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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대한 간략 소개는 ↓
처음 책을 받아보고 분량에 압도되었고, 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길래 싶어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나마 돈키호테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던 건 풍차와의 결투 장면이었기에 그런 식의 사건 수백 가지가 담겨있는 건가 싶어 질리진 않을까 미리 걱정부터 하기도 했어요. 막상 읽어 보니 작가의 해학 가득한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고, 보통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뭐든지 재미있게 말하는 이야기꾼을 만난 듯했어요. 방대한 분량으로 완독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지만 그 기간 동안 매일 밤 옛이야기 듣는 기분으로 천천히 야금야금 읽는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1. 모험담의 출발이자 모든 것, 젊은 노인 돈키호테
뮤지컬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던 돈키호테와 산초의 원래 모습이 원작인 책에는 상세하게 나와있어요. 라 만차라고 하는 지방 소도시에 사는 돈키호테는 커다란 성을 소유했거나 왕족과 교류하는 정도는 아니긴 해도 꽤 괜찮은 저택에 살고 있으며, 그 마을에 흥미로운 외부인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 초대해 인사를 나누자고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마을의 영향력 있는 상류층의 신사입니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시골 마을의 집안 괜찮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선비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어요. 그 지역의 사람들은 그를 현명하고 인품 좋은 어르신으로 생각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 남으로 집에는 조카딸과 집안일을 봐주는 하인들 몇 명이 함께 지내고 있으며 사냥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활비 중 대부분을 먹거리에 소비할 정도로 삼시 세끼 늘 맛난 음식을 챙겨 먹으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일상을 즐기는 점잖은 사람이에요. 대체적으로 크게 바쁘거나 중요한 일이 없는 그는 대부분 책을 읽으며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선비인 그가 얼마 전부터 꽂힌 것이 있었어요. 옛 기사들의 모험담입니다. 돈 걱정 없고 지적인 그는 서재에 한가득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채워두었는데 점점 기사 이야기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고 기사들의 모험담에 빠진 나머지 그 좋아하던 사냥도, 집안을 챙기는 살림도 등한시하며 내도록 책을 읽고 자신의 땅까지 팔아가며 책들을 모아가기 시작합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모험을 하고 여인에게 숭고한 사랑을 지고지순하게 바치는 기사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들썩거리게 하죠.
노년에 안락한 일상을 뒤로하고 되지도 않는 모험을 찾아 길을 나서는 돈키호테의 나이가 사실은 고작 사십 대 후반밖에 안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모든 형태의 창작물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책이 쓰인 당시를 고려하면 이미 늦은 중년 시기를 지나고 노년을 앞두고 있는 게 맞지만 사실은 여전히 젊은 나이죠. 돈키호테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저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짧았을 먼 옛날, 신체적으로 노화가 지금보다 더 빨리 찾아왔을 그때에도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의 노화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을 들어보니 자기가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린 뭘 할 수 있을까요? 나이 많은 영감이라고만 생각했던 돈키호테의 나이를 알고 나니 그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그 시점 즈음에 돈키호테는 그렇게 이때까지 즐겁게 읽기만 했던 편력 기사들의 모험기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수 있고, 책을 아무리 모아보고 탐독해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느끼며 자신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조금 신나게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망상증에 빠진 노인이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어요.
2.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 자, 모험을 창조하다.
돈키호테는 총 2권으로 되어있는데, 1권에서는 그 유명한 풍차와의 결투, 여관에서의 기사 즉위식 등이 나옵니다. 산초와 함께 모험을 위해 떠나지만 주변인들 덕분에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죠. 이렇게 길에서 좌충우돌하며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잔뜩 남긴 1권이 발표된 지 수년 뒤 2권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돈키호테와 산초는 이미 유명 인물이 되어있죠. 1권이 대 성공을 거두어 실제로도 작가와 함께 둘의 이름은 아주 유명 해지기도 했어요.
2권에서는 돈키호테와 산초가 다시 떠난 모험길에서 마주친 공작 부부 덕분에 좀 더 그럴 듯한 모험을 겪게 됩니다. 유명 인사가 된 그 둘을 실제로 만나게 된 공작 부부는 너무 신난 나머지 모험을 찾아다니는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멋진 사건들을 선사하게 되죠. 처음에는 그저 장난처럼 역할극을 벌이지만 점차 초현실적인 환상극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부유한 책벌레 선비 돈키호테가 스케일 크게 전국을 무대로 역할놀이 여행을 떠난 것이라면 공작 부부들 역시 자신들의 재력에 걸맞은 연극 무대를 창조해 낸 셈이에요.
돈키호테와 공작부부가 스스로 생산해 낸 모험을 보고 나름의 상상을 해봅니다. 돈키호테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면? 동굴 속에서 보았다던 전설 같은 장면들도 그가 멀쩡한 정신에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였다면, 혹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절박함에 보게 된 환상이었다면, 공작부부가 만들어낸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눈을 감고 있던 것이 속았던 게 아니라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적극적으로 즐긴 것이었다면? 그리고 산초가 섬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는 공작부부의 거짓말도 모두 다 그가 적당히 현실을 알고 맞장구를 친 것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3. 형제 같은 팀원, 산초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어 함께 길을 떠난 산초는 원래는 같은 마을에 사는 평범하고 가난한 농사꾼입니다. 머리 회전이 빠르다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빤히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돈키호테가 자신과 모험을 떠나면 어디선가 섬을 하나 찾아내어 그 섬을 통치할 수도 있을 거란 말을 믿을 만큼 순박하다 못해 아둔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을에서 꽤 높은 신분으로 인품 좋고 지적이라고 알려진 돈키호테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돈키호테의 말을 못 믿을 이유도 없는 셈이죠. 세련된 매너를 갖춘 사람도 아니고 어디가 조금 모자란가, 어눌한가 싶어도 세상살이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을 지키며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나름의 논리와 상식, 그리고 고집도 좀 있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법한 사람입니다.
돈키호테가 미치지 않았고 제정신이었다면 산초와의 인연이 우연히 이어진 게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팀원으로 선택한 것일 테죠. 돈키호테는 왜 산초를 택했을까요? 아마도 산초의 소박하고 솔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돈키호테 자신을 이용하거나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을 듯해요.
이 둘의 조합은 그 자체로 이미 꽤나 웃깁니다. 우스꽝스러운 옛 갑옷을 입고, 책에 나오는 중세 시대 기사들처럼 예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는 돈키호테, 그를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를 대하지만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엄격한 예를 갖추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산초. 그들은 마치 오래된 동네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며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의식적으로 또 신중하게 자신의 팀원으로 산초를 선택한 것이라 생각하면 그들의 묘한 관계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원래대로라면 꽤나 엄격한 상하관계여야하는 기사와 종자의 신분이지만 동네 친한 동생처럼 편하게 자신을 대하는 산초의 행동을 돈키호테는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괘씸해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을 좀 줄이라고 잔소리를 할 뿐이죠.
4. 인상 깊은 장면
분량이 방대한 만큼 기억에 남는 장면들도 한가득합니다. 1권에 담긴 여러 에피소드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게 아쉬울 정도로 2권에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재미있고 인상적인데, 그중에 특히 공작부부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처음 함께 하는 저녁 만찬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식사 후 느닷없이 세수를 하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한참을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여전히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 나오네요.
5. 이야기의 꺼지지 않는 생명
세르반테스의 작가적인 능력은 해학과 유머 가득한 문장들을 통해 생동감 있는 인물들을 창조했고 그 주인공들을 통해 작품이 스스로 끊임없이 굴러가게 만드는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돈키호테의 위험한 모험을 끝내게 하려던 신부와 이발사, 그리고 그들과는 정반대의 의도로 더 신나는 놀이를 하려 했던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공작부부는 결국 돈키호테만큼이나 기발하고 기이한 모험을 하게 됩니다. 후대의 많은 독자들은 돈키호테와 산초를 두고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생각하고 재창조 해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두고 저는 또 돈키호테를 마치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가 제정신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가정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게 허구인 줄 알면서도 돈키호테와 산초에 대해 상상해 보고 그들의 모험에 심적으로 동참하며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키워나갑니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누군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회상하듯 들려주는 이 책의 형식처럼 방대한 분량의 원작 속에서 수 세기 동안 부분부분 쪼개진 모습으로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 작품은 그렇게 사실은 끊임없이 세월의 길 위를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원작을 바탕으로 재창작한 여러 작품들이 종종 꿈과 희망이 있는 삶이라는 조금은 거창한 주제를 뽑아내기도 하는데 저는 그보다는 좀 더 가볍고 즐겁게 이 작품을 바라보고 싶어요. 이 책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준 이유는 아마 지금의 제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것과 그 이유가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죠. 나를 조금은 부추겨주고 함께 있는 동안은 잠시 현실의 골칫거리들을 잊게 해주는 사람들을 누가 마다할까요. 돈키호테와 산초는 활자 속에 존재하지만 그런 친구들이에요. 독자들의 마음을 부풀게 하는 이 이야기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인 같은 그 두 사람을 환영하고 좋아해 마지않던 여러 다른 등장인물은 그런 이유로 돈키호테의 여행에 기꺼이 같이 동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모험 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생명이 계속 살아있듯 그렇게 삶 속의 생기는 결국 스스로 그 안에서 살아나도록 찾아내고 만들어 나가야 하겠죠. 언젠가부터 무료함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때에 접어들었다면 돈키호테처럼 복장을 갖추고 전국 일주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의 모험 거리를 찾아내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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