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쓴 소설답게 시어로 가득한 소설, 말테의 수기. 릴케가 매번 사용하는 언어들은 아름다움이 제 수용 한계 이상으로 넘쳐났지만 그 범상치 않은 문장들이 표현하는 바는 지독히 어두웠습니다. 감각적인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사실 파리 골목골목에 베어 있는 우울함, 활기찬 대도시 뒤편으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피곤한 삶, 여기저기서 목격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연결되고 나열됩니다. 말테라는 주인공을 통해 풀어내는 기록 형식의 책이지만 읽다 보면 이건 분명히 릴케 자신의 이야기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많았기에 초반에는 더더욱 ‘릴케 당신의 어두운 심연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라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쩌다 이 무지렁이 손에까지 들어와 속을 드러내는 이 작품, 이 책과의 인연을 끝내 모른척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졸면서 책장만 겨우 넘기고, 그 속에 한가득 담긴 우울한 분위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제 심장에 갈고리를 꽂은 듯 떨쳐낼 수 없는 문장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거든요.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못 읽을 것 같았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하필 모든 것에 의욕이 많이 사라진 요즘의 제가 들추게 된 말테의 기록, 릴케의 속내를 흘려보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는 이상한 의무감도 들었어요.
이 작품은 아무런 소제목도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이야기도 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한 주제에 집중해 서술하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곤 합니다. 다 읽고 나면 이 한 권을 엮어낸 연결고리들을 다 기억하긴 힘들지만 단편적이면서도 강렬한 주제 몇몇이 마음속에 남게 되는데 그중 몇 가지만 적어봅니다.
작가 R.M. 릴케와 말테의 수기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각자에게 부여된 죽음
파리의 골목 어귀 걸인과 파리의 자선병원 모습들을 보며 말테는 죽음과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상념에 빠지기 시작해 먼 옛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괴로움으로 가득했던 나날들, 그리고 뒤이어 할아버지의 오래된 성, 거기서 겪었던 유년시절의 특별하고 괴이한 경험들까지 다채로운 기억들을 끄집어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끊임없이 다시 반복되며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까지 소환해 내죠.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말테는 죽음의 공포에 항상 시달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유년시절부터 늘 귀신을 봐왔고 자신의 어머니 또한 비슷한 경험을 일상처럼 겪곤 했었죠. 이렇게 말테는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피상적인 표현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도시에서 목격하는 죽음은 획일화되었고 몰개성적입니다. 과거에는 생사 모두 각자의 집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맞이했다면 대도시의 죽음은 모두 병원에서 이루어지죠. 이에 대한 생각을 한참 서술하는 말테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상념에서 그치지 않고 죽음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살아가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한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죠. 출생부터 생명이 다 하는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온전한 존재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좀 더 나아가 그는 애초에 생명이 잉태될 때 임산부의 배 속에는 삶과 죽음 각각의 씨앗이 함께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가졌다 (p.23)’고 하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각자의 죽음을 주어진 그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형태를 이뤄내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닌듯합니다. 말테가 기억하는 죽음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말년의 모습이에요. 귀족 신분으로 지방 유지이자 고위 관직자였던 할아버지는 생전 건강한 시절에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 그 자체인 오래된 성에 때때로 출몰하는 유령들마저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함께 생활할 정도로 대범하고 침착했던 분이죠. 그런데 마지막 이 세상을 뜨기 전 10주 동안 할아버지는 일생 동안 볼 수 없었던 가장 고통스럽고 포악하며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외할아버지는 성 안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몸을 누일 곳이 있을까 싶어 그 광활한 성 안 이방 저방, 심지어 수년간 닫혀있던 방까지 열어 계속 옮겨달라고 요구했고 밤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마을 전체가 떠나가라 울부짖었으며 그 비명소리에 온 마을이 할아버지가 임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10주 내내 불면증과 불안에 시달립니다.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이 부분이 저에게는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고 너무도 강렬하고 적나라해 지나 생각해 보니 이때 느낀 우울함이 책을 읽는 내내 저를 지배했던 것 같아요.
사람의 존엄을 헤치는 고통, 그가 어서 세상을 뜨기를 간절히 바라는 온 마을의 사람들, 새 생명을 잉태한 그 마을의 임산부와 또 새끼를 낳는 가축에게까지 괴로움을 전가하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 읽어 내려가며 언젠가 맞이할 제 생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죽음의 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편히 죽는 행운에 대한 경외를 생각해 볼 때 즈음 말테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할아버지에게 주어진 그만의 죽음이며, 온 마을이 그의 평안을, 사실은 어서 빨리 눈을 감아주기를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애초에 10주를 머물기로 했기 때문에 그 기한을 다 채우고야 떠났다고 말이죠. 고통을 견디지 못해 터져 나오다시피 한 할아버지의 낯선 모습조차 사실은 모두 다 할아버지의 본질이라고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죽음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안하며 인간다운 삶 – 어쩌면 ‘인간답다’라는 말에는 너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을 위해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반대로 죽음마저 자신의 것을 그대로 이룰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세상에 왔다 간다는 것을 뜻한다고 느꼈어요. 결국 내게 주어진 영혼과 나의 거짓 없는 모습은 생의 마지막까지 가서야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한편 ‘일생 동안 내부에 간직하면서 길러냈던 사납고도 장엄한 죽음’, 그리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나쁜 점들의 ‘잉여분’을 탕진했다는 문장을 보며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제 안의 악덕을 다듬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해낸다면 결국에는 살아있는 동안, 그게 죽음에 이른 마지막 순간에라도 결국에는 터져 나와 제 민낯을 드러내고, 소진하지 못한 악덕의 잉여분이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할아버지에게 찾아왔던 10주간의 죽음은 결국 그 모든 걸 드러내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몰개성적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살아낸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아도 ‘장엄하다’고는 말해도 되겠지요.
2. 보는 법 그리고 쓰는 법
말테는 수기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묻혀있고 어쩌면 일부러 덮어놨을 수도 있는 수많은 기이하고 우울하며 무서운 기억들을 불러냅니다. 죽음 외에도 고독과 외로움 역시 자신이 느낀 그대로 세밀하게 풀어내며 신에 다가가고자 하는 갈구 역시 그대로 적습니다. 이 기억들은 사실 그가 파리라는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똑바로 마주하고 쳐다보기 위한 것일 수도,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일 수도 있겠지만, 찬찬히 다시 살펴보면 결국 시인으로 제대로 자신만의 시를 쓰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거주하는 환경이 변했고 그래서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서 시간도 함께 흐르니 자연스럽게 말테는 변해가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도 변모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겠다며 변해가고 배워가는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애써 설명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하죠.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 그리고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말테의 의견은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합니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등장하는 것 같고 수많은 기억을 잇는 촉매들을 다 기억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실상 그 모든 추억과 기록, 기억의 연결고리는 결국 처음 그가 이야긴 한 ‘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릴케가 파리에 갔을 때가 주인공 말테와 비슷한 20대 후반의 나이였고, 조각가인 로댕이 자신이 작업하는 방법을 통해 릴케에게 ‘보는 법’ 가르쳐줬다고 하니 그 시기 느꼈던 것들이 이 책을 쓰는데 많이 반영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생에 남긴 마지막 역작인 두 시집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 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Sonette an Orpheus’ 두 연작을 단숨에 발표하기 전에 수년간의 아주 긴 공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 유럽을 여기저기 다니며 끊임없이 자신의 시 창작에 대한 고민을 했던 걸로 알려져 있어요. 작가에 따라 쓰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지만 결국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진심이 담긴 글을 쓰는 것이겠죠. 릴케가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했을 고민, 자신이 새롭게 보기 시작한 현재와 과거의 것들을 말테의 수기를 통해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3. 글을 닫으며
작년부터 어찌어찌 독후감 연재를 이어가고는 있는데 초심을 많이 잃고 자리에 앉아 뭐라도 끄적거리기까지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리고 있어요. 글을 쓰는 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글로 다 풀어낼 물리적인 힘이 모자라거나 반대로 ‘쓸 거리’가 제 머릿속에 없거나 두 가지일 텐데, 요즘의 저는 사실 후자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었고 열심히 표시를 했으며 나름 마음의 울림을 느끼기도 했으니 느낀 바가 없는 것도, 생각하는 게 없는 것도 아니건만 제 안에 안개처럼 뿌옇게 부유하는 어떤 것이 머리까지 명확하게 올라오지가 않네요. 그러던 차에 이번 책을 만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 도저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감을 느꼈었어요.
이 책을 읽으며 말테를 통해 쓰기 위해 고뇌하는 릴케를 상상할 수 있었고, 무슨 글이건 간에 쓴다는 것은 결국 제대로 보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독후감을 써보겠다고 하는 저의 경우에는 아마도 책을 읽는 법, 제 생각과 주변을 보는 법을 터득하는 게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제가 작년 이맘때와는 좀 다른 태도로 책을 읽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 책은 저 같은 사람을 혹하게 하는 환상이 가미된 글이 아니라 시인의 현실적인 고뇌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아주 힘들게 읽었음에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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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Ah Lee
요즘들어 저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능력이 매우 퇴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랫만에 이메일로 배달된 뉴스레터를 읽으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나보다 더 깊이 있는 언어로 들려주는... 좋은 책을 만났을 때 만날 수 있는 느낌을 선물받은 느낌이 들어 댓글을 남깁니다. 비오는 목요일이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안느의 고전 읽기
어머 은아님, 너무 반갑고 좋은 말씀 고마워요!! 훌륭한 작가가 쓴 좋은 글을 읽고서 감상을 제 언어로 적는게 매번 쉽지 않아서 늘 전전긍긍하는데... 은아님 댓글이 저에게 정말 선물같아요. 촉촉한 목요일이네요. 은아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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