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 열정 · 유언, 산도르 마라이

전 생애로 답하는 질문 / 독후감

2021.04.04 | 조회 1.0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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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이번에 소개하는 열정과 유언은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 눈으로 읽어도 또 소리 내어 낭독해도 아름다워 계속 가슴 뛰게 하던 문장들이 가득했어요. 두 작품을 각각 두 번씩 읽고 나서도 독후감을 쓰기보다는 마냥 문장들을 바라보고만 싶었습니다. 벚꽃과 목련이 햇빛과 달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꽃비가 내리는 이 계절과 특히나 더욱 잘 어울리는 작품들이었어요.

우정이던 사랑이던 혹시 마음 한 쪽에 도저히 떨쳐지지 않아 덮어둔 인연이 있을지요? 여전히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도저히 놔 버릴 수 없는 질문이 있는지요? 중요한 이와의 인연은 생의 긴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어도 그 인연 자체가, 함께한 짧은 시간만으로도, 내 자아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죠. 소중한 사람과 못다 한 말들, 한 평생 끝내 잊히지 않는 인연, 그리고 그렇게 묻어둔 감정이 결국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의미가 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독후감을 적기 전에, 읽으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던 문장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중 몇몇을 옮겨봅니다.

 

그런 일들은 먼 훗날 비로소 다시 생각난다. 몇십 년이 흘러가고, 누군가 세상을 떠난 어두운 방 안을 거닐고 있으면, 갑자기 오래전에 사라진 말과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그 몇 마디 말이 삶의 의미를 표현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때 이후로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42)

 

서서히 바스러지는 잿빛 비단이나 검은 수의에 싸인 옛날 여인들과 남자들의 유골이 부패하는 호사스런 대형 석조 무덤처럼 집은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34)

 

그들의 우정은 그 자체 하나의 삶으로 간주되는 모든 위대한 감정이 그렇듯이 진지하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모든 위대한 감정처럼 수치심과 죄의식을 배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대가 없이 빼앗을 수는 없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47)


그러다 라요스는 사람들 틈을 뚫고 홀연히 사라졌으며, 우리는 밀랍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하루하루 살았다. 헛개비 같은 삶이었다. 라요스 앞에서 불타올랐던 분노와 투쟁이 우리 삶의 진실한 알맹이였기 때문이었다.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69)

 

 

독후감은 객관적으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주제를 명시하지 않고 그저 제 감상을 남깁니다. 제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인 정보를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 산도르 마라이와 열정 · 유언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1. 전 생으로 답하는 질문 : 우정, 사랑 혹은 그리움


열정에서 이제 70대 노년이 된 헨릭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마치 영혼의 일란성 쌍둥이 같았던 친구 콘라드를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청년 시절 어느 날 밤 제대로 된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라졌던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죠. 유언에서의 에스터 또한 단 한 번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라요스를 그리워합니다. 친 오빠의 친구로 마치 마법처럼 등장했던 라요스는 젊은 시절 에스터의 영혼을 깨어나게 했고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온 마을을 들썩거리게 했지만 결국 구제 불능의 사기꾼으로 알려진 후 사라졌습니다. 헨릭과 에스터 둘 다 수십 년을 살아가며 늘 그들을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어요. 헨릭은 콘라드가 떠난 뒤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지만 그저 그곳에서 견디고 버텨내어 지금은 고독하지만 평화로운 노년을 살고 있습니다. 에스터 역시 라요스와의 결별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현실적인 어려움 또한 겪게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지금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일구어 냈습니다. 시간은 모래바람처럼 불어와 그들의 상처를 덮어주었어요. 마음속 뻥 뚫린 구멍은 어찌어찌 메워졌습니다.

 

이십 년, 아니 이십이 년 전 나는 불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내 안에서 응고되었다. 어떤 힘이 상처를 무디게 하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22)

 

그러던 어느 날, 70대 노인이 된 헨릭에게 콘라드가 갑자기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하고, 중년에 들어선 에스터에게도 라요스가 전보를 보냅니다. 헨릭은 그제야 콘라드가 다시 돌아올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에스터 역시 언젠가 도래할 거라고 믿어왔던 이 재회의 날이 드디어 왔다고 느끼게 되지요. 이 둘은 정말 수십 년 동안 그들이 다시 올 걸 확신했을까요?

 

최초의 놀라움이 지난 지금, 갑자기 피곤이 엄습했다. 일생 동안 준비를 하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당황이 언제 복수심과 기다림으로 바뀌었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23)

 

“라요스가 온대요!"그 순간 내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나는 모른다. 기뻐 들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정신을 차린 몽유병자처럼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십 년 동안, 나는 밝은 달을 좇는 몽유병자처럼 살았다. 이십 년 동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한발 한발 낭떠러지 끝을 따라 걸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았다.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11)

 

아마도, 매 순간 그들을 떠올리며 재회의 순간을 갈구했다기보다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떨쳐내지 못한 채 결국 그리움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들의 삶의 한 부분이 돼버린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헨릭에게는 콘라드를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크리스티나에 대한 그리움이 결국 그의 삶을 이때까지 지탱한 힘이자 살아가는 의미였고, 에스터는 라요스와 함께였을 때 그 시기만이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진정한 의미를 지닌 때였다는 걸 깨닫습니다. 에스터의 표현처럼 옛 인연들의 등장으로 이 둘 모두 ‘몽유병’에서 깨어나듯 이제야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재회를 준비합니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인 소재는 소중한 인연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비로소 남겨둔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의 한 장을 넘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주제는 각기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

유언에서 작가는 에스터가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단 하나의 사랑이자 에스터가 살아오는 동안 부인하고자 했던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하는 존재로 사기꾼 같은 남자 ‘라요스’를 등장시킵니다. 어느 누가 봐도 하자만 가득한, 결코 좋은 인연이 못될 것 같은 사람을 통해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넘어 온전히 내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내가 직면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간다는 것에 대해 샅샅이 그리고 적나라하게 파헤칩니다.

에스터는 라요스의 사기꾼 같은 면을 가장 먼저 파악했고 끝까지 곁을 주지 않았지만 사랑했어요. 결국 자신의 친 언니와 결혼한 그 남자, 그리고 언니의 죽음, 떠도는 집시 같은 그 남자 손에 남겨진 조카아이. 여전히 아픈 자신의 상처가 가장 중요했던 에스터는 결국 조카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히 알면서도 아이를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라요스와의 인연을, 과거를, 있는 힘껏 몰아냈어요.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라요스를 통해 이제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또 주체적으로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요. 현명한 결정이라 여겼던 것은 자신이 헤쳐나가야 했던 과정을 그저 회피했던 것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이때까지 누려온 평화로운 일상들 모두 다 남들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결국 20여 년 전의 마음 아팠던 사랑은 사실은 자신의 생에 남아있는 묵은 숙제이며, 그래서 이 과업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채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삶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계니 가능성, 선과 악, 그런 것들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소, 에스터. 우리가 하는 행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도 않고 뚜렷한 목표도 없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소? 무슨 일을 꼭 이득이나 기쁨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오. 당신 삶을 한번 돌아보구려. 그러면 많은 경우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 거요.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145)

 

앞날을 진지하게 계획해보지도 않았고 일편단심도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당신만을 사랑했소. 그러다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소. 빌마가 가로챈 편지만을 말하는 게 아니오. 모든 게 편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오. 사실 당신은 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소. 반박하지 말아요.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오. 용감하게 사랑해야 하오. 도둑이나 앞날의 계획, 천상과 지상의 그 어떤 율법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랑해야 하오. 우리는 서로를 용감하게 사랑하지 않았소.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167)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비로소 라요스에 대한 추억과 사랑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가 있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더 이상 라요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에스터가 진정으로 품었던 감정, 자기 기만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가가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삶은 투쟁이고 오욕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얼마나 기이했던가! 누가 투쟁을 불러왔고, 왜 투쟁을 피할 수 없었던가?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적은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적에게 묶여 있고, 적도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8~9)

 

유언보다 몇 년 후 집필한 열정에서 작가는, 유언에서 라요스의 입을 빌려 말한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뜻하지 않은 일’을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방향도 조금 변경해 ‘그리움’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열정의 주인공은 유언에서처럼 중년이 아니라 생의 끝을 바라보는 노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헨릭이나 콘라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주체적인 삶이라던가 적극성과 같은 미덕을 말하지 않죠. 오히려 인생의 여정에서 저지르게 되는 혹은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자세히 풀어냅니다.

콘라드와 헨릭의 우정은 비범하고 특별했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들의 평범한 우정과 마찬가지로 미묘한 불편함이 존재했어요. 둘의 아주 다른 가정 환경도 그들의 우정에 있어 장애물이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대한 장애는 각자의 기질적인 차이였지요.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며 모든 것이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의 생활에 큰 안정감을 느끼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헨릭, 그리고 도저히 군인이라는 틀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콘라드. 둘은 서로 누구보다 상대방을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잘 아는 만큼 속속들이 다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했을 것이고, 한편 서로 터놓고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그저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였을 거예요.

 

콘라드는 음악을 두려워했다. 음악은 그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했으며, 그의 의식뿐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를 삶의 궤도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그의 내부의 무엇인가를 분쇄할 수 있는 운명적인 명령이 음악의 영역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69)

 

음악은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자네들에게 말하고, 또 자네들은 필시 음악을 통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게야. 이 대화, 자네들에게는 분명한 이 음악의 언어를 우리 아버지와 나 같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그래서 우리는 자네들 사이에서 끝내 고독했지.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229)

 

둘이 함께 사랑했던 여인 크리스티나, 그리고 젊은 시절 콘라드가 자신의 생을 걸고 시도했을 그녀와의 연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티나의 남편 헨릭.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고, 콘라드는 떠나고 크리스티나는 좌절했으며, 헨릭은 그날부터 8년 후 크리스티나가 죽을 때까지 그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습니다. 한해 두 해가 지나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이제 41년이 넘어서야 만나게 된 두 사람. 그 긴 세월 동안 각자 얼마나 많은 원망, 자신의 상처와 불쑥 올라오는 분노, 그리움을 생각했다 지웠다를 반복했을까요?

작가는 그가 쓰고 싶었던 이 소설의 주제, 그리고 아마도 유언에서도 역시 표현하고자 한 것까지 아우르는 핵심을 작품 안에 분명히 명시합니다.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155)

 

결국 에스터, 라요스, 헨릭, 그리고 콘라드, 그들 모두 자신들의 그리움, 애정, 그리고 재회 전까지 그 긴 시간 무수히 품었던 의문과 후회, 회한, 원망과 변명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결국 전 생애로 증명하고 답했으며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증명을 위해, 스스로 자신에게 또 상대방에게 답하기 위해 결국 그 불가해하고 직시하기에 너무 아픈 순간과 복잡한 심경은 그들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가 되었어요. 아무리 후회가 앞서더라도 말이죠. 

 

이 순간 두 사람은 기다림이 있었기에 지난 몇십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단 한 가지 과제를 준비하는 데 평생을 바친 것 같았다. 콘라드는 자신이 언젠가 돌아가리라는 것을, 장군은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았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97)

 

인생에서 맺게 되는 인연 중 어떤 관계는 우리 인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어떤 관계는 아예 내 삶의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리고 끊어졌으나 사실은 끊어지지 않은 인연도 있습니다. 지금은 내 일상 속에 더 이상 실재하지 않지만 오히려 내 영혼 속에 크게 자리 잡아 내 모습과 내 삶의 방향까지도 바꿔버리는 인연들이죠. 이 책을 읽는 동안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과 한때 누렸던 아름다운 시간들,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언제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많이 생각했어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하며 때때로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이 두 작품을 읽는 게 괴롭기보다는 오히려 많이 즐거웠습니다. 제 삶의 한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고, 또 한편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오묘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으며, 떨쳐낼 수 없는 기억과 과오를 덮으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저의 일부로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어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 저도 에스터나 헨릭, 콘라드처럼 알게 되겠죠. 그저 지나간 추억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생을 걸고 대답해야만 했던 나의 과업일지.

 

열정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젊은 시절에 종종 등장하던 쉔부른 공원입니다. 
열정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젊은 시절에 종종 등장하던 쉔부른 공원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

이렇게 오랜 시간 품은 사연에 대해 옛 인연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있을까요? 대부분은 어떤 일이던 결국 시간의 파도로 덮어 세월과 함께 잊으려 하고, 또 혹시라도 여전히 마음속 한편을 자리 잡고 있다고 한들 어쩔 수 없이 과거는 과거로 묻어둔 채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 친구를 만나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또는 다시 한번 만나게 되면 꼭 그날에 대해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겠죠.

그래서 이 두 소설 속 주인공인 에스터와 헨릭의 이야기는 아주 이상적인 소설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찾아 나서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렇게 결국 해묵은 숙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완벽한 해피엔딩이 있을까요.

유언에서 에스터는 마지막에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라요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집을 내주게 되지만 자기에게 과거의 실책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음을 감지하고 미소 짓습니다. 이렇게 에스터는 드디어 자신의 삶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열정에서 헨릭은 41년 만에 돌아온 콘라드에게 정중하고 차분하지만 이때까지 담아두었던 원망을 한가득 늘어놓고 묵혀둔 질문도 해보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사자를 만나 대화를 한다는 것, 그리고 내용과 상관없이 여전히 둘이 친구라는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 한 지금 더 이상 과거가 뭐가 중요할까요.

아쉽고 후회할 일이 투성이인 저는 그래서 그저 이 두 주인공이 많이 부러웠습니다.

 

 

3. 콘라드

이 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이상하게도 저는 열정의 콘라드가 내내 눈에 밟혔어요. 젊은 시절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군인 생활을 하며 그가 얼마나 외롭게 지냈을지 알 것 만 같아 신경이 쓰였고, 사랑하는 여인을 친구와 결혼하게 했던 그 마음, 언제나 너그럽고 밝은 가장 친한 친구 헨릭에 대해 느꼈을 복합적인 심경, 그리고 운명적인 그날 헨릭에게 총을 겨누었다 거둔 뒤 스스로 느꼈을 감정적인 흔들림과 자괴감 등이 생생하게 상상이 가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크리스티나를 외면할 수밖에 없게 된 그 사건 이후 찾아간 열대지역. 원래는 그녀와 함께 하려 했던 그곳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아픈 마음을 다스리며 보냈을 방황의 시간. 아마도 자기혐오와 함께 크리스티나와 헨릭에 대한 그리움, 죄책감으로 자신의 일생을 수십수백 번 돌아봤을 것 같고 스스로 벌을 내리듯 살아왔을 것 같아요.

헨릭이 열대지역에서도 쇼팽을 연주하곤 했는지 물어보지만 처음에는 답을 회피하고, 재차 물어보니 그제야 그곳에서는 더 예민해져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사실은 고향을 떠난 그 순간부터 영원히 음악을 멀리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감정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헨릭, 자신의 과거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을 듣지도 연주하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41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크리스티나와 헨릭 모두를 생각하며 어쩌면 그리움의 대상조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헨릭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컸을 것 같아요. 그에게는 늘 받기만 했다는 고마움과 헨릭이라는 친구의 의미에 대해 뒤늦게 깨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결국 다시 찾아온 헨릭의 집, 정정한 모습으로 정성껏 자신을 맞이한 친구가 반가웠을 것이고 그 긴 세월이 지났지만 마치 일이 년 밖에 지나지 않은 듯 자신에게 원망을 퍼붓는 그가 고마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상하는 콘라드의 이날 밤은, 다시 흰 독수리 호텔에 돌아가 오늘에야 비로소 마음껏 편한 마음으로 크리스티나를 추억할 것 같아요.

 

 

4. 글을 닫으며

유언을 추천해 준 지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약 제가 에스터라면 라요스에게 집을 내줄지 말지를 물어봤는데, 글쎄요, 저는 아마도 집을 내줄 수 없어 영원히 불행하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은 에스터인데 아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겠죠. 유언을 읽는 동안 에스터에게 많이 공감하고 몰입했는데 특히나 한동안 들여다 본 대목이 있어 옮겨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질투에 사로잡힌 목소리가 내 안에서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억누르고 싶지는 않았다. 저 아이는 네 딸일 수도 있었어! 너의 딸, 네 삶의 알맹이, 저 아이는 무엇 때문에 돌아왔을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감정에 북받쳐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감정이 수치심보다 강한 순간이었다. 나는 오래 간직해온 비밀을 내보였으며, 내 오욕과 마음속의 싸움을 매정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딸일 수도 있었던 젊은 처녀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산도르 마라이, 유언 (솔, p109~110)

 

살다 보면 가끔씩 스스로가 챙피하게 느껴지는 질투심이 올라올 때가 있더군요. 그 마음을 일기장에 적는 것조차 쉽지 않아 애초에 어떤 언어로 설명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감정이 수치심보다 강한 순간’이라는 표현에 한대 맞은 듯했어요. 아마도 열정에서 콘라드가 크리스티나와 연애하는 내내 느꼈던 감정 역시 이런 것이었겠죠.

두 소설 모두 과거에 이미 저질러진 일, 예상치 못한 채 맞닥뜨리게 된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했어요. 살면서 매 순간 그때마다 가능한 한 최선의 선택을 했기에 결국 지나서 후회라는 건 할 필요가 없다는 듣기 좋은 말에 종종 위안을 받곤 하죠. 그리고 분명 과거의 저는 대체적으로 후회를 잘 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자꾸만 후회하고 미련을 두는 일을 겪게 되네요. 에스터처럼, 그리고 헨릭과 콘라드처럼 결국 버텨내고 살아가다 보면 제 전 생애로 제 스스로에게 답하고 증명하는 날이 오게 되기를, 그렇게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다 해도 언젠가는 한 장 넘기고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 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p.273)

 

 

열정에 등장하는 쇼팽의 폴로네즈 환상곡으로 이번 독후감을 마무리합니다.

바로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다음 메일은 4월 5일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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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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