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

🎼  Cal in Red 「Zebra」, 2021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한 주 잘 지내셨나요?

부산엔 일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비가 내렸어요. 
겨울 이불을 다 빨아 널고, 포개어 장 깊숙한 곳에 넣었는데요.
조금 허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추운 밤을 보내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도 했고요.

아직은 튼튼해서, 방심한 환절기만 조심하면 되는데 인후통이 계속되더라고요. 불안한 마음으로, 자가 키트를 쓰고 음성을 확인하며 보낸 한 주였습니다.
확진자가 정말 많던데. 안녕하신지 모르겠어요. 

다행히, 이곳은 화요일부터 쭉 따스합니다.

이번 레터도 잘 수신해 주시기를 빌면서.

저는 한 주 이렇게 살았습니다.

🏋️‍♀️ 3월 둘째 주의 일: 옷과 책 처분

이번에 이사를 마치면서 다시금 다짐한 것은 책과 옷 처분입니다.

2월 셋째 주 레터에서는 다이어리를 모두 없애버렸는데요. 이번 주에는 책과 옷 차례였습니다.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서가 정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무섭게 증식하는 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서 미루기만 수년째. 아직 읽지 않은 책도 너무 많고요. 오랜 고민이었기 때문에, 넷플릭스와 유튜브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 키워드로 검색되는 거의 모든 영상을 다 보았지만... 여전히 제 서재는 폭발 직전입니다.

게다가 저는 책에 관한 한 대체로 평가가 후한 편이어서, 별 세 개 정도는 쉽게 줄 수 있는데요. 이게 아무래도 처분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책은 읽는 시기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기도 하잖아요. 당장은 그저 그렇더라도 인생의 다른 시절에 만나면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버리려다 말고 이내 품기를 선택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1) 진짜, 진짜 별로다 2) 남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읽어도 감흥이 없을 것 같다 3) 아주 짧은 부분이 좋았다 4) 다시 읽고 싶을 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네 가지 조건 중 두 가지 이상을 만족하면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인, ‘아주 짧은 부분이 좋은 경우’는 잘라서 그 부분만 보관하거나, 스캔본을 만들거나, 필사를 하기로 했고요.

그렇게 정리한 책이 고작 15권 정도네요.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오늘도 습관처럼 알라딘 장바구니를 또 늘렸고요...) 제 취향이 아니거나, 저랑 잘 안 맞을 것 같은 책을 또 한가득 쌓아놓고, 어서 읽은 후 조건을 만족하는가 확인해 보려고 했더니. 반대편에는 빨리 읽고 싶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난감합니다.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낡아버린 옷은 다 버리고, 깨끗한 옷만 골랐는데요. 제가 사는 곳과 가장 가까운 아름다운 가게는 부전역 바로 앞에, 세운상가를 연상케하는 전자상가 2층에 있더라고요. TV와 믹서기, 전자레인지 더미를 헤치고 끝까지 들어가니 아름다운 가게가 있었어요. 한낮, 전자상가의 주인들은 손님 하나 없이 텅 빈 상가에서 텅 빈 눈으로 TV 채널만 돌리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가게에만 사람이 많더라고요. 쇼핑하는 사람들이요. 정확히 그 영역만 살아있는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은 옷을 몸에 대어보거나, 접시를 만져보거나, 학용품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23점의 옷을 건네고 돌아왔어요. 저는 옷에 관심이 많거나, 멋지게 입는 편이 아닌 데다, 부산에 온 뒤로는 거의 혼자 지내고 있는 터라, 계절에 따라 몸에 편한 몇 가지의 옷을 무한정 돌려 입는데요. 체중이 늘어서, 선물 받았지만 취향에 맞지 않아서, 유행이 지난 것 같아서, 갖가지 이유로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많더라고요. 도저히 무슨 마음으로 샀을지 모를 지나치게 작고 화려한 옷들이, 이제 집에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은 차분하고 허전해진 옷장이 마음에 들어요. 

☕ 3월 둘째 주의 장소 : 원동 매화마을

작년에는 제대로 된 꽃구경을 하지 못했어요. 특히 3월은 패닉이었거든요. 책방 문을 닫은 후 허겁지겁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문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새 학기를 맞이한 상태. 게다가 서울에서 있을 결혼식 준비까지 해야 하는 시기라 정신이 없었어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엉망진창의 시간들이었고요, 꽃구경은 사치였습니다.

그게 영 아쉬웠던 저와 동거인은, 올해 기필코 각종 꽃의 개화시기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요. 시작은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원동 매화마을로 정했습니다. 경남의 여러 꽃 축제는 이미 취소 발표가 된 상황이었고, 원동 매화축제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둘러보고 오는 건 괜찮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어요.

축제가 열리는 것과 무관하게, 아무래도 이곳은 경남 사람들에게 중요한 봄나들이 장소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특히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아이의 두 손을 양옆으로 잡고 걷는 부모가 많았습니다. 모든 꽃길과, 산책로, 잔디밭이 허용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새삼 감사하더라고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과거의 시공간이 말이죠. 아이들은 착해서, 그리고 익숙해져서 마스크를 벗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딜 둘러봐도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은 채 하얗고 발간 매화나무 틈에서 웃고 있었어요. 코와 입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웃음들이었어요.

이 동네에는 그 밖에도 재미있는 광경이 많았는데요. 그중 하나는 거의 모든 음식점에서 미나리 삼겹살을 팔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알고 보니 원동 마을은 매화 말고 미나리 축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삭아삭한 식감과 향이 좋아서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고, 또 없어서 못 판다는 거예요. 신이 나서 삼겹살을 초벌구이하는 주인과, 그 곁에서 생탁 막걸리를 몇 병 째 쌓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들, 아이들 입에 넣어주느라 고기 맛 한번 보지 못한 엄마와, 사귄 지 얼마 안 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커플까지. 미나리 삼겹살 가게들을 보고 나면 축제가 취소되었다는 건 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코로나19 이후로 보기 힘든 장면만 보고 와서, 한편으로는 과거 여행을 한 것 같기도 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확진이라는 낙인이 가진 힘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아서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3월 초순부터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과, 원동역을 스치고 지나가는 빨갛고 파란 기차들, 기차가 지날 때마다 들리던 카메라 셔터 소리와, 아이들의 손가락, 그리고 동네를 휘감은 미나리 향 같은 것들이 오래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

이런 시는 읽으면 절로 신이 나지 않나요.

차를 몰고 갔던 게 패착이었어요.
원동마을에 방문할 날이 또 온다면 멋진 시집을 한 권 챙기고, 미나리와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테이블을 빈 생탁 병으로 가득 채워보고 싶어요.

함께 고기와 술을 나누는 사람과, 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꾸미면서요.

📚 3월 둘째 주의 책 : 신현훈 『버티고 있습니다』 책과이음, 2022

회사 생활이 짧았어요. 박차고 나올 때는 조직이나 사람 탓을 많이 했는데, 돌이켜보면 저에게도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과도한 업무와 요구를 만났을 때, 싫은 것은 싫다고, 무리인 것은 무리라고 말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그땐 회사에 다니는 게 하루하루 버티는 것 같았는데요. 회사에서 나온다고 해서 하루를 버티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힘을 덜 들이며 버티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나, 싶어요. 똑같은 삽질이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삽질은 할 만했어요. 똑같은 돈이라도 더는 사이버머니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책방 주인들이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 건, 제가 책방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대부분의) 책방 주인들이 아마도 매일 버티고 있겠지만, 그들이 돈을 벌기로 선택한 방식에 괴팍한 부분은 찾기 어렵거든요. 오히려 무해하고 소박해서 속상할 지경이지요. 비뚤어진 저는, 가끔은 좀 고약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고약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골똘히 고민하기도 하죠. 당연히 별다른 방도가 떠오르지는 않아서. '버티고 있습니다'라고 푸념하는 쪽을 택하지만요.

일산의 미스터버티고 책방은 한적한 주택가 3년, 대형 쇼핑몰로 이전하여 4년 넘게 운영 중인 곳이에요. 다시 개성 있는 작은 주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문학 전문 동네 책방이기도 하고요. 시종일관 버티고 있다는 넋두리와 자조가 가득하지만, 실은 그 안에 책과 책방에 대한 애정이 잔뜩 숨겨져 있어요. 그중에서도 아래의 페이지가 눈길을 사로잡았어요.

책방을 열고 수입과 지출을 보며, (숫자와 상관없이) 긍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한다는 마음 덕에 편안했어요. 이 책에 쓰인 것처럼, 안심되는 마음, 으쓱해지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런 마음은 숨길 수 없는 것 같아요. 직장인으로 살던 때, 어떤 제휴사와 함께하는 미팅 자리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순간이 떠올라요. 책방에 있을 때면 언제든 앞사람의 눈을 볼 수 있었어요. 

구독자 님은 어떤 한 주를 보내셨나요?

사시는 곳에 꽃은 피었나요?
겨울 옷과 침구는 다 정리하셨는지.
동네의 책 공간은 방문해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보일러 바늘을 내내 '온돌'에 두었다가, 이제 '실내'로 바꾸었어요.

맨발로 온종일 걸어도 괜찮은 날들이에요.

2022.03.16.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