 하나 없이 단골 바에 앉아 여가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갑자기 티브이에서 곧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는 방송이 나오고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를 파악한 윈스턴은 자기도 모르게 어쩌면 이번에는 패전 소식일지도 모르겠다며 걱정하는 듯 기대 섞인 흥분을 느끼지만 결국 얼마 후 공표된 소식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승전 소식이었어요.
이제 비로소 윈스턴은 완전히 체념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때까지 품었던 막연한 의구심, 도저히 잠재워지지 않았던 저항감은 다 사라지고 빅 브라더의 존재와 그의 힘을 긍정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버립니다. 윈스턴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주는 마지막은 형식적으로는 마치 해피엔딩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요.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내면 갈등은 종결됩니다.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는 빅브라더의 세상이 아주 확고하고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 노동 계급도, 시간이 지난 다음 세대도 영원히 체제를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무력감이 밀려왔을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이젠 정말 모든 삶의 의지를 놔버리고 싶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자신의 마음만 조금 다르게 고쳐먹으면 괴롭기만 하던 내면의 투쟁, 그리고 비로소 삶도 놔버릴 수 있으니까요. 오브라이언은 사상죄를 저지른 그의 생각이 완전히 ‘치료’가 되는 때에야 처형을 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알려주었고, 그래서 저는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윈스턴의 자살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희망이 전혀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더 이상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기 힘들겠죠. 곧이어 그는 총살을 당할 것이고 죽은 것과 다름없이 무의미한 하루하루도 끝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완전한 패배감을 느끼고 그 좌절로 인해 자신의 의지나 내면의 갈등과 저항을 모두 포기한 채 껍데기만 남고 모든 것이 다 비워진 공허한 사람이 되는 결말은 이미 당시의 사회상이나 정치 체제에 대한 풍자와는 별개로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 불합리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아를 지키려 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희망’일 수 있겠다 생각해 봅니다.
우울한 회색빛이 묻어나는 가상의 미래 이야기로 낯선 공상과학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먹먹한 마음이 한동안 가시지 않던 여운이 긴 작품이었어요. 분량이 대단히 많지도 않았고, 책을 읽을 때는 상당히 수월하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지만 막상 감상을 정리하는데 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현대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시도와 거기에 담긴 상상력, 창의성,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잘 반영했다는 것은 단지 이 소설의 개성을 의미하는 요소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핵심적인 매력과 가치는 그 모든 장치와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어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서술한 점이라고 느꼈어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를 통해 조지 오웰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라며 작가로서의 지향점을 이야기했는데, 1984는 그가 추구했던 그 목표를 실현해 낸 결과라는 생각으로 감상을 마무리합니다.
* 1984년에 캐나다에서 발표한 영화 1984의 공식 트레일러가 있어 가져와봤어요. 배경 음악 때문에 세상 힙하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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