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아무 데도 자랑할 수 없는 이유

🎼  Way Dynamic 「Not A Fan」,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1월의 시작, 가뿐하신가요?

저는 오늘 간 화실에서 코스모스를 그렸어요. 선생님께서 가을이 가기 전에 코스모스를 그려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연한 분홍색 잎을 채우고, 가늘게 한들한들 춤추는 기다란 가지를 그리다 보니 힘들게 보낸 한 주가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았어요.

조금은 버거웠던 둘째 주 이야기 나눠볼게요.

🚅 11월 둘째 주의 일 : 서울 임장

임장을 위해 서울에 다녀왔어요. 서울행을 앞둔 일주일 내내 네이버 부동산과 각종 'O방' 애플리케이션을 돌며 전화를 돌렸어요. 부산에 내려오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터라 본격적으로 집을 구하는 건 처음인데요. 하필 가장 추운 날을 골라 칼바람을 맞으며 이틀 둘러보니 부산 집에 돌아와서는 몸살로 하루를 통째 날렸어요.

살 곳을 구한다는 건, 단순히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이고 얼만큼인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빨리 닿기 위한 최적의 위치가 어디일지. 함께 사는 사람이 우선시하는 가치와 내게 중요한 가치가 어떻게 충돌하는지. 짧게는 2~4년, 길게는 6년 안에 내 삶이 어떻게 바뀌거나 그대로일지...

거의 남은 30대 전부를 생각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서 결정은 점점 더 어려워졌어요. 당장 다음 달도, 내년도,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죠. 예측 가능한 삶은 지루하다고만 여겼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어지러워지는 시기엔 인생이 큰 틀에선 예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시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전에 없던 어렴풋한 상상도 해보았고요.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개인 분께서 그러더라고요. "힘드시죠? 다들 이러다 애먼 거 고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잠시 지친 기색을 치우고 크게 웃어버렸습니다. 애먼 거 고를 순 없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은 코스를 잘 돌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불쑥 들어가 집안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불편한 시간.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요.

🏡 11월 둘째 주의 장소 : 지혜의 집 도서관

서울행을 앞두고 가장 먼저 들러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지혜의 집 도서관! 책방의 손님들에게 제2의 아지트가 된 소중한 공간인데요. 미리 말씀드리고 방문하니 책방에서 만났던 두 명의 손님과 더불어 꼬마 손님도 두 명이나 만날 수 있었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 정도. 길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싱거운 농담과 특별한 것 없는 근황을 나누다보니 금방 해가 졌습니다.

못 본 사이 도서관에는 이용자들의 희망 도서과 사서 선생님의 훌륭한 큐레이션으로 더 멋진 서가가 꾸려져 있었어요. 작지만 단단하다는 상투적인 표현도 이곳에는 자신있게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터를 쓰는 오늘도 어쩌다 사서 선생님과 안부를 나누었는데요.  『동생이 생기는 기분』이라는 작품으로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받은 이수희 작가님께서 <그래픽 노블 연구회>라는 모임을 여는 날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너무나도 떠나고 싶었던 옛 동네가 그리워지기도 해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도서관과 도서관 사람들이 안녕하기를 바라며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세 권이나 받아서. 캐리어 무게가 한껏 든든해진 채로요. 

📚 11월 둘째 주의 책 : 정지음 『언러키 스타트업』 민음사,  2022

정지음 작가의 신간은 앞서 소개한 지혜의 집 도서관에서 만난 친구에게 선물 받았어요. 부산으로 다시 돌아와서 국수 먹듯 후루룩 읽어버린 책. 전작인 『젊은 ADHD의 슬픔』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의심도 불안도 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시트콤 소설'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가볍게 웃고 싶어서 선택했다간 이상한 PTSD가 올지도 모르는, 소소한 지뢰가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언-러키한 스타트업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온갖 에피소드가 모여 있는데요. 배꼽 빠지게 웃다가도 제가 짧은 회사 생활하며 겪었던 불쾌와 괴로움이 떠올라 힘들기도 했어요. 책 속 스타트업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의 대표인 박국제와 거의 판박이 같았던 사람이 제가 다니던 회사에도 있었거든요.

주인공인 다정은 박국제 대표의 음성을 녹음해서 비트 위에 올리고 믹싱하여 조롱하는 음원을 만들기도 하고,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직원들과 뒷담화하기도 하고, 끝내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저항의 장면들이 독자에게 해방감과 통쾌함을 선사하는데요. 저는 반대로 어떤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나는 나의 박국제에게 아무런 똥도 던지지 못했다는 점. 내가 선택한 것은 조용한 퇴사가 전부였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이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수년 전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이상하게 무적이 된 듯한 느낌으로 나의 박국제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똑같이 말이 통하지 않을 인간일 테지만, 내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지만, 꼭 해야 할 말 같은 것들은 잊지 않고 그의 눈을 보며 말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에 다녀온 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싸운 몸살이 지난 지금은 안개 같은 피로에 잠겨서 지냅니다.

밖을 걷다 보면 환절기라 그런지. 길거리나 버스에서 종종 작은 기침 소리나 코훌쩍이는 소리가 듣곤 해요. 구독자 님은 별 탈 없으신지 궁금하네요.

본격적인 11월,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2022.11.09.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