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36. 일기를 씁시다

세점사이의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10.21 | 조회 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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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여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날씨가 갑자기 확 차가워졌습니다. 오늘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한기가 훅 느껴져서 아니 이게 맞나? 하고 놀랐네요. 계절이 바뀌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계절을 많이 타는 저는 저대로 또 이것저것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요,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잘 해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일기에 대한 글을 가져왔어요. 사실 그렇게 성실한 일기쓰기 사람은 아니지만 요며칠 갑자기 일기가 너무 좋다! 생각이 들어서 뭐가 좋았지? 괜히 생각해 보았답니다. 글 보여드릴게요.

 

 


일기를 씁시다

잉크를 쓰고 싶어서 일기를 쓴다고 하면 너무 유난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만년필과 잉크를 쓰고 싶어서였다. 미도리 노트가 가지고 있는 은은한 미색이 좋았고, 만년필 잉크가 그 종이와 만나서 만드는 묘한 질감이 좋았다. 사람들은 필사를 많이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필사를 주기적으로 할 만큼 성실한 사람은 못 됐다. 아침 필사가 그렇게 좋다던데, 도전은 몇 번 해봤지만 매번 첫 날 성공을 겨우 하고 바로 다음날 그냥 펜 꺼내놓고 핸드폰 보기 시간 정도로 격하되었다. 

작년쯤부터 작은 미도리 무지 노트에다 만년필로 글씨를 썼다. 손바닥만한 노트에다가 하루를 전부 적기에는 내가 너무 구구절절사피엔스고, 왠지 일기같은 일기를 쓰는 건 괜히 너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해서, 그 노트에다 적은 것들의 모양새는 형사수첩의 형식에 가까웠다. 아침에 어디를 가야 하고, 무슨 촬영이 있고, 뭘 해야 하고. 가끔 불현듯 떠오른 생각들에 몇 페이지를 꼬박 채우는 메모를 적어 내려가기는 했지만, 잉크가 그 종이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좋아서 평소의 형사수첩 기록들에 별달리 대단한 이야기들을 더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좋아하는 작가님을 만나 받은 사인도 있었고, 글감으로 쓰려고 꿍쳐둔 메모도 있었고, 내가 내일 뭘 하려고 했더라 했던 것들도 있었으니까. 그 때 그렇게 바보같지만 않았더라면 그 기록들은 딱 그만큼으로 계속됐을 거다.

그 때 받았던 사인과 그 노트
그 때 받았던 사인과 그 노트

별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비를 쫄딱 맞았는데 가방 안에 노트가 있었다. 가방 안이 꽤 젖었다. 우산을 아예 안 쓴 건 아니고 조금 소홀하게 썼지. 사진을 찍으면서 비를 맞는 일이 워낙에 다반사여서 비 맞는 걸 그렇게 개의치 않다 보니 좀 쓸데없이 쿨하게 굴어버렸더랬다. 노트 안의 만년필 잉크는 흠뻑 번져 있었고, 노트도 노트대로 물에 젖어 우글거렸다. 죽었지 뭐. 다행히도 좋아하는 작가님께 받은 사인은 살아남았다. 그 분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 적다가 만년필 잉크가 다 떨어져서 볼펜을  써야 했기 때문에. 볼펜으로 필기를 하니 필기감이 너무 안 좋아서 만년필 안 쓰는 친구가 미도리 노트를 추천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기도 했는데, 어쨌든.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

때는 마침 생일 주변이었다. 친구가 미도리의 코덱스 저널을 선물해준 덕에 두껍고 큰 미도리 노트가 생겼다. 하루에 한 쪽을 넉넉히 쓸 수 있었다. 이런 걸 전처럼 형사수첩으로 쓰기에는 좀 그 덩치가 아까운 데가 있었다. 어차피 들고다니기엔 뭐한 사이즈인 것 같아서 집에다 두고 그 페이지를 꽉 채우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남들이 좋다던 모닝 페이지를 썼다가 내가 매일 아침마다 똑같은 소리만 해서 접고(아침에 깬 직후에는 가장 솔직한 마음이 나온다는데 나의 솔직한 마음은 욕 뿐인가?) 그냥 밤에 매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적을 게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이런저런 내용들이 많이 남아서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였다. 방학숙제 검사를 받던 시절 이후로는 처음 쓰는 일기였는데 나는 제법 능숙한 일기 쓰기 사람인 걸까?

선물받은 코덱스 저널
선물받은 코덱스 저널
이런 메모를 했다
이런 메모를 했다
이런 일기
이런 일기
이런 형사수첩
이런 형사수첩

사실 종이 위에 일기쓰기를 안 한거지 뭐든 쓰기는 참 많이도 써왔다. 매일매일 인스타그램에 2000자를 꽉 채워서 쓰던 시절도 길고, 그러지 않은 때도 메모 정도의 쓰기는 거의 매일 해왔지. 그러니까 그냥 종이랑 잉크가 좋다는 이유로 뭔가 적을 매체가 하나 늘어났을 뿐이다. A5 사이즈 한 바닥 정도 채우는 건 나에게 별스럽지도 않은 일. 어디 올리지 않는 일기는 혼잣말 대신 중얼거리기 좋았다. 그래서 일기는 혼잣말을 잘 안 하는 나에게 꽤 괜찮은 심리 테라피였다. 세상에는 기록의 숭고함이나 열정 그런 걸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은데, 혼잣말 정도라고 이야기를 하려니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되기도 하지만. 하지만 나는 대체로 어디다 업로드하는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에 이런 새삼스럽고 이상한 감상이 들더라도 어쩔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참 이상하게도 나는 일기를 쓸 때마저도 자기검열과 의도적 망각 사이를 오갔다. 내 하루를 끔찍하게 지배한 생각들마저도 어디 내놓고 할 게 못 된다 싶으면 적지 않았다. 그런 날의 일기 안에서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짓눌린 사람 같았다. 그 이유의 존재를 뻔히 아는데도. 적어 놓지 않았더라도 그 때의 일기를 보면 그 이유를 기억하게 되는데, 이걸 다행이라 할지는 모르겠다. 그 외에도 많은 걸 적지 않고 넘어갔다.

요즘은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음악도 잘 안 듣고 지낸다. 음악을 틀자, 까지의 생각도 잘 못하게 되어 버려서 왕복 두 시간 넘는 길을 음악 없이 갔다가 음악 없이 온다. (그렇게 팔랑거리는 틈새에도 사진은 찍다니 신기한 일이지만) 그러다 갑자기 엊그제는 어디에 홀린 듯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었다. 자정 넘은 밤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나는 노래 듣는 걸 아주 좋아했지. 너무 좋아해서 무슨 비싼 이어폰을 사고 헤드폰을 사고 난리 부르스를 추었지.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고 있으니 집까지 영원히 도착하지 않기마저 바라게 되었다. 

코너 하나만 돌면 집이 보일 때쯤 이어폰에서 김수영의 로맨틱이라는 곡이 나왔다. 예전에 콘서트였나 인스타그램 라이브였나에서 (너무 콘서트도 많이 가고 인스타 라이브도 너무 많이 봐서 가물가물하다) 이제는 좀 밝은 사랑 노래도 불러 보고 싶어서 준비하셨다며 한 소절을 불러 주셨었지. 그 때는 미공개곡이었는데. 그 때 듣고 너무 좋아서 그 곡이 발매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정규 앨범에 수록된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 앨범이 발매된 게 작년 초의 일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네) 새삼 오랜만에 너무 좋아서 집 앞을 빙빙 돌다가 곡이 끝난 뒤에야 들어갔다.

이 내용은 일기에 적지 않은 내용이다. 로맨틱을 처음 들은 날의 기쁨도 앨범이 발매된 때의 기쁨도 엊그제 밤의 기쁨도. 이제는 나간 단체 팬 톡방에 호들갑을 떨기는 했었지만, 앨범이 발매된 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떠들썩하게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이렇게 며칠 뒤 떠올려서 글에 적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기에 적지는 않았지. 어디다 적을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사소했는지도. 아니면 그냥. 노트가 비에 쫄딱 젖은 날도 일기를 쓰지는 않았다. 블로그에 적기는 했지만. 

그런 기록들을 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종이 일기의 몫일까? 생각한다. 메모는 무엇이 다르고 다른 사람들은 종이 일기에 어떤 걸 적을까? 문보영의 일기시대를 읽어 볼까? 매일 쓰는 종이 일기의 몫은 어디에 있을까? 종이 위에다가도 거짓말을 한다면. 

밤길
밤길

몇 가지 의문과 잦은 솔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종이 위에 일기를 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전히 잉크가 만년필을 거쳐 종이 위에 스며드는 과정이 보기에 아름답고, 적당히 하루를 정리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좋다. 솔직하든 솔직하지 않든 내 하루 일어난 일들을 마음대로 갈무리해서, 내 마음에 차는 서사로 조작해내는 것도 마음에 든다. 어쨌든 없던 일을 만들지는 않는다. 몇 가지를 말하지 않을 뿐이다. 

말하고 보니, 어쩌면 종이 일기는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종이와 잉크와 거짓말들. 좋아하는 질감들. 그렇게 조작된 거짓말들은 어쨌든 사실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게 지어낸 거짓말들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선명하게 지시하며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니까, 종이 일기 쓰기는 사진 찍기를 닮았다. 아무도 읽지 않는 종이 일기를 쓸 때 나는 허락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허락이나 결심 없이 이미 내 안에 들어앉아 있는 나의 가장 내밀한 감정들에 대해서마저 나는 허락과 편집의 권한을 가진다. 슬픔마저도! 그것이 건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바깥에 내보이는 글에도 편집의 권한은 있다. 그러나 그건 철저하게 바깥의 기준. 이건 철저한 나의 기준 . 종이 위에 만년필로 쓸 때 나는 멋진 사인용 펜을 가진다. 의미라면 의미, 아니라면 아닌 것들. 중요한 것들을 적지 않은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것도 나의 자유인걸.

한 달에 한 번 정도 블로그에 그간의 일상을 갈무리한 기록을 남긴다. 예전에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토대로 뭘 했는지 간략히 썼는데 이제는 일기장을 들춰서 그 때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쓴다. 그러니까 나는 더 살을 붙이고 더 편집한다. 쓰다 보면 오히려 원본 일기보다도 내용이 풍성해진다. 타이핑이 좋기는 좋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그 글에는 공들여 찍은 사진들이 있다. 텍스트의 내용과 결이 맞기도, 맞지 않기도 하는 것들. 나는 거기에 혹시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답은 나오지 않았으나 어쨌든 나는 종이 일기 쓰기를 계속할 것 같다. 종종 빠뜨리고 종종 넘어가고 비도 맞겠으나.

우당탕탕
우당탕탕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무색하게 최근 일기를 보름 정도 건너뛰었다. 전시 준비와 그로 인해 수반된 일들로 너무 바빴다. 사실 핑계였겠지. 핸드폰은 잘만 봤는걸. 하지만 메모는 많이 해뒀다. 며칠 전의 메모에는 난 왜캐 정신이 없을까 하고 적혀 있다. 주기적 업로드와 나눠올리기를 포기하니까 인스타그램이 덜 싫다는 내용을 적기도 했다. 아니면 설탕 중독인가? 하는 이야기, 손바닥 맞고 잠이나 자고 싶다는 이야기. 요즘 내 사진이 마음에 드는데 슬럼프가 올 징조인가? 하는 말. 비꼬기의 즐거움. 이제 술 안 먹어야지 세상이 개빡돌게 할 때는 뭘로 대체해야 할까. 그렇게 적혀 있다. 이 중에 얼마나 일기가 될 수 있었을까? 어쨌든 그 중의 몇몇은 일기가 되었을 것이고 몇몇은 일기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나는 만년필로 뭘 적는 게 좋다.

요즘 제로 음료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탄산수로 대체해 봤는데 제법 괜찮다. 젤리는 또 먹었다. 잠은 좀 더 자야 할 것 같고 사진은 슬럼프가 오기 전에 과로를 걱정해야 할 것 같다. 술은 사실 원래도 거의 안 마셨다. 어찌됐든 일기를 쓰자. 일기는 좋다. 일기는 짱이다. 일기를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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