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3 vol.40 | view more | SUBSCRIBE
CRSH : 이야기
안녕하세요, 정재경입니다. 청명한 가을날의 연휴,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궁중문화축전 전시 〈조선 공간 미학: 白의 질서〉를 보았습니다. 창덕궁 희정당에서 건물이 지닌 스토리와 함께 전승자 21명, 전승공예가 2명의 공예품, 현대미술 작가 7명의 설치미술 작품이 어우러진 대서사시였습니다. 맥락을 따라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시노그래피, 전시를 보고 나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정말 좋은 전시였습니다.

이 인연은 작년 가을부터 시작해요. 궁중문화축전 '아침 궁을 깨우다'에서 소네 님의 초대로, 김서울 작가님의 설명과 함께 창덕궁과 후원을 걸었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2025년 창덕궁 후원, 아침 산책
후원의 산책로는 숨이 너무 가쁘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경사도를 가졌어요. 걸음이 조금 빨라지면 숨이 차고, 조금 느려지면 호흡이 다시 정돈되었어요. 그때쯤 딱 맞춰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나지막하게 자리한 나무와 식물들. 이슬비에 촉촉해진 공기에는 나무의 향기가 가득했어요. 그냥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마음이 충전되었습니다. 아마 왕도 그러셨겠지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머물렀던 창덕궁은 조선의 미의식이 가장 세밀하게 담긴 공간 중 하나라고 해요.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선, 걸음의 속도를 바꾸는 물소리, 나무와 돌과 물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 그림자를 드리우는 달빛처럼 은근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장소의 깊이를 느껴볼 수 없었다는 것.
2026년, 희정당에서 열린 〈조선 공간 미학: 白의 질서〉
그런데 올해 가을, 그 아쉬움이 채워졌어요.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희정당 안에서 열린 전시 〈조선 공간 미학: 白의 질서〉 덕분입니다.

희정당은 '밝은 정치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진, 왕의 생활과 집무를 위한 건축물이었어요. 전시를 보며 '몸을 따라 공간이 움직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종 작가의 선 조각과 권대섭 작가의 항아리가 이루는 조화 앞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몸의 각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졌고, 그 경험은 마치 하늘의 달을 보며 따라 걷는 듯했습니다.

붉은 옻칠의 가구, 연잎이 가득한 연못을 닮은 작품, 호수 위에 뜬 등잔불 같은 빛, 거울과 아크릴이 빛과 색을 계속 바꾸는 조형물까지. 개성이 뚜렷한 작품들인데 소리치지 않았어요. 먼발치에서 은근한 눈빛으로 부채 너머 서로의 시선을 보내듯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소리를 노이즈 캔실링하며 지내는 이 시대에 사람이 지날 때마다 들리는 마루의 삐걱거림은 오히려 사는 인기척처럼 들렸어요.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작품에 더 깊이 집중하게 도왔어요. 전시장 내부에 흐르는 음악도 작품으로 향하도록 주의를 잡아당겼습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명패마저 반들반들하게 옻칠로 마무리된 것을 보며 우리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에도 이토록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희정당 한가운데에는 비단으로 피워 낸 흰 벽도화가 있어요. 벽도화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복숭아꽃을 말합니다. 궁중채화의 기법으로 비단 생초로 만든 2천 송이를 나뭇가지에 붙여 만개한 봄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벽도화가 눈이 부십니다. 몸을 움직이며 전시를 경험하는 동안 휘모리 장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휩쓸었습니다.

그 곁에는 허유정 작가의 〈희정〉이 있었어요. 순은과 정은으로 만든 오얏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오얏꽃은 자두나무에 봄마다 피는 흰 꽃이에요. 그리고 한때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 되었던 꽃이기도 하죠. 같은 꽃이 나무에서 피어나고, 권력의 상징이 되고, 은빛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예전에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한국식 꽃꽂이를 찾아본 적이 있어요. 그때 알게 된 것이 궁중채화였습니다. 잔치와 의례를 위해 비단과 모시로 꽃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해요. 저는 그 마음을 이렇게 읽고 싶었어요. 살아 있는 꽃이 시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 한 철의 빛을 공간에 한참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꽃은 시들어요.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애틋하죠. 자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순간적인 빛의 반짝거림, 내적 충만함, 영적으로 회복되는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예술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요. 시들지 않는 비단 꽃과, 기다려야만 피는 살아 있는 꽃. 두 꽃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어요. 지나가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요.
우리는 공간을 몸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높이로 앉고, 어떤 속도로 걷고, 어디서 잠시 멈추는지 알아요. 그래서 좋은 공간은 우리를 더 빠르게 행동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 속도를 찾게 도와줍니다.
창덕궁에서 아주 오랜만에, 고요하게 감각하며 걸었어요. 오늘, 시선이 먼저 닿는 곳에는 무엇이 있나요? 집안의 한 곳에 식물 한 그루를 옮겨 보거나, 나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거나, 창가에 잠시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주 작은 일이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은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됩니다.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요. 🌿
초록의 마음을 담아, 정재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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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SH : 소식
📌 장성도서관, 정재경 작가 초청 인문학 강연 '식물 보듯 나를 돌보는, 초록생활' 개최
전남광주통합특별시교육청장성도서관은 '2026년 하반기 인문학으로 만나다' 프로그램의 하나로 10월 17일(토) 정재경 작가를 초청해 강연을 연다. 이번 강연은 식물이 자라고 쉬고 다시 시작하는 방식에서 지친 마음을 돌보는 힘을 찾는 시간으로 꾸며진다. 번아웃에서 회복하는 마음의 기술, 기다림과 휴식의 의미,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식물적 삶의 태도를 함께 나눌 예정이다.
📌 정재경 작가, 거마도서관 '화(花)답' 4회 강연 성료
정재경 작가가 10월 8일(목)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거마도서관에서 강연 시리즈 '화(花)답: 꽃으로 묻고 인문학으로 답하다'의 마지막 강연 「꽃의 진화와 생존, 꺾이지 않는 삶에 대하여」를 진행했다. 이번 강연은 꽃이 오랜 진화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온 방식을 살펴보고, 그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으로 이어 풀어냈다.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다시 피어나는 힘이 무엇인지 인문학의 눈으로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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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경 작가, 2026 부산 가든쇼서 강연… 18일 부산낙동강정원
정재경 작가가 10월 18일(일) 오후 2시, '정원이 있는 삶, 정원이 잇는 이야기'를 주제로 열리는 2026 부산 가든쇼(부산낙동강정원, 10월 15~18일)에서 강연한다. 올해 행사는 정원 전시와 공연, 정원학교, 가드닝 체험 등으로 구성된다. 정 작가는 식물인문학의 관점에서 현대인과 자연을 연결하는 실용 지식과 경험을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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