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 원래는 2부로 계획되었다고 하나 결국 1부만이 완결되어 세상에 나온 책이에요. 이미 1 부만으로도 꽤 많은 분량으로 그의 특징적인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돈과 치정이 전면에 나오는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주제, 그 옛날 러시아 작은 마을 시내에서 마주칠 것 같은 다양한 사람들, 그만큼 갖가지의 수많은 이야기, 주요 사건에 얽혀있는 인물들의 심경의 변화,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불쑥 드러나는 사람들의 밑바닥, 거기에 언제나 중심을 관통하는 신앙, 선과 악, 구원에 대한 고찰 등 너무 흥미롭고 인상적인 요소가 가득해서 책을 다 읽고 이 중에 어떤 걸 선택해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좀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모순성과 좀처럼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저 바닥의 충동을 포착해 묘사하는 문장들이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특히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고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충동과 양면적 감정들에 대해 좀 더 적어보려 합니다.
우선 인상적인 문장들로 먼저 시작할게요.
작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1. 비이성적 충동과 모순성
카라마조프 가의 제각기 성격도 다르고 현재 살고 있는 생활 모습도 너무 다른 세 형제, 그리고 그들의 통일된 유전자를 물려준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그들의 등장은 모두 다 하나같이 특별하고 인상적이죠.
아버지의 존재감이 대단한데, 그의 방탕함, 비열함, 천박함은 세 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에요. 책임감 없고 본능에만 충실하며 오로지 이재에만 밝은 사람으로 첫째 아들과 연적의 관계에 놓이다 못해 아들에게 그 여인을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온갖 비열한 노력을 다하는 걸로 그려집니다.
사실 첫째 아들도 그리 고상한 사람은 아닌 데다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건 어쩌면 그저 사회 속에서 규정된 관계일 뿐 서로 애증 외에 다른 감정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툰다는 것이 외부인들에게는 민망하고 기괴하지만 당사자인 그들 사이에서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사건이라 느껴지기까지 했어요.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는 인물들인데다 처음부터 아수라장이 펼쳐져 온통 난리도 아니라서 ‘아 정말 대책 없는 집안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며 사고를 치는 모습들이 낯설거나 황당하기보다는 설득력 있어 보였어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사건이 터질 때는 누군가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기 때문인데 현실 세계에서도 사건 사고는 다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사실 모순되는 감정과 판단 사이에서 이성을 붙잡고 번듯하게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터져 나오는 비이성적 충동으로 결국 얼굴 붉어지는 사고를 치고 마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작가는 등장하는 이들의 모순적인 모습과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포착해냅니다. 초반 인물 소개부터 한가득 풀어놓죠.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첫 번째 부인은 집안 좋은 멀쩡한 규수인데 도통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결혼은 하고 파국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시작하는 이 여인에 대한 서술은, 그 뒤에 몇 문장 더 보태어 그 결혼은 비이성적인 그녀의 충동 때문일 수 있었다는 걸로 이어져요. ‘아마 그녀는 여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사회적 제약 및 자신의 가문과 가족의 독재에 대항하고 싶었을 것’ (1권 P.19)이라는 설명 뒤에 이 한심한 남자가 어쩐지 나름의 매력이 있어 보였다는 어이없는 설명이 저는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느꼈어요. 뭔가를 막연하고 크게 추구하다 보면 막상 그것과는 너무나 대척점에 있는 이상한 걸 성급하게 선택하고 마는 경험, 저는 해본 적 있는 것 같거든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길은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어쩐지 좋아 보이는 마법 같은 길’이 가끔 눈에 들어올 때가 있죠. 그때를 조심해야 하건만 저 같은 사람은 때때로 그 썩은 동아줄을 잡고 맙니다.
심지어 그와 제대로 격식 갖춘 결혼이 아닌 ‘보쌈 결혼’을 치렀다는 게 더 짜릿했다는 설명까지. 대단한 논리가 있을 수 없는 그녀의 인생을 건 큰 실수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그 둘의 파국을 맞는 모습은 더욱 현실적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여인은 자신이 이 남자를 싫어한다는 걸 바로 깨닫게 되죠. 남편의 그 모든 신기하고 특별했던 모습을 스스로 남들에게 자랑처럼 떠벌리곤 했던 자신의 마음은 사랑보다는 몰이해와 경멸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집을 나간 이 첫 부인이 어디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보인 반응 역시 그 마음속의 모순적인 마음을 다 드러냅니다. 누군가는 그가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며 해방되었다며 외쳤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고 하며 사실 이 모든 반응 다 가능하다고 서술합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아버지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이야기의 첫 사건은 결국 이 대책 없는 남자가 터뜨립니다. 수도원에 가서 온갖 행패에 가까운 난리를 피우고 자신은 면목없고 미안하니 이후 식사는 하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태가 결국 마무리되나 싶을 때 즈음 마차를 타고 집 앞에 거의 다 온 그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죠. ‘에라, 끝까지 한번 가보자.’ 생각하고는 결국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 남은 식사 시간마저 다 망치고야 맙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 황당하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느꼈고, 이 대책 없는 사내에게서 저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이런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만, 사실 술이 잠시 빗장을 열었을 뿐, 없는 모습이 드러나는 건 아니죠. 술이 빗장을 연 건지 술 핑계를 댄 건지 구분할 수 있나요.
이 책의 큰 사건, 즉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죽음, 그 전후의 첫째 아들 드미트리의 행동, 둘째 아들 이반, 그리고 이후 재판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증인들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이런 모순성과 충동은 계속 드러나요.
특히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인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돈과 사랑, 자비에 대한 모든 모순적인 감정을 다 드러내는 인물이죠. 그가 일관되게만 행동했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는 한동안 거슬렸던 오만한 여자의 기를 죽이기 위해 돈으로 그 여인의 아버지 빚을 갚아주겠다는 비열한 제안을 합니다. 그러고 막상 그녀가 찾아오자 돈만 주고 신사적으로 대하죠. 이후 그녀가 갑자기 유산을 물려받고 상황이 달라져서 실제로 결혼을 추진하려 하자 얼결에 승낙합니다.
그는 극 전체에서 일관된 인간성을 보여주지 않아요. 방탕하고 선을 넘고 한없이 비열하고 인정 없는 것 같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순정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고결한 인격도 지닌 인물이에요. 돈에 있어서도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냅니다. 남의 돈을 가로채지만 계속 갚을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돈을 또 선뜻 내놓지도 못하죠. 또 집시마을에서 흥청망청 파티를 하며 사실 1500루블을 썼지만 3000루블을 쓴 척 합니다. 그의 허세와 과장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생각이 있어 놀랍기까지 해요.
그의 약혼녀, 사랑보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맺어진 인연 같지만 사실은 묘한 복수심이 기저에 깔려있는 카체리나 역시 표면적으로는 드미트리와 아주 격이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찬가지의 비열함과 분노, 충동이 있어요. 드미트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그루셴카를 어떻게 손써보려 하고 주변을 자꾸 조정하려 하죠. 마지막에 재판장에서 그녀의 모순적인 감정은 극에 달합니다. 실제로 그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자신이 현재 사랑하고 있는 이반이 혹시 곤란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이성의 끊을 놓고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하지만 술에 취해 갈겨쓴 것뿐인 메모를 들이밀게 됩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쪽지를 제시한 건 전혀 계획된 일이 아니었고 그런 방향으로 증언을 할 생각도 전혀 없었지만 결국 현장에서는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죠.
이런 모순은 둘째 아들 이반의 신앙, 선과 악에 대한 태도에서도 많이 드러납니다. 신을 믿지 않고 교회의 무용함을 주장하며 선과 악이 의미가 없다고 궤변을 펼치는 그의 의견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더 큰 기댈 곳을 찾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또 자신은 다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극적으로 구성된 소설이지만 인물들의 이런 양가적이며 충동적인 모습들이 결코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가 않았어요. 너그러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비열한 수를 쓰게 되고, 좋은 친구나 연인이 되지 못할 것 같아 놔줘야 한다 생각하다가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붙잡으려 하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다가도 갑자기 그 마음을 어디에 자랑하고 싶고, 고상한 어떤 걸 추구하다가도 갑자기 이상한 선택으로 바닥을 드러내게 되고.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평생 이런 갈등 속에서 번뇌하고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고, 때때로 잡고 있던 끊을 놓치고 실수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운이 좀 좋다면 그런 실수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시간만을 좀 잡아먹은 채 지나가고 말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 책의 드미트리나 이반처럼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하죠. 그 사건 사고를 마무리하는 과정 역시 얼마나 나 자신이 일관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내가 일관된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있다면 그 기한 내에 빨리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느냐에 관건이 달려있기도 합니다.
2. 정직
도스토예프스키가 포착한 인간의 모순성은 자연스럽게 정직과도 연결 짓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하며 정직할 수 있는지가 결국 그 사람이 일관성을 유지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드미트리가 자신의 마음과 본연에 좀 더 정직했다면 그렇게 혼란스럽게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나에 대한 정직은 결국 타인에 대한 정직으로 드러나게 되겠죠.
카체리나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며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다 결국 마지막에는 폭발하고 말죠. 자신의 미움과 비열함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더라면 이반에 대한 사랑도 인정하기 훨씬 쉽지 않았을까요?
3. 글을 닫으며
사실 이 책에 대해 제가 앞서 적은 감상은 너무나 일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반의 길고 긴 신과 교회에 대한 의견, 까라마조프 가족과 그루셴카, 카체리나를 다 얽어매었던 돈의 권력, 그리고 자유와 구원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맞을 거예요.
특히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 성경 구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 은 이 혼란스럽고 대책 없는 형제와 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속세의 세계에서 막내 알료사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좀 더 확장해 우리 개개인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영화던 책이던 노래던 그림이던 감상자는 언제나 결국 자신이 느끼고 싶은 걸 찾아내는 법이죠. 어쩌다 보니 최근 일이 년 동안의 제 상황에 비추어 개인적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던 주제에 대해 적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선에서 제 눈에 들어온 이 작품의 결정적인 문장들로 감상문을 마무리할게요.
다음 뉴스레터는 2월 5일에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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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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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책의 내용 자체가 워낙 풍성해서 누가 읽어도 생각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아요. ^^ 저는 사실 종교가 없고 거의 무신론자에 가깝다보니 그 쪽 주제에 대해서는 그냥 흘려보내듯이 읽긴 했지만 혹시 저랑 다른 입장이시면 특히 그쪽 부분과 관련해서 삶이나 종교, 교회의 역할이나 책임등에 대해 고민해볼 거리가 많을 듯 해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또 한번 저도 다시 찬찬히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보도록 할게요. ^^ 미세먼지가 가득하긴 해도, 화창한 햇살 만큼은 가려지지 않는 봄날이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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