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을 열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거의 단숨에 읽었는데, 10대 소년 홀든 콜필드의 사흘간의 가출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제가 왜 이리 좋아하는지 생각해 봤어요. 저는 일단 문학 속에 등장하는 외로움을 타는 인물들에게 대체적으로 애정을 많이 가지는 데다가 순수함이라는 것에는 언제나 맥을 못 추는 편인데, 이 작품의 홀든 콜필드는 그 두 가지가 혼합된 주인공이더군요. 이 소설은 오로지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며 남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 파악하는 과제가 주어진 사춘기를 거치는 중이죠. 어쩌면 그 시기를 저도 꽤나 요란스럽게 지내서 공감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 시기를 마치 첫 걸음마 내디딜 때만큼이나 까마득하다는 듯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사실은 마음 깊숙이 여전히 투정 부리고 싶어 하는 덜 자란 청소년의 자아가 숨겨져있다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세대와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사회회 되고 성숙해졌다 믿는 우리가 남몰래 덮어둔 속내를 콜필드가 대신 표출해 주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남의 일이지만 남일 같지 않은 이야기, 제가 공감하고 좋았던 부분을 기록합니다.
작가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젊음의 아름다움
이 책을 읽는 내내 콜필드가 느끼는 주변 사람들과의 괴리, 학교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그 괴로움만큼이나 크게 느끼는 외로움에 많이 공감했고, 그 뒤에 넘치도록 배어 나오는 그의 순수함에 묘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어요. 대체적으로 그의 내레이션은 또래 친구들에 대한 한심스러운 모습, 학교생활 혹은 단체 생활의 이상하고 바보 같은 면들에 대한 험담과 어른들의 가식적인 모습에 대한 악평이 가득합니다. 긴장을 풀고 그의 이러저러한 불평에 수긍해가며 함께 남들을 비웃기도 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한 번씩 훅 들어오는 그의 솔직한 속내, 즉 여리고 이미 다 성장한 어른처럼 나름의 생각이 가득한 자아를 마주칩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은 그를 동년배 괴짜 같은 아이로 생각하고 어른들은 아직까지 사회화된 코드로 소통하지 못하는 그를 여전히 어린아이로 취급하죠.
그는 도통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또래 사이에서 소통할 수 없어 외롭고, 가식 덩어리인 어른들이 군림하는 사회 속에서도 어쩐지 발붙일 곳 없어 붕 떠있는 느낌입니다. 학교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사흘간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맘 편히 쉴 곳이 없어 안락함을 느낄 수 없는 어수선한 그의 모습은 그의 정서 상태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사실 제3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퇴학당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당사자인 콜필드에게 그건 여러 문제 중 하나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아요. 물론 퇴학이라는 것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며 이로 인한 파장, 즉 가족들이 실망하고 또 자신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될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학교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들입니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표면으로 드러나는 결과, 즉 퇴학이란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이면에는 이미 한참 진행되어 산재한 문제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죠.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인 그는 도저히 이 사회 속에서 온전히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평온하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방황합니다. 정신적으로 조숙한 편이라 또래와는 달리 사회의 모습을 꽤나 날카롭게 파악해내지만 어쩔 수 없는 아직 순수한 청소년이라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하며 불합리한 모습을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도 방향도 몰라 흔들리는 그에게 역사와 같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학과 과정 공부는 전혀 우선순위에 들지 않겠죠.
그가 외로워하고 방황하는 모습, 도통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어긋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거기서 계속해서 상처받는 여린 마음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진 장면들을 보며 언젠가 저도 제 안의 에너지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힘들어했던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언제나 조금 외롭고, 이상하게 자꾸 밖에 나가 걷고 싶고,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다 느껴지면 받아들이기 힘들어 꼭 의견을 표출하곤 했었던 것 같고, 이성한테는 또 뭐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이제는 마음에 안 들거나 불합리하다 느껴지는 건 적당히 그러려니 하는 조직 순응적인 성향에 꽤나 둥글둥글한 척도 할 줄 하는 사람이 돼버렸고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많은 에너지는 다 어디 갔나 싶네요. 일희일비하지 않는 데에는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진 것도 물론 있겠으나 이제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취사선택해야 할 만큼 제 안의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인지 팔딱거리는 생선처럼 에너지가 사방 팔방으로 뻗어나가는 홀든이 마냥 답답하거나 한심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건 사실 그 모든 것의 바탕은 그가 품고 있는, 그 또래에만 가능한 순수한 에너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저 좋은 사람과는 더 어울리고 싶으며 내 생각을 나누며 남들과 대화하고 싶고 내 감성과 지성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고, 사실 이런 욕구는 아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다들 성장해가며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어느새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만큼이나 나의 모습도 다양하게 바꿔가며 두루두루 함께 지내는 요령을 익히게 되죠. 사회화의 과정이긴 하지만 다 큰 우리도 때때로 이게 그저 대처하는 요령인지 가식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고 대부분 많은 순간은 그런 구분에 큰 의미 두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때때로 한 번씩 성장통을 겪곤 하는데 여전히 고민과 괴로움의 바탕에는 나답게 살기 위한 맞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늘 존재하는 것 같고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겪는 성장통에 비하면 한층 더 분명하고 투명하며 순수하게 괴로움을 표출하는 홀든이 오히려 좋아 보이기도 했어요.
찬란한 희망이나 밝은 미래가 약속되지 않더라도 어설프며 자칫 깨질세라 불안불안해 보이기까지 한 다듬어지지 않은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젊음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순수함이라는 것이 발휘하는 힘은 얼마나 강력한지요. 그래서인지 콜필드가 좋아하는 여학생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면서도 그리 애정이 없는 다른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또 그다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는 친구를 불러내 외롭다고 더 있다 가라고 애원하며, 마지막에 병원에 누워 기숙사의 친구들이 그립다고 하는 콜필드의 솔직한 감정 표출 방식에 구석구석 마음 한편이 아프기도 하면서 동시에 계속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책 후반부 밤늦게 찾다간 선생님댁, 잠든 홀든 머리맡에 앉아 그를 바라보던 선생님은 아마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홀든은 그 선생님이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해 기겁하고 도망 나오지만, 저는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싶으면서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 가족
되는 일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좌충우돌, 우울하기만 한 홀든의 방황기 속에서 가족 이야기는 깜깜한 숲속에 문득 비치는 햇살처럼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우러러보는 형 D.B. 비록 ‘가식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영화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할리우드에 간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마음에 안 드는 선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에 대한 무한 신뢰와 존경, 애정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동생, 앨리. 콜필드는 마냥 슬픔에 빠져있기보다는 수시로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고 행복해해요.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앨리의 사랑스러움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추억은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에게 늘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엄마. 늘 잠을 푹 자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기억하는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곤 해요. 주인공의 대책 없는 방황을 끝내게 하고 집으로 불러들인 결정적인 역할을 한 너무도 사랑스러운 막냇동생 피비. 홀든은 학교를 무작정 떠난 첫날부터 피비 생각을 계속합니다. 오빠가 정말 어디 먼 곳으로 갈 거라는 생각에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짐가방을 싸 들고 온 장면은 저에게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 남아있어요. 오빠에 대한 순수하고 무한한 애정에 갑자기 눈물 버튼이 눌려버렸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화목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홀든은 그런 가족이 주어진 행운이 있는 주인공이었어요. 자신이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힘든 세상을 살아갈 때 동기부여가 되는 커다란 울타리인데다가 심지어 그 존재가 자신에게 이렇게 무한 애정을 주는 가족들이라는 행운.
그래서 저는 이 책이 결국 해피엔딩이라고 느꼈어요. 결국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고 앞으로의 방황도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적인 결론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3. 호밀밭의 파수꾼
책의 제목이자 주인공 홀든의 본질을 드러내는 대목이 후반부 동생 피비와의 대화중에 드러납니다. 18세기의 영국 시인 로버트 번스 Robert Burns가 쓴 시 ‘Comin’ Thro’ the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라는 시를 통해 넓은 호밀밭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상상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홀든. 아이들, 유년기의 해맑은 순수함은 보호해야 하는 중요하고 큰 가치로 여기는 듯해요. 그리고 영원히 그때에 머물고 싶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로도 느껴집니다.
사실 작가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며 그 역시 참전 전 순수했던 젊은 시절에 계속 머무르고자 했던 건 아닐까, 전장에서 너무 끔찍한 것을 많이 봐버려 그전 시절로 돌아가 머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던지라, 콜필드가 어느 정도는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반영했을 거라는 추측도 해봤습니다.
4. 범죄자들의 필독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소외된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라 그런지 유명인을 살해한 범죄자들이 탐독했던 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홀든의 속내, 범죄자들이 그에게 분명히 많은 감정 이입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문득 오래전 읽었던 김점선 화가의 인터뷰가 생각이 났어요.
아이처럼 순수함이 느껴지는 작가의 화풍, 예술가답게 고정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있던 분이지만 한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과 큰 거리 두지 않고 많이 소통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기가 많아 사회에서 자꾸 무대 위로 불러낸 것도 있겠지만 저처럼 문외한이 티브이에서, 지면에서 작가님을 많이 뵈었던걸 보면 분명히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많이 어려워하지 않으셨던 것 같긴 합니다.
둥글둥글한 인상, 재치 있고 솔직한 입담을 보여주던 분이었지만 당연히 예술가이니 내면에는 들끓는 열정이 있었을 것이고, 사회에서 정해둔 틀 대로 따라 사는 것에 늘 반항하고 싶은 마음, 다듬어지지 않는 에너지에 대해 범죄자와 예술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고 그래서 범죄자를 보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는 글을 봤습니다.
사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정도가 다를 뿐 분명히 공유하는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예술가도 또 범죄자도, 혹은 그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평생 방황하는 평범한 시민이 되기도 하는 것이겠죠.
* 인터뷰 원문은 ↓
5. Comin’ Thro’ the Rye(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
아슬아슬하고 안타깝지만 한편 방황하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그리고 저는 해피엔딩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마음 포근했던 이번 책 감상은, 소설 속에 나온 로버트 번스의 시에 멜로디를 입혀 널리 알려진 노래로 마무리합니다.
다양한 버전이 있던데 그 중 비교적 근래 촬영된 공연 영상이 있어 가져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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