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래저래 다들 좀 고요한 설 연휴를 보내게 되었네요. 만남의 형태가 많이 달라졌지만 애정하는 사람들과 진심어린 따뜻한 정을 서로 나누는 그 마음은 결국 다 잘 전달되겠죠?
이번 레터는 사랑의 뜨거운 마음과 안타까운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문장들이 가득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독후감입니다. 20대의 젊은 청년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편지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설레는 마음부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해 슬퍼하는 심정까지 세세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어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니, ‘좌절’이나 ‘고난’, ‘실패’와 같은 다양한 어휘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 읽고 나면 그저 제목에 있는 ‘슬픔’이라는 단어 외에는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괴테가 실제로 사랑에 상처받고 좌절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집필을 시작해서 완성까지 약 석 달 좀 넘는 기간 내에 빠르게 완성한 소설이라 그런지, 자신의 일기장을 다시 들춰보고 발췌하거나 재편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마법 같은 순간,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이때까지와 다르고 새롭게 보일 만큼 감각이 예민해지고 한계가 확장되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랑이 그대로 보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애끓는 베르테르의 심정을 따라가며 제가 그런 사랑을 경험하는 듯했고, 묻어두었던 지난 기억들을 불러내기도 했어요. 베르테르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흔하면서도 드물게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책에 대해서, 안타까운 베르테르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좌절된 사랑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요. 그저 그의 심정이 더욱 잘 느껴지는 문장들 위주로 기록해 봅니다.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1. 만남
누군가를 알게 되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예고나 복선이라고는 없죠. 마치 재난이 닥치듯 그렇게 스스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급작스럽게 찾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복선이라는 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런 걸 기다렸거나 바라고 있던 건 아닐까, 구체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했던 건 아니더라도 뭔가 조금은 다른 감정을 느낄 준비를 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내 일상을 변화시킬 어떤 것을 받아들일 혹은 그런 일을 벌일 준비가 되어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낸 첫 편지에 보면, 그는 막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잠시 떠나 새로운 곳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음을 알 수 있어요. 고향을 떠나온 이유는 아마도 역시 사랑의 문제였던 걸로 짐작할 수 있죠.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그 곳을 훌쩍 떠나 거리와 시간을 두기로 합니다. 기약 없이 떠나와 잠시 자리를 잡은 이곳을 그는 썩 마음에 들어 해요. 소박한 사람들과 마을의 풍경은 그가 늘 동경해오고 바랬던 어떤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 이전의 일상을 잠시 잊고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허물없이 대화하며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며 지냅니다.
그러면서 베르테르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질 준비를 했던 건 아닐까요. 그는 이 지역에서 마치 ‘낙원’에 온 듯 행복감을 느끼며 충만한 상태로 지내는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모시는 부인을 열렬이 사모하고 있는 어떤 젊은 하인과 잠시 말을 나누게 됩니다. 그 남자의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과 불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시선에서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오는 사랑. 이 모든 것들은 복선처럼 베르테르의 정서를 건드렸고, 얼마 안 있어 어느 저녁 자신의 운명을 뒤흔드는 로테를 만나게 되지요.
마차에 동승해있던 여인들이 미리부터 베르테르에게 멋진 여자를 만나게 되겠지만 이미 약혼자가 있으니 반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며 주의까지 줄만큼 매력적인 여인 로테. 농담처럼 던진 다른 이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베르테르는 그녀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며 더더욱 빠져들더니 무도회에서 춤을 함께 추며 완전히 사랑하게 됩니다.
베르테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비가 잦아든 밤 파티가 거의 끝난 때 창가에 기대어 그녀가 자신의 손을 베르테르의 손에 얹으며 클롭슈토크라는 시인의 이름을 말할 때, 혹은 그전에 그녀와 신나게 춤을 출 때, 아니면 그에 앞서 그녀가 독일 춤을 같이 추자고 청했을 때, 아니면 파티장에 가던 마차에서 책 이야기를 하던 때였을까요. 만약 제가 베르테르였다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그날 저녁에만 여러 번 있었다고 회상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단 한 순간만을 택한다면, 많은 사랑이 그렇듯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이겠지요. 그렇게 책장을 열고나면, 그 뒤의 일들은 알아서 흘러가는 책 속의 문장들 같은 것 아닐까요.
2. 사랑의 발전
사랑이라는 감정의 절정, 즉 한참 상대방에게 빠져 모든것이 다르게 느껴지고 세상 모든 게 아름답게 느껴지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일분일초 스스로 자각하는 상태와 점차 깊어가는 감정의 변화를 괴테는 현실적이고 세심하게 글로 풀어냅니다.
처음에는 그저 정신없다가 어느 순간, ‘아 내가 사랑하고 있구나’를 확실히 깨닫기 시작하고 내가 애정 하는 사람이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면 자존감이 백배 올라가면서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귀하게 느껴지죠. 둘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손이라도 닿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베르테르의 이런 열띤 상태가 수 페이지에 걸쳐 계속되는데, 너무 생생해서 괴테가 자기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3. 좌절과 단념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등장하고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을 그만둘 수 없어 힘들어하다가 결국 그녀를 떠나기로 합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정말 큰 결심을 했지만 결국 팔 개월 정도 후에 다시 돌아오죠. 그저 그녀를 안 보고는 살 수 없겠다는 마음이었고, 그렇게 그녀 곁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더 이상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너져가요. 그의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너무 마음이 아파 차마 여기에 다시 옮겨 적지도 못할 정도인데, 사실 이 사랑의 고통을 표현한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자 백미라고 느꼈어요.
괴테의 대단한 문장력은 베르테르가 결국 생을 마감하는 그 장면까지도 그를 이해하게 하지요. 베르테르의 요청으로 권총을 빌려온 하인 아이가, 로테가 직접 그 권총을 건네주었다고 알려주자 그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씁쓸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한껏 행복해합니다. 이미 선을 한참 넘은 상태이지만 너무나도 베르테르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요.
4. 사랑의 경험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고 순수해서 첫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누구를 만나본 적 없는 것처럼 유독 로테에게 이토록 열정적인 사랑을 느끼죠. 하지만 초반 몇몇 대목을 통해 그가 이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했던 걸로 짐작할 수 있고, 그중 어떤 여인과는 깊은 관계로 청춘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매번 첫사랑이 아닐까 싶네요. 아무리 여러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경험해도 또 다른 사람과는 결국 처음 맺는 관계니까요.
때때로 우리는 상처를 피하고 싶은 자기방어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들을 복합적으로 종합해 경험을 통해 습득한 규칙이나 나만의 법칙이 있다고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이렇게 연애하는 스타일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관계는 할 수 없어, 나는 이런 사람이랑 잘 맞아, 이런 사람은 안돼… 그리고 언제부턴가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저 말리게 되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그건 집착이야, 혹은 그건 좋은 연애가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런 모든 판단이 소용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새롭게 만난 사람에게 느끼는 내 감정 앞에서 지난 경험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타인들의 알 수 없는 사랑 모두 결국 다 각자의 서사인걸요.
백년해로를 해도 알쏭달쏭 한 사랑이 있고 비극으로 끝나거나 결실을 맺지 못해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정답 같은 모습을 띄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마음 자체는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수천 년 인류가 지상에 존재하면서 지식의 양은 이렇게 많이 쌓였는데, 심지어 심리학과 심리 상담도 점차 일상 속으로 더욱 가깝게 들어오는데 여전히 누구를 사랑해야 가장 편하고 안전한지 알아낼 수 있는 이론이란 것은 없으며, 사랑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도 시간에 기대어 망각에 의지하는 것 말고는 딱히 더 나을 해답이란 게 없습니다. 혈액형이며 별자리며 MBTI며, 그저 열려버린 마음 앞에선 사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요. 이백 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세상 모든 게 달라져도 사랑은 이렇게 늘 일관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흔들어 놓을 것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테니 그저 이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문학과 예술이 지속되겠지요.
5. 그 외 - 클롭슈토크의 송가
베르테르와 로테가 처음 만난 그 밤, 파티가 끝날 무렵 로테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베르테르를 응시하며 마치 암호처럼 클롭슈토크라는 문학가의 이름을 말하고, 베르테르는 즉각적으로 그 작가의 가장 유명한 송가를 떠올립니다. 서로 더 이상의 대화를 발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마음이 통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내용이 궁금해서 송가를 검색해봤고 일부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 클롭슈토크의 송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0746&cid=60603&categoryId=60603&expCategoryId=60603
이 정도의 내용이면 거의 고백 아닌가 싶네요. 로테, 왜 그를 그렇게 들었다 놨나요, 책임도 못 질 거면서. 베르테르, 그대는 왜 그렇게 마음을 순식간에 열어버렸나요, 감당도 못할 거면서.
다음 뉴스레터는 2월 15일에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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