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알못이라도 칼럼이 쓰고 싶어! #12

희극과 비극 사이, 중국 대륙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 날, 1985년 5월 19일

2022.01.31 | 조회 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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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따전의 축구세상

축알못이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일반인

輕敵必敗.

경적필패. 적을 얕보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고사성어다. 손자병법에서 유래했다는 이 고사성어는 상대방과 겨루는 대결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으로 인식하고 있다. 밀림의 왕 사자도 어떤 사냥감을 사냥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듯, 사람 또한 어떤 상대와 대결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실력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면 얕잡아보는 경향을 보인다. 비단 대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신과 차이가 나는 상대방을 만나면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을 깔보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경적필패’ 상황을 경험하거나 목격한다.

축구에서 다 이겨놓고 마지막에 실점하며 역전패를 기록하거나, 격투기 경기에서 시종일관 상대를 제압하다 경기 종료 직전에 상대방에 일격을 당해 KO패를 하는 등이 경적필패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이는 상대방이나 상황을 가볍게 여겨 방심을 풀어서다.

상대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경적필패’는 조직의 위기 관리에 효율적인 고사성어다. 그만큼 준비나 대비를 철저히 하며 자기 조직의 승리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 지도자는 자만과 거만함 대신 겸손을 보여주며 조직에서 인심을 얻고 평판도 좋아진다.

때문에 ‘경적필패’는 하루하루를 전쟁과 같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오늘날 현대인이 반드시 명심해둬야 할 좌우명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축구에서 경적필패의 좋은 사례로 제시할 수 있는 많은 경기들이 있다. 카잔의 기적, 로마의 기적, 2014년 성남과 FC 서울의 FA컵, 몰디브 쇼크 등등... 축구 좀 봤다는 축구팬들은 마음 먹으면 이런 경기들을 최소 10경기 이상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정말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늘 들려줄 이야기 역시 경적필패의 사례다. 바로 5.19 사건(五一九事件, 홍콩에선 五一九之役이라 부름.)이라 불리는 1985년 5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과 홍콩과의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경기다.

5.19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1985년 5월 19일 중국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에 열린 1986 멕시코 월드컵 동아시아 1차예선에서 중국 대표팀이 홍콩 대표팀에게 수도 베이징에서 패배하여 월드컵 지역예선 1라운드에서 탈락한 사건이다. 중국에서도 '519事件(5.19 사건)'이라고 부르며 중국 축구 희대의 흑역사로 취급하지만 홍콩에서는 도하의 기적과 맞먹는 명경기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시기 중국 축구는 상승세를 보여주며 월드컵 진출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중국이 상승세를 기록했던 요인에는 덩샤오핑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7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1978년 덩샤오핑이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의 새 지도자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 밥을 굶어가며 축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을 갈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덩샤오핑은 정권을 잡자마자 중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덩샤오핑 본인이 축구광이어서 했지만 축구의 전국적인 인기를 목격하고 중국이 축구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 중국 인민들이 중국 축구에 물심양면 투자한 덩샤오핑 본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덩샤오핑은 집권 직후 1978년 당시 한창 개최 중이던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중계권이 없음에도 위성 전파를 훔쳐 중국 전역의 TV에 생중계로 보여줬고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던 FIFA와 재빨리 협상하여 1979년 FIFA에 재가입했다. 또 아마추어 리그였던 자국 리그를 개편하여 프로축구 리그를 출범시켰고, 이어 2부, 3부 리그를 창설하며 승강제를 구축시키는 등 중국 축구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함과 동시에 심판을 육성해야 한다며 심판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지원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강팀이 되기란 쉽지 않다. 덩샤오핑 집권 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지역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뉴질랜드에 1-2로 패한 뒤 중국 축구팬들은 수용숸(苏永舜) 감독에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퍼부었고 설상가상으로 멀리 캐나다에서 거주하던 어머니가 편찮아지자 고심 끝에 감독 자리에서 사임했다. 독이 든 성배와도 같은 중국 대표팀 감독 자리를 꺼리는 감독들이 많았고 장홍젠(張宏根) 감독 대행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이후 장홍젠은 니안웨이시(年维泗) 전 감독을 적극 추천했지만, 니안웨이시 또한 이를 거절하며 감독 선임에 난항을 겪었다.

그래도 덩샤오핑의 열정이 조금은 통했던 것일까? 중국은 1984년 아시안컵 준우승과 함께 장쉐린(曾雪麟)이 이끄는 중국 대표팀이 자오다유(趙達裕)의 결승골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아르헨티나가 불과 몇년 후 마라도나의 맹활약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중국의 승리는 충분히 이변이었다.

아시안컵 우승으로 중국 축구계에서 장쉐린 중국 대표팀 감독.
아시안컵 우승으로 중국 축구계에서 장쉐린 중국 대표팀 감독.

아시안컵 준우승과 아르헨티나전 승리로 중국 축구계의 사기는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이대로라면 과거 중국 축구가 보여준 영광을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장쉐린의 중국 대표팀은 월드컵 진출이란 대업을 이뤄내기 위해 아시아 예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86년 12월 7일 열린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예선 추첨이 열렸다. 1라운드에서 중국은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와 한 조를 이루었다. 당시 아시아 지역예선은 각 지역에서 1팀씩 본선에 진출해 통틀어서 2팀이 본선에 진출을 하는 형식이었으며 최종 2개 조 1위 팀은 홈 & 어웨이 경기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 진출 티켓을 가렸다. (아시아는 동·서아시아 디비전 경쟁 방식으로 디비전 우승자에게 본선 티켓을 한 장씩 줬다.)

팬들은 중국이 1라운드에서 무난하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것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그동안 중국이 보여준 경이적인 성적으로 중국 내에서 교만감이 넘쳤다. 장쉐린은 훗날 "선수들의 행동과 말에서 경적(輕敵, 적을 얕보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그 당시 여론은 중국 대표팀의 본선 진출이 필연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중국 대표팀은 1985년 2월 17일 16시 홍콩 정부 대구장에서 열린 홍콩과 1차전에서 0-0을 기록하며 고전했다. 중국 축구팬들은 그들 입장에서 약체라고 생각하던 홍콩 하나 못 이기냐며 한탄했지만 첫 경기였고 이후 마카오, 브루나이를 상대로 연승을 이어가며 그저 예선 첫 경기에 몸이 풀리지 않았기에 생긴 일시적인 현상 정도로 생각했다. 중국은 5차전까지 치른 뒤 홍콩과 동률인 승점 5점을 얻은 상황. 홍콩 역시 1차전을 제외하고 전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는 중국과 홍콩이 대결하게 되었다. 둘 다 4승 1무였고 득실차에서 중국이 앞선 관계로 중국은 비기기만 해도 2라운드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중국 본토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의 경기였기에 당연히 중국의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당시 곽과밍(郭家明, Kwok Ka Ming, 1949년 10월 30일~)홍콩 대표팀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우리는 중국 대표팀을 꺾고 다음 라운드 진출권을 따낼 자신이 있다."라고 발언했다.

중국 축구팬들은 곽과밍의 발언에 코웃음을 치며 예상대로 홍콩을 꺾고 본선행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혔다. 그러나 곽과밍 감독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7일 전 곽과밍 감독은 중국 대표팀을 분석한 결과 지난 마카오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중국의 맹목적인 자신감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폭풍처럼 홍콩 진영을 향해 공격적으로 달려들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결전의 날인 5월 19일, 오후 7시 30분 8만 관중석이 꽉 찬 가운데 중국의 공영방송국인 CCTV, 홍콩 지상파, 홍콩 상업방송국이 동시에 이 경기를 생중계했다. 장쉐린 중국 대표팀 감독은 "15분 안에 골을 넣어야 한다."고 호언했다. 곽과밍 홍콩 대표팀 감독은 세트피스 연습에 열중하며 경기 전 수비적으로 나서며 경기 흐름을 늦추라고 주문했다.

경기 전 예상대로 중국은 초반부터 10차례나 성공력을 발휘해 홍콩의 골문을 향해 매서운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불과 15분 만에 무려 5개의 슛을 날렸지만 홍콩 선수들은 중원에서부터 몸을 사리지 않으며 중국의 공세를 막아냈고, 중국은 슈팅 기회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홍콩의 철통과도 같은 수비진 앞에서, 중국은 고전했다.

전반 19분, 홍콩의 프리킥 상황에서 홍콩의 라이트백 충치탁이 대포알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넣는 이변을 연출했다. 중국 선수들은 한 수 아래라 얕봤던 홍콩에 선제 실점을 먹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중국은 실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후이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중국은 다시 동점을 만들었다. 중국 축구팬들은 잠시 끌려갔던 중국이 리후이의 골을 계기로 다시 역전하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전반전을 1-1로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양 팀은 후반 들어 갑자기 많은 비가 내림과 동시에 더욱 치열해졌다. 쐐기골을 넣으려는 중국도 맹공세를 이어갔고 홍콩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치지 않고 오히려 끈질기게 경기를 이어갔다.

60분 홍콩이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공을 걷어내려다 린레펑-자슈취안의 센터백 듀오에 의해 막혔으나, 공은 여전히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었고, 쿠캄페이가 세컨볼을 따내려 달려든 후 볼을 잡으며 골망을 흔들어 넣었고, 중국은 다시 1-2로 리드를 빼앗겼다. 중국은 홍콩을 상대로 끌려가는 동안 추가점을 올리지 못했고 다급해진 중국은 추가시간 세트피스에서 골키퍼까지 올리는 과감함을 감행하고도 득점에 실패했다.

결국 비기기만 해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경기에서 홍콩에게, 그것도 중국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하면서 월드컵 티켓은 중국의 손에서 멀리 떠나고야 말았다. 중국의 오랜 꿈이었던 월드컵 진출이 8만 관중의 눈 앞에서 사라진 순간이었다.

경기 후 인터뷰를 하는 장쉐린 감독. 사진 속 장쉐린 감독의 착잡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경기 후 인터뷰를 하는 장쉐린 감독. 사진 속 장쉐린 감독의 착잡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중국 대표팀의 라커룸에는 끝없는 침묵이 흘렀고, 장쉐린 감독은 경기 후 당시를 회상하며 선수들은 패잔병과 같이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경기 결과로 인해 분노에 휩싸인 중국 팬들이 이들의 눈 앞에 펼쳐졌다.

중국 축구팬들에게는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 여겨졌던 홍콩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경기 후 베이징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동요했고, 일부 팬들은 관중석에서 필드를 향해 물건을 던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기장을 빠져나온 팬들은 철문을 부수는 것부터 시작해 버스와 대사관 차량이나 외국인 차량 파괴하기, 중국을 막으며 "중국 대표팀 꺼져라!" "장쉐린 감독 총살" 등 입에 담기 힘든 험한 말들을 외쳤고, 무장한 공안의 트럭 앞유리까지 돌로 내리치는 등 베이징은 집단 광기로 가득 찼다. 홍콩 선수들은 공안의 보호 아래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경기장을 떠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팬들은 리펑루(李凤楼, 1912년 6월 15일 ~ 1988년 7월 31일) 중국축구협회장과 대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장쉐린 감독은 그 날 경기 후 베이징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실망한 팬들이 이성을 잃고 관중석에서 필드를 향해 잡동사니를 던지고 일부 팬들이 경기장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 팬들은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장쉐린 나와라!" "국가대표팀을 부끄럽게 만드는구나!"라고 외쳤다. 심지어는 "장쉐린을 총살하라!" "장쉐린을 타도하라!"도 들었다. 축구협회는 선수들을 태우려던 구장 밖 버스가 팬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자 2시간 뒤에 별도의 버스를 보내 차량만 다닐 수 있는 서문에 세워뒀고,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라 탈출할 수 있었다.

폭동은 밤을 넘겨 다음날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출동해야 했다. 특히 중국 공안은 외국인들의 피해가 잇달아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관중들의 폭동과 소요를 심각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나스포츠에선 이 당시 총 127명이 체포됐고, 그 중 20여 명이 형사처벌 판정을 받았다. 중국 팬들의 홍콩전 후 폭동은 언론에 널리 보도됐고, 외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민족주의', '배외주의' 단어를 쓰며 이들을 강도 높게 비난함과 동시에 중국 축구팬과 외국 축구팬을 비교했다.

5·19 사태 이후 중국 축구계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 리펑루 당시 중국축구협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중국 축구계에 떠오르는 영웅에서 역적인 된 장쉐린 중국 대표팀 감독 역시 쓸쓸하게 감독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장쉐린은 이후 1998년 선전 핑안 임시 감독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감독직을 맡지 못했다.

홍콩 축구팬들은 적지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 SYMedia
홍콩 축구팬들은 적지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 SYMedia

반면 홍콩은 축제 분위기였다. 중국 팬들이 폭동을 일으킬 동안 반대편 홍콩 팬들은 숙적 중국을 꺾고 본선행을 확정지은 개선장군 홍콩 대표팀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당시 홍콩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위 회장은 소란스러웠던 그 날 저녁 호텔로 돌아왔을 때 문 밖에서 홍콩 팬들이 이들을 맞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이후 선수들은 팬들을 식당에 초대해 야식을 먹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홍콩 대표팀이 카이탁 공항으로 돌아오자 소방차와 공항 공사차가 함께 줄지어 경적을 울리는 등 선수들은 홍콩 내에서 영웅적인 인기를 끌었다.

5.19 사건은 중국과 홍콩 양 팀에서 큰 교훈을 주었다. 우선 중국은 이번 패배의 원인은 크나큰 방심이었으며, 아무리 우세한 상황이라도 100% 승리할 수 없으니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홍콩엔 열세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싸운다면 승리라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홍콩은 다음 라운드 상대였던 일본과 1차전에서 3-0 패배,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2-1로 패배를 기록하며 합계 점수 5-1로 탈락하며 아쉽게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지만 홍콩 팬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기록한 선수단을 아직도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2015년 5월 19일, 가우룽통에서 5.19 사건 승리 30주년 기념식 만찬을 열었다. 특히나 2014년 우산 혁명으로 불린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인식이 최악이었던 시기였고 5.19 사건 30주년 기념식 만찬은 더욱 성대하게 열었다. 그만큼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홍콩인들에겐 5.19 사건이 역사적인 날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의 장난인 것일까.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2차 지역예선에서 중국은 C조에서 홍콩과 만났다. 공교롭게도 30년 전에도 중국과 홍콩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만났던 걸 생각하면, 정말로 재밌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2차예선 조 추첨에서 중국은 톱시드를, 홍콩은 부탄보다 FIFA 랭킹이 낮아 5번 시드에 배정되며 중국보다 낮게 평가받은 것 또한 30년 전과 비슷하다. 홍콩은 1년 전 우산 혁명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며 다가올 중국과의 경기를 벼르고 있었고 중국 역시 시진핑 집권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축구굴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2경기 모두 무승부. 중국은 홍콩전 졸전으로 예선 탈락 위기에 몰릴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었다. 11월 17일 홍콩 몽콕 스타디움에서 열린 홍콩과 중국 경기 이전 인터뷰에서 알랭 페랭 중국 대표팀 감독은 지난 경기에서 홍콩을 상대로 무승부를 해놓고도 "홍콩의 전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말하며 방심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주전 미드필더 황보원도 "홍콩 선수들은 호날두도 메시도 아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경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상대다."고 말하며 당시 선수단이 홍콩 대표팀을 상당히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전인 1985년이나, 2015년이나 중국은 경적필패의 교훈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선수단부터가 경기 전 부터 방심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5.19 사건 이후 37년이 지난 현재, 중국 축구는 덩샤오핑 생전 소원이었던 월드컵 진출을 단 한 번밖에 이뤄내지 못했다.(그나마 이것도 2002 한일 월드컵 때 이뤄낸 것이어서 덩샤오핑 생전에는 월드컵 진출을 두 눈으로 보지도 못했다.) 또한 아시안컵에선 영웅에서 역적으로 추락한 장쉐린의 업적인 준우승을 뛰어넘지도, 이에 준하는 성적도 기록하지 못 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주도 하에 축구굴기를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내지 못 하고 있다. 또한 자국리그마저 전 해 리그 우승팀이 갑작스레 해체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면서 축구굴기는 현재까지 성과를 내지 못 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중국 축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은 겸손과 방심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1985년 5.19 사건부터 2015년 홍콩 쇼크까지, 두 사건 모두 중국 대표팀은 겸손의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으며 방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단 축구인뿐만 아니라, 중국 축구팬 역시 해당되는 말이다. 이들 또한 겸손이 부족했고 방심했기 때문이다. 중국 축구가 이런 굴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고 발전하긴 위해선 경적필패를 경계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 할 것이다. 이전에 중국 축구가 겪었던 5.19 사건을 잊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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