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어설프기만 한 첫사랑, 그때의 순수함을 세밀하게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들에 푹 빠져들었어요. 두 주인공의 삶의 향방을 결정지어버린 실패한 첫사랑 이야기이지만 나이가 아주 많아져 버린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쉽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때때로 어찌할 바 모르는 혼란스러운 마음, 살면서 힘든 순간에 잘못 저지르는 실수 등 다양하게 생각할 거리가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했어요.
지나간 기억들, 모두들 한때는 느껴봤던 순수한 열정을 생각하며 추억에 아스라이 빠져든다 싶을 때 이야기는 점차 묘하게 흘러가 종교와 신념,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비극적인 결말 이후 종교가 없는 저는 자꾸만 알리사에 대해 궁금해졌어요. 정말 알리사가 원하던 마지막이 이게 맞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걸까, 결국 마음이 편해졌다면, 신에게 가까이 갔다고 느낀다면, 자신의 쓰임을 다 했다고 느꼈다면 해피엔딩일까, 결국 알리사를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된 제롬을 가엽게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끝내는 이루어진 사랑이라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일까 아닐까, 어떻게 읽는 게 맞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난 뒤에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지던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앙드레 지드와 '좁은 문'에 대한 간략 소개는 ↓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는 누가 더하고 덜 할 것 없이 마음이 통했음에도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고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망설이기만 합니다. 두 살 연상인 알리사는 제롬에게 끌리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제롬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해요. 다양한 변명과 누구라도 주저할 법한 상황들이 있긴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한없이 제롬에게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죠. 제롬도 마찬가지였어요. 알리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욱 독실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심지어 이런 삶의 태도는 그의 성향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사랑이라는 폭풍 같은 감정이 얼마나 사람들을 그리고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사랑의 무한한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라고 그들의 순수함과 열정은 결국 스스로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말았어요. 망설임과 설렘, 조심스러움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둘의 실질적인 관계는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돌기만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향해 함께 나아갈 때의 그 기쁨, 동지애, 함께한다는 비밀스러운 감정에 대해 이해 못 할 사람이 있을까요. 둘이 서로 나누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간절한 기도들은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비밀스러운 의식이 되었으나 더 넓고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거기에 둘 모두 스스로 갇혀버리고 맙니다. 긴 시간 동안 편지로 책의 구절을 빌미 삼아 속 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지만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색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말죠. 연애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어리기만 한 둘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 그저 낯설고 어색했던 것뿐인데, 가벼운 일상을 함께 나누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긴장 속에 모든 것이 꼬이고 당황만 하다 생각만 많아졌어요. 심지어 알리사는 그 어색한 재회에 실망한 나머지 성급하게 서로 간의 마음을 단정 짓고 이 관계를 그만두려 합니다. 성경과 책을 읽으며 제롬을 떠올리고 그에게 알려주고 싶은 구절들을 나눌 때 느꼈던 그 기쁨만은 확실했으니 자꾸만 그 행위에 집착하게 되고 이는 점차 독실한 신앙의 형태로 발전되어 갔어요. 제롬과 함께 고귀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찾으려 하죠. 제롬을 세속적으로 욕망하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 같으며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 제롬의 미래를 옭아맬 것 같은 두려움에 스스로 물러나고자 합니다.
제롬 또한 알리사랑 다르지 않았어요. 둘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요.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대화를 하지 못한 채 그저 알리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기 수행과 공부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때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알리사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는 새 여러 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아요. 알리사 말고 다른 여자는 생각해 본 적도, 알리사가 없는 삶 역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건만, 그의 성실하기만 한 태도는 알리사의 행동을 이끌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점점 극으로 치닫는 알리사, 그리고 둘 사이의 꼬여버린 관계가 안타까우면서도 사랑뿐 아니라 살면서 종종 실수처럼 빠져드는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한 환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너무 간절히 원하는 나머지 현실 속에 몸을 던지기를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열과 성의를 다해 시도한 뒤에도 닥칠지도 모르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꾸만 노력만 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것, 이상적인 때를 마냥 기다리며 끊임없이 노력만 하는 것, 자꾸만 거대한 명분 뒤에 숨어 나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하는 것… 고민과 준비는 결국 마지막에 행동이 있어야만 쓸모가 있는 법인데 때로는 실행의 단계는 마냥 외면하고 싶기도 하죠.
이 책의 매력은 주인공 둘 사이 관계의 흐름이 아이러니하게도 안타깝고 답답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애쓰고 소망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서 감동마저 느껴지기도 해요. 한없이 순수하며 괴로워하는 그 마음만큼은 도저히 비난할 수가 없었어요. 앞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사랑이던 무엇이던 명분에 매달리고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어떤 때는 그저 두려움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해 수많은 기회를 날리는 큰 실수일 수도 있지만, 알리사는 그런 상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비록 시작은 어쩌면 두려움이었을지라도 정말로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자신의 영혼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어떤 시선으로는 알리사는 그저 자기 자신을 어리석게 파괴하고 인생을 흘려보낸 사람일 수 있겠지만 제롬에 대한 사랑을 동력 삼아, 신의 부름을 찾아 끊임없이 고민하고 더욱더 종교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끄는 모습은 외로움과 슬픔, 쉽게 다스리기 힘든 에너지를 원천으로 삼아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온전히 순수한 영혼을 다해 추구하는 방향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다 다잡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과 주제를 어느 한 방향으로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함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해요. 부단히 노력하며 청교도적인 태도로 수행하듯 사는 삶의 아름다움과 깊은 가치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도 어디까지가 적절한 것일지,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내어주는 게 맞는 것일지, 절제하며 사는 삶이 과연 늘 옳은 것일지에 대해, ‘행복’과 ‘덕행’이라는 자칫하면 동일 시 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겠죠.
유치한 일일 수도 있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어김없이 그 안에서 제 이야기를 찾아내게 됩니다. 아마도 각자 상황에 따라 지나간 사랑, 혹은 매진해왔으나 원했던 결과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안타까운 노력 등 마음에 오래 남아있는 어떤 부분을 떠올릴 것 같은데, 저는 ‘용기’라는 개념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사랑에 있어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용기’란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솔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 봅니다. 때로는 두려워도 행동에 옮기고, 혼란에 빠졌을 때 당장 답을 선택하려 조급해 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겨 보는 것, 나 자신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 내가 힘들게 내린 결정이라도 때에 따라 번복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사실 다 용기가 아닐까 싶네요.
저는 제 속의 비겁함을 반성하며 자꾸만 뒤돌아보는 생활을 최근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이제는 ‘반성’이라는 허울 좋은 개념 뒤에 숨어있기보다는 지나간 것은 아쉬운 대로 시간 속에 흘려보내고 앞을 향해 억지로라도 한 발씩 내딛는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네요.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용기 있는 삶을 이어가시기를, 마음 따뜻한 연말 마무리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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